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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소만수(蘇曼殊)와 이숙동(李叔同): 출가하여 스님이 된 근세의 풍류재자

by 중은우시 2009. 5. 18.

글: 유계흥(劉繼興)

 

소만수와 이숙동은 근대사상 두 명의 신비로운 색채를 지닌 광세기재(曠世奇才)들로서 문학예술분야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다.

 

소만수의 시는 청신준영(淸新雋永)하여 "영계시옹(靈界詩翁)"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의 그림은 유아자(柳亞子)에 의하여 "천추절필(千秋絶筆)"이라고 칭송받은 바 있으며, 그가 홍루몽의 뜻을 내포하여 쓴 <<단홍영안기(斷鴻零雁記)>>는 중국근대문학의 자서전적 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그가 번역한 작품으로는 바이런의 시집과 빅트르 위고의 <<비참세계>>(번역미완)가 있다. 그는 임서, 엄복과 더불어 20세기초반의 3대번역가로 꼽혔다.

 

이숙동은 중국에서 서양유화를 가장 먼저 도입한 사람이다. 그가 조직한 춘류사(春柳社)는 중국의 첫번째 화극(話劇)단체이다. 그의 금석작품집인 <<이노인보>>는 세상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는 소우매(蕭友梅), 조원임(趙元任), 황자(黃自)와  더불어 중국근대음악의 4대 개척자이다; 그가 20세기초에 창간한 <<음악소잡지>>는 중국에 첫번째로 서방음악을 소개한 정기간행물이다; 그가 쓴 가곡 <<송별>>은 지금까지도 불리어지고 있다. "장정외, 고도변, 방초벽련천(長亭外, 古道邊, 芳草碧連天)..."은 일찌감치 가곡의 경전이 되었고, 누구나 들어보았을 정도이다.

 

그들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모두 한 세대를 풍미하고 풍류를 누렸으며, 애정전선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고대 대문인들이 여인과의 사랑을 시로 읆던 풍모를 닮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이 두 재능이 뛰어난 광세의 풍류재자들이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불문에 귀의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안타깝게 생각했다.

 

소만수와 이숙동이 처음 만난 것은 1907년에 상해에서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남사(南社)의 구성원이었고, 그때 이숙동은 <<태평양보>>의 부록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소문수의 소설 <<단홍영안기>>는 바로 이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글은 국가의 정과 신세의 한을 썼는데, 이숙동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작가가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리다는 것을 알고는 더더욱 이 애국시승에 더더욱 감탄하게 된다.

 

남아있느 자료에 따르면, 이숙동의 한 친구는 이숙동이 출가하기 전에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소)만수가 출가하자, 너희들 감상주의문학을 한다는 문인들은 더더욱 인생은 비극이고 일체무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로써 볼 때, 이숙동의 출가는 소만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6월, 소만수가 죽은지 17일째 되는 날, '낭만예술가'라는 칭호를 듣고 있던 이숙동은 스스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항주의 호포사(虎寺)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이후 그는 뛰어난 재주로 실전된지 오래된 남산율종(南山律宗)을 다시 부흥시키고, 제11대조로 모셔지게 되며, 홍일대사(弘一大師)로 칭해진다.

 

그렇다면, 이 두 명의 광세기재는 왜 불문에 귀의했을까?

 

필자는 소만수와 이숙동은 신구가 교체하는 시대에 태어나서, 당시의 역사상황하에서, 사회에는 종교부흥의 풍조가 나타났고, 그들이 세상을 등지고 불문에 귀의한 것은 이러한 사회문화심리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는, 그들 둘은 모두 불행한 신세내력을 지니고 있다. 소만수의 부친은 차행(茶行)의 매판(買辦)이고 1처 3첩을 두었다. 그리고 소만수는 바로 부친과 집안에서 일하는 일본인 고용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숙동의 부친은 천진의 유명한 은행가인데, 이숙동은 부친과 다섯째 첩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로 이같은 신세내력으로 그들 두 사람은 자주 육신은 고통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같다.

 

이상과 포부가 무너진 것도 그들 둘이 불문에 들어간 주요한 원인이다. 소만수와 이숙동은 일찌감치 동맹회에 참가하여, 민주혁명에 대한 열혈을 가지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소만수는 이 일로 여러번 수배를 받기도 했고, 이숙동도 혁명을 갈구하는 <<만강홍>>을 쓴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신해혁명의 회색적 결말과 아는 사람과 친우들이 혁명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실망했다. 중국의 고난이 끝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들은 그저 꽃을 읊고 세상을 한탄하는 것만으로는 마음 속에 쌓인 우울함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문으로 들어가서 헛된 것을 버리고 참된 것을 찾는 또 다른 세계를 탐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