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위병(路衛兵)
13세기, 몽골의 철기(鐵騎)는 유라시아대륙에서 그 기세를 막을 자가 없었다. 아시아의 각지는 그들의 말발굽아래 도탄에 빠졌고, 전체 유럽은 공황상태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감히 바다로 나가지 못했고, 독일인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러시아에서는 '황화(黃禍)'라는 말이 나타났다. 전쟁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복욕이 엄청나게 강했던 몽골제국도 가장 전성기에 여러번 전쟁에서 실패한 바가 있다.
안남(安南): 세번에 걸친 실패
안남은 현재의 베트남이다. 중국의 군현이었던 적도 있었고, 오대때 자립했다. 몽골의 총사령관인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하타이는 운남을 평정한 후, 사신을 안남에 보내어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안남은 국력이 아주 강했다 국왕인 진형은 몽골사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량하타이는 대노하여 1253년 병력을 동원하여 안남의 도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몽골군은 적응을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이 병력을 거두어 후퇴했다. 1284년, 원나라는 다시 병력을 파견하여 점성(占城, 베트남 남부)을 공격하겠다고 하면서, 안남에 병력과 군량미를 내놓으라고 한다. 안남국을 치러가는데 길을 내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안남까지 한꺼번에 처리하고자 했다. 몽골군은 다시 안남의 도성으로 공격해 들어갔지만, 식량과 건초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군대내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퇴각한다. 퇴각하는 도중에 안남의 매복에 걸려 참혹한 피해를 입는다. 다음 해, 다시 10만의 병력으로 안남을 공격한다. 바닷길로 운송한 식량과 건초는 안남의 매복에 걸려 모조리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철수하던 도중에 다시 안남군대의 매복에 걸려 낭패한 꼴을 당하게 된다.
버마에서의 2차례 실패
1271년, 버나는 원나라의 조서를 받고 부속국이 된다. 1277년, 버마는 금치(金齒, 현재의 운남성 보산)부족과 마찰이 발생한다. 그러자 원나라는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했고, 버마는 팔막(八莫, 버마북부의 도시)까지 쫓아간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덥고 병사들이 적응을 하지 못함에 따라, 할 수 없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후퇴하고 만다. 1287년, 버마에 정변이 일어나서, 버마의 왕이 서자에게 구금당한다. 운남왕은 병력을 파병하여 토벌하고자 한다. 포감(蒲甘, 지금의 버마중부)까지 도착하나, 식량과 건초의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다시 퇴각한다. 1300년, 버마에 다시 내란이 일어난다. 버마국왕은 동생에게 살해당하고, 버마국왕의 아들은 원나라에 군대를 보내어 죄를 물어달라고 청하게 된다. 이번에도 여전히 몽골군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일본정벌에서의 참패
몽골은 고려를 평정한 후, 일본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나, 거절당한다. 1281년, 쿠빌라이는 대장 흔도와 범문호에게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두 갈래로 나누어 일본을 정벌하고자 한다. 능고(能古), 지하(志賀)의 두 섬에서 회합한 후, 몽골병은 장기간 항해에 지쳐있는데다가 태풍까지 만난다. 장수는 병사를 버려두고 도망치고, 남은 병사들은 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당하여 겨우 2,3만명만 살아서 도망쳐 왔다.
이집트에서의 패배
1259년 가을, 툴루이의 다섯째 아들인 일한국의 창건자 훌라구는 서남아시아를 휩쓸며 시리아를 점령한 후, 몽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훌라구는 군대를 몰고 페르시아로 되돌아간다. 남겨진 선봉장 체더부화는 2만의 군대를 이끌고 계속 이집트까지 진격한다. 체데부화의 사신이 이집트의 술탄 후두스의 투항을 권고하지만, 후두스는 몽골사신의 목을 베어 매단다. 그리고 이슬람성전의 명의로 북아프리카의 모든 무슬림군대를 동원한다. 이리하여 12만의 대군을 조직하여, 아인 잘루트(지금의 파키스탄 경내)에서 몽골군과 대회전을 펼친다. 후두스는 친히 전장터에 나와서 사병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몽골군은 적을 경시하며 함부로 직격하다가, 산골짜기에 갇혀서 전멸하게 된다. 몽골의 서정은 이로써 중단되게 된다.
몽골제국은 아주 침략적이었다. 침략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복욕은 더욱 강해졌고, 통치자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이상의 몇번의 실패는 몽골제국이 가장 전성기일때의 패배하고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기후편차가 있었고, 천시(天時)를 못잡았다. 몽골인들은 북방의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자랐는데, 안남, 버마는 북회귀선과 적도의 사이에 있다. 그리고 바다에 가까워 기후가 고온다습하다. 병사들이 적응되지 않아서, 전염병에 많이 걸려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둘째, 환경으로 인한 지리(地利)를 확보하지 못했다. 몽골은 초원의 기병이다. 정복전쟁에서 평원이면 유리하지만, 남방의 구릉과 산악에는 불리했다. 그들의 우세는 안맘 버마의 산이 많은 지형에서 발휘될 수 없었다. 더더구나 해전에는 약하다. 일본정벌에서 마치 호랑이가 평양에 떨어진 것처럼, 전혀 힘을 쓰지 못해보고 당했다.
셋째, 스스로 자만심에 빠져 인화(人和)를 이루지 못했다. 몽골군은 수십년동안 싸우면 이기는 휘황한 전적을 쌓았다. 그러다보니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적을 경시하고 함부로 돌진했다. 이렇게 적들을 많이 만들다보니, 정복지역에서 그들이 공동으로 대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집트의 전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넷째, 사방에서 정복전을 벌이느라 피로했다. 몽골제국은 사방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선이 너무 넓고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물자조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남, 버마를 정벌할 때 식량과 건초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빼앗기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몽골제국은 정복의 신화를 창조했고, 전세계를 정복하여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민족이라도, 전세계와 비교하면 미미하다. 천시, 지리, 인화는 아마도 어느 한 지방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전세계를 대상으로 얻을 수는 없다. 패배를 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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