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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장개석의 군사 양영태(楊永泰) 암살사건

by 중은우시 2009. 6. 4.

글: 상예(商豫)

 

양영태(1880-1936), 자는 창경(暢卿)이고 광동 무명(茂名) 사람이다. 1913년에 국민당에 가입하고, 다음해 4월 제1기 국회 참의원에 당선된다. 1918년이후 광동군정부 재정청장, 광동성장을 맡는다. 1927년에는 남경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참의가 된다. 1932년에 장개석을 따라 무한으로 가서 예악환(豫鄂皖, 하남성, 호북성, 안휘성을 가리킴)변경지구 제4차 "위초(圍剿, 포위소탕)"작전에 참가하는데, 그 기간동안 구체적으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안내(安內, 즉 공비소탕)"에는 반드시 "삼푼군사, 칠푼정치(三分軍事, 七分政治)"를 주장하여 장개석의 칭찬을 듣는다. 1936년에 암상당한다.

 

1928년 봄, 북벌혁명이 승리를 거두자, 중국의 정치무대에는 장작림이 동북지방에 웅거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파벌의 대소군벌을 모조리 북벌군에 무너져 버린다.

 

다만, 병력을 지니고 있던 풍옥상(馮玉祥), 이종인(李宗仁), 염석산(閻錫山)은 일찌감치 권력을 빼앗으려는 뜻을 품고 있었고, 장개석의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골머리가 아팠다.

 

장개석이 최고권좌에 오르도록 도와주다

 

이때, 장개석의 맹형이자 당시 외교총장의 직을 맡고 있던 황부(黃)는 양영태를 추천한다. 그를 해내기재(海內奇才)이며, 가슴에 경륜을 품고 있어, 정치를 보좌할만하며, 그를 막료로 쓴다면 나라를 안정시키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향산 벽운사에서 양영태는 황부를 따라가서 장개석을 만난다. 장개석은 양영태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마음 속으로 살짝 실망의 기운이 흐른다. 양영태의 모습은 그다지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서 양영태가 하는 말에 장개석은 그를 괄목상대한다. 양영태는 말을 꺼내자 마자 장개석의 속마음을 헤아린다: "북벌혁명은 이미 승리했다. 총리가 세상을 떠난지도 이미 3년이 흘렀다. 혁명의 장애는 이미 제거되었다. 양모가 직언하는 것을 용서한다면, 총사령관께서는 비록 어깨에 큰 중임을 떠맡았지만, 아주 어려운 난제에 부닥쳤다."

 

"아." 장개석의 눈썹이 꿈틀했고, 눈에서 즉시 빛이 났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양영태는 전혀 흐트러짐없이 말을 이어간다: "총사령관의 공로는 세상을 덮을 정도로 크고, 세상사람이면 모두 안다. 그러나 천하를 살펴보면 여러 군웅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 있어, 단기간내에 이들을 굴복시키기는 어렵다. 총사령관께서는 전총리(손문)의 학생이고, 전총리께서 생전에 총사령관에게 국사를 위임했다. 총사령관께서 먼저 향산 벽운사에서 전총리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면서, 이 제사를 기회로 여러 군웅들을 굴복시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좋아. 좋아!" 장개석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1928년 7월 6일, 장개석은 양영태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등을 이끌고 향산 벽운사의 손중산 영전에 제사를 지냈다. 장개석은 제사에서 충분히 쇼를 했다.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한다든지, 뜨거운 눈물을 샘처럼 흘린다든지, 다른 사람들까지도 눈물짓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개석은 제사를 통하여, '북벌승리' '통일대업완성'을 이룬 총사령관으로 자처하고, 다른 사람들을 압도했다. 양영태는 장개석을 위하여 "손문의 영전에 제사지내며, 관을 붙들고 통곡하는" 계책을 세심하게 기획하였다. 이를 통하여 장개석을 손중산의 유일한 후계자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장개석은 이를 통하여, 중앙당정군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한다.

 

곧이어, 양영태는 장개석을 위하여 그의 두번째 금낭지계를 바친다. "삭번추은(削藩推恩)" 실질적으로는 전력을 다하여 '번'(지방세력)을 없애고, 은혜는 주는 것이 없었다.

 

장개석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등 각 지방세력이 신속히 확대되는 것이었다.

 

양영태는 장개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나라의 개원성세때 백성들은 편안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았다. 당현종에 이르러,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데, 주요한 이유는 번진이 할거했기 때문이다. 당순종때, 왕숙문, 유종원이 황제에게 계책을 올려서, '번을 폐지'하도록 청하였다. 당순종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힘이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 번진때문에 망한다. 지금 비록 천하는 안정되었지만, 각파의 세력 특히 군사세력이 한 지방에 할거하고 있다. 큰 세력만 보더라도, 산서의 염석산, 하남의 풍옥상, 광서의 이종인, 그리고 사천에는 유씨숙질이 있고, 광동에도 이제심이 있다. 만일 동북이 깃발을 바꿔든다면 장학량도 있다. 그들을 모두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중앙관직을 주어 그들의 소굴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각지의 정치분회를 취소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근거지를 떠나게 하고 소굴을 없앤다'는 것이다. 이것이 첫걸음이다. 둘째걸음은 전국군대를 통일적으로 편제하여, 각 실력파들이 생존하고 활동할 자본을 분산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국가가 안정될 것이다."

 

"너의 아이디어는 좋다. 그러나 내가 나서기가 곤란하다. 내가 제안하면 이종인, 풍옥상과 염석산이 분명히 반대할 것이다."

 

"그게 뭐 어려운가요?" 양영태는 처음처럼 조심스럽게 말하지도 않았다: "이 일은 재정부장 송자문 선생이 나서서 제기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그가 국가의 재력물력이 부족하여, 병력을 감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가 정부에 감군방안을 제출한다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장개석은 확연히 깨달았다. 그래서 흥분해서 말했다: "맞다. (송)자문에게 내놓으라면 되겠다. 다른 사람이 반대하기 힘들도록."

 

양영태는 기회를 틈타 장개석에게 또 하나 건의한다. 만일 당권, 군권을 모조리 손에 쥐려면, 먼저 전통을 보내어 하야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두 걸음 앞으로 나가는 고급전략이라고 말했다.

 

시국의 변화에 따라 장개석은 이 책략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제1차 하야를 선언한다. 다만, 권력의 지팡이에 대한 미련은 장개석이 놓치기 어려웠다.

 

양영태는 기운을 내어 말했다: "총사령관. 당신이 말한 것처럼 중산선생의 미완성대업을 완성하려면 쉴틈이 없고 그 책임을 벗어던질 수도 없다. 풍, 염, 이의 세 사람은 가마솥의 아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각개격파가 가능하다. 이들을 평정하려면 청나라초기에 '삼번'을 철폐한 것과 같다. 철폐해도 반란을 일으키고, 철폐하지 않아도 반란을 일으킨다. 구체적인 계책으로는 본인은 여전히 군사적인 수단으로 제4집단군을 해결하고, 경제적인 수단으로 제2집단군을 해결하며, 정치적인 수단으로 제3집단군을 해결하는 것이며, 외교적인 수단으로 동북군을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 국민당내에 아무도 총사령관의 특수한 지위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

 

여기까지 말하고, 양영태는 못을 박듯이 단언했다: "사직과 취임은 그저 연극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감군과 삭번이다."

 

장개석은 그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동의했다.

 

장계(蔣桂)대전, 장,풍,염의 중원대전, 동북장학량의 이탈을 거쳐 양영태가 장개석을 위하여 마련한, '삭번추은'의 계책은 전면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장개석은 바라던대로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장개석을 대신하여 욕을 먹다

 

축록중원의 게임이 끝나자, 장개석은 눈을 무장할거하고 있는 공산당지도하의 각 홍색근거지로 돌렸다. 그는 친히 남창에 가서, 강서남부, 복건서부의 중앙홍군근거지에 대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친다.

 

이미 장개석의 막료장이 된 양영태는 수석브레인으로써 장개석을 따라 전투에 참가했다.

 

장개석이 건립한 남창대본영은 피라미드식의 지휘기구가 있어, 당, 정, 군의 대권을 장악했다. 매일 각 지역에서 오는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각종 공문서가 책상위를 가득 메웠다.

 

양영태는 그 상황을 보고서는 청나라 군기처의 영반대신과 마찬가지로, 먼저 각종 문서를 열람한 후, 10자 내지 100자로 요약하여, 상, 중, 하의 세 개방안으로 정하여 공문의 위에 붙인  다음에 장개석에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는 장개석의 부담을 덜어주었을 뿐아니라, 여러가지 군정계책을 제공했다. 장개석은 이에 크게 만족했다.

 

그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1932년, 양영태는 장개석에 의하여 남창행영 비서장에 임명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일시에 그는 풍운의 인물이 된다.

 

당시 국민당의 모든 중요한 군정문건은 모두 양영태가 먼저 보았다. 그 다음에 장개석에게 보내어 결정하게 했다. 심지어 일부 군정요인들이 남창으로 와서 장개석을 만날 때에도, 양영태가 면담여부를 결정했다.

 

장개석이 각 소비에트지구의 홍군을 '위초'할 때, 효과가 별로 나지 않아서 화를 내는 적이 많았다. 가벼운 경우에는 처벌을 받지만, 중한 경우에는 총살까지 당했다. 양영태는 장개석에게 자주 권했다. 어떤 때에는 몰래 사형에 처하라는 문서를 감추고 내려보내지 않기도 했다. 장개석의 화가 풀린 후에 다시 말해서 구해주었다. 비록 이러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양영태가 장개석을 교사해서 이루어진 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양영태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양영태는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모든 욕을 얻어먹겠다고 생각하고, 장개석의 위엄에 손상이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비서인 진방이 양영태를 위해서 변명을 했주기 위하여 부득이 장개석이 친히 서명한 지시서를 장교들에게 보여주고, 진상을 알렸다. 이를 알고는 양영태가 진방을 혼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좋다. 중국에 양모가 없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장위원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는 전국의 지도자이다. 위엄이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막료장이라면 당연히 주군을 위하여 욕도 먹고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공을 앞세우거나 잘못을 떠넘겨서는 안된다."

 

양영태의 충성에 대하여, 장개석도 확실하게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양영태 때문에 다른 심복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남창당정군 연합판사처를 성립시킨 후에 장개석은 양영태에게 비서장직을 사임하도록 암시한 바 있다.

 

양영태는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고, 공공연히 이러한 때 위원장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고 공언했다. 장개석도 할 수 없이 그를 계속 유임시켰다.

 

암살

 

1933년에서 1935년까지 남창행영기간동안, 장개석은 양영태의 건의에 따라, 대부분의 직권을 남창행영에 귀속시킨다. 당시 국민당이 통제한 지역인 하남, 호복, 호남, 강서, 안휘, 강소, 절강, 복건, 산동과 섬서의 10개성의 인사행정은 모두 남창행영의 지시를 받았다. 양영태가 주재하는 남창행영 제2청은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행정원이었고, 청장인 양영태는 사실상의 '행정원총리'였다.

 

그의 권력확대로, CC계와는 빙탄불상용, 세불양립의 관계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양영태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복선이 되는 것같다.

 

이때, 장개석은 각처로부터의 압력을 받았고, 양영태의 야심이 너무 크고, 날카로움을 너무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를 국민당 통치체계에서의 불안정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애초에 그를 높이 평가하고 신임했던 것은 점차 의심으로 변한다.

 

1934년초, 각 정치파결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CC계와 지방군벌이 국민당원로와 연합하여 압력을 가함에 따라, 장개석은 당시 국민당의 대재자(大才子)이며 절강성교육청장인 진포뢰(陳布雷)를 행영으로 불러 시종실주임을 맡게 한다. 이를 통하여 양영태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1935년, 양영태는 권력이 이미 멀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지방으로 가서 지방 하나를 장악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장군이 외교부장으로 승진할 때, 호북성장의 직위를 이어받겠다고 요구한다. 장개석은 주변의 은환을 제거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한번 형식적으로 만류하다가, 그를 호북성장으로 내보낸다.

 

1936년 10월 25일 오후, 검은구름이 장강의 양안을 뒤덮었다. 가을바람은 소슬하고, 가랑비는 쓸쓸했다.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양영태는 일본의 주한구영사관의 초청을 받아서 연회에 참석한다. 떠나기 전에, 그는 출입할 때마다 항상 입고 다니던 방탄복을 입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첩이 찾아가지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한번 터니, 놀라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쥐가 방탄복에서 도망쳐 나왔다. 양영태는 순간적으로 역겨움을 느끼고 손을 흔들었다: "됐다. 안입으면 되지."

 

첩은 그 모습을 보고는 무슨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미신을 믿던 양영태는 순간적으로 한구의 거리에서 떠돌던 참어를 떠올렸다: "양자위아정치, 만난영태(楊子爲我政治, 萬難永泰)" 그는 마음 속으로 가지 않을 생각을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그래도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한다. 저녁에 양영태는 연회를 마친 후 한구 강한관 성정부전용부두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는 배를 기다린다. 그때 자객이 쏜 4발의 총성이 들리고, 그는 총알을 맞고 사망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양영태는 죽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하여 깊이 새겨 음미할만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일찌감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나는 이미 자신을 국가에 바쳤다. 무슨 원한이 남겠는가? 그저 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고, 국가의 화가 지금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양영태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국민당의 정계에 일대소란을 일으킨다. 장개석도 크게 놀란다. 그는 급전을 보내어 호북성정부에 장례를 준비하도록 하면서, 군경에 범인을 체포하여 엄벌하도록 지시한다.

 

양영태가 암살당한 원인은 불명확하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해하기 힘들다. 반세기동안 여러가지 설이 난무했고 서로 다르다. 결국은 역사의 수수께끼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