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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가난한 관료 좌종당(左宗棠)과 부유한 상인 호설암(胡雪巖)

by 중은우시 2009. 5. 12.

글: 왕기경(王紀卿)

 

좌종당은 절강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기 위하여는 순서에 따라 점진적인 전략을 취하여야 한다고 쓴 그 보고서내에 첨부를 한 부 붙여서, 능력있는 인물들을 그의 부하로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명단중에 첫번째로 이름이 오른 사람이 바로 호광용(胡光墉)이다.

 

"호광용은 강서후보도(江西候補道)로서 공적이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해왔으며, 근면하고 능력이 있다. 지금 이미 강서에 와 있으니, 그에게 후방조달업무를 맡길만하다. 이 사람은 절강의 신사로 절강의 사무를 처리하는데 상황을 잘 아니, 순조롭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만일 그로 하여금 초군대영에서 일하게 하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단은 좌종당이 여러해동안 수집한 인재에 관한 정보이고, 문관 무관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인재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강력한 진영이 확림되려면,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초군(楚軍)이 강서에 있을 때, 군량조달이 아주 곤란했다. 절강에 진입한 이후, 각 부서는 관병들의 군량이 부족하여 고생하였는데, 심한 곳은 1년치가 부족했다. 어떤 기업의 직원이더라도, 1년동안 급여가 지급되지 않으면, 회사가 어떤 상황이겠는가? 아마 일찌감치 사람들은 다 흩어져버렸을 것이다. 하물며 군대에서 사람들이 내일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돈도 받지 않고 그냥 싸우려고 하겠는가?

 

청나라조정의 당시 재정은 외국열강에게 배상금도 지급해야 하고, 군대가 십여개성에서 전투하는 것도 지원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금고가 바닥나고,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인재만 있으면 자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좌종당이 이 보고서에서 호광용을 달라고 한 것은 바로 그에게 군량조달의 난제를 맡겨 해결토록 하기 위함이다.

 

호광용은 바로 나중에 유명한 홍정상인(紅頂商人)인 호설암(胡雪巖)이다. 좌종당이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관상의 결탁에 가장 능했기 때문이다.

 

이 안휘 사람은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걸어온 인생의 역정이 특이했다. 좌종당은 관료사회에 들어간 후에 사야(師爺)의 길을 걸었다. 호설암을 길은 달랐지만, "장사를 잘하는 사람이 관료가 된다", 먼저 상인으로, 돈을 번 다음에 다시 돈으로 관직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방식은 아주 신선했다. 좌종당의 관료의 길보다도 더욱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청말의 상품경제는 발달하지 못했다. 상계에서 정계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관직을 사는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그중 상인은 아주 적은 비율을 차지했다. 대부분 관직을 사는 사람은 그냥 허직(虛職), 즉 실권은 없고 그저 관모를 쓰는 사람이다. 지금은 우리가 상품경제시대에 들어와서, 자주 정경일체, 정경분리, 관상결탁등등의 얘기를 하고, 관료를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상인이 돈으로 시장, 성장의 자리를 산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도 호설암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다.

 

호설암은 1823년에 태어났다. 도광3년으로 좌종당보다 11살이 어리다. 그의 출생지는 깜짝 놀랄만한 곳이다. 그는 안휘 적계(績溪) 사람이다. 적계현은 비록 작지만,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국학대가인 호적(胡適)과 현재 국가주석인 호금도(胡錦濤)가 모두 적계사람이다.

 

호설암의 출신은 빈한했고,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어려서 약간 배운 것은 모두 부친이 가르쳐준 것이다. 12살이 되어 부친이 돌아가시고, 큰형이 부친의 역할을 대신했다. 호설암은 세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했다. 집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는 외지로 나가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친척의 소개를 받아 고향을 떠나 항주의 신화전장(信和錢莊)으로 가서 일을 배운다.

 

전장은 바로 중국 초기의 은행이다. 업무는 비교적 단순했다. 주로 예금과 대출을 했다. 호설암이 전장에 들어간 후, 현재의 은행직원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학도(學徒)부터 시작하여 그저 시키는대로 하여야 했고, 손님들의 입맛에 맞추어주어야 했다.

 

학도가 하는 일은 모두 힘든 일 뿐이었다. 남자보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사람이라고 하기도 힘든 일을 했다. 그는 전장의 업무를 배울 뿐아니라, 물을 긷고, 청소하고, 요강을 버리는 일도 했다. 지저분하고 힘든 일이라면 주인은 모두 그를 시켰다.

 

그러나, 이것들도 호설암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좋은 유전인자를 타고난 것같다. 청명하고 영리하며, 말을 잘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잘 봤고, 상대방의 뜻을 헤아려 일을 처리했고, 주인의 환심을 샀다. 인간성이 좋을 뿐아니라 업무실적도 뛰어났다. 주인은 그가 좋은 인재라고 생각해서 그를 화계(計)로 승진시킨다. 이는 은행업무원에 해당한다. 단지 양복과 구두를 신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승진도 호설암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야심이 큰 젊은이였따. 그는 스스로 장사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꿈속에서 자신의 전장을 여는 것을 꿈꾸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전장주인의 재목이고, 금융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백일몽이다.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자본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호설암의 상업철학과 모략기교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재미있게 얘기한다. 아주 두터운 책으로까지 썼다. 호설암이 벼락부자가 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은 딱 하나이다: 그가 정계에 믿을만한 뒷배경을 잡았다는 것이고, 관리들과 결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장사방법은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그가 돈을 번 비결이 바로 상인들이 방문좌도의 길로 들어가는 입무가이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설암은 전장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 관청을 공략해서, 관리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왕유령(王有齡)과의 관계는 야사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소설로도 각색되었다. 그 내용은 그가 왕유령이 관직으로 나가는데 돈을 대주고 나중에 풍성한 댓가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왕유령이 가장 곤란할 때, 그는 몰래 전쟁에서 500냥은자를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주고 북경으로 과거를 보러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드웨어투자는 500냥은자이지만, 소프트웨어투자는 그 이상이다. 그는 그에게 자신의 앞날을 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일로 전장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이 투자는 그의 모든 것을 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큰 도박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볼만한 점이라면, 왕유령이 과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천진에서 하계청(何桂淸) 시랑을 만나고, 그의 추천으로 절강순무의 아래에서 양대총판(糧臺總辦)이 되었던 것이다. 호설암도 이때부터 큰 이익을 보게 된다. 장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구르면 구를수록 커졌따. 그리하여 한 지방에서 최고부자의 반열에 오른다. 왕유령은 은인에게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강서후보도라는 직위까지 주었따.

 

야사소설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기로 하자. 다만 호설암은 확실히 왕유령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이 관계를 통하여 장사에서 득을 많이 보았다.

 

왕유령이 호주지부를 지내는 동안에, 호설암으로 하여금 호주의 공금고를 관리하게 하였고, 사행(絲行)을 열도록 해주었다. 공금으로 농민들의 양잠을 지원하고, 나중에 현지에서 잠사를 수매하여, 항주와 상해로 운송했다. 그렇게 하여 돈을 벌면 원금은 절강성의 금고에 넣었다. 탁까놓고 얘기하자면 이것은 공금을 유용하여 장사를 하고, 자신은 이익을 번 것이다. 그리고 원금만 공금으로 되돌려 준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정말 뛰어났다. 발견되지만 않았더라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호설암이 이런 모범을 보임에 따라, 후세에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직무편의를 이용하여 공금으로 장사를 하거나, 땅을 차지하고 부동산투기를 하거나, 주식투기를 한다.

 

호설암은 왕유령을 통하여 관계에 결탁하는 범위와 직급을 넓혀간다. 그는 절강순무 황종한(黃宗漢)을 설득하여, 약방에 지분투자하게 만든다. 전쟁기간동안, 전염병이 유행하자, 약품을 가진 사람은 떼돈을 벌었다. 하물며 회사안에 관리의 지분이 있는데, 행정기관에서는 그 약국이 시장을 독점하도록 도와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물가부서가 가격을 제한하는 것도 겁내지 않았다. 이런 장사를 하면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회사는 지분을 관리에게 주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면 돈벌 일은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관상결탁은 호설암이 벼락부자가 된 가장 기본적인 원인이다. 두번째 원인은 바로 서양상인이다. 호설암이 살던 시대에 많은 외국자본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들 자본은 중국시장에 빠르게 진입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하여 일부 중간인들이 서양상인들과 중국관리를 연결시켜주고 중간에서 양쪽으로부터 모두 커미션을 받아챙겼다. 호설암은 이것에 주목했다.

 

호설암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그는 관청을 장악하여 왕유령과 관계가 좋으므로, 이 관계를 이용하여, 절강해운국에서 20만냥백은을 빌려, "부강전장(阜康錢莊)"을 차린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첫번째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그는 드디어 전장주인이 된 것이다.

 

왕유령은 절강의 재정수입을 호설암의 전장에 주어 관리하도록 시켰다. 절강은 당시에 재정수입이 가장 많은 곳중 하나였다. 호설암이 이렇게 거액의 돈을 보관하게 되니, 돈을 벌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금방 전체 절강성에서 첫손꼽는 금융가가 된다.

 

매년 몇 배씩 자산이 불어나니, 몇년이 지나지 않아, 집안재산이 수천이 되고, 천하제일부자가 된다.

 

호설암이 서양상인들을 장악하는 것도 아주 순조로웠다. 그는 상해탄의 매판(買辦)과 영국HSBC은행과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이 기회에 각 양행의 경리와 중국인매판을 사귄다. 나중에 그가 서양의 모든 양행과 유명한 매판들으 정부측중개인을 맡는 기초를 다진 것이다.

 

이 때 호설암은 좌종당을 몰랐다. 그는 비록 한 지방의 최고갑부이지만, 아직은 기세가 크지는 못했다. 그가 상계에서 진정으로 우뚝 선 것은 바로 좌종당 때문이다.

 

왕유령은 단명 순무였다. 그가 손해를 본 것은 작은 계산은 잘하지만 큰 계산을 잘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군(湘軍)과의 관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절강의 전투가 시급해졌을 때, 그는 상군에 시급히 구원을 요청하지만, 전투가 좀 느슨해지면 상군이 절강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곤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제공해야되는 군량조달비용이 아까워서였다. 증국번은 화가나서 다시는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고, 좌종당이 도와주고 싶어했지만, 증국번이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수성(李秀成)의 태평군이 항주로 밀고 들어올 때, 왕유령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까지 써서 상군에게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증국번은 그들 도와줄래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평군의 칼아래 죽지 않고자,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게 된다.

 

왕유령이 죽자, 호설암은 배경을 상실했다. 만일 좌종당의 신초군이 절강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가 천하제일의 갑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호설암이 옛배경이 무너진 것을 보고는 적극적으로 좌종당을 찾아가서 그를 위하여 일했다고.

 

도대체 누가 먼저 상대방을 찾았는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좌종당이 호설암을 먼저 찾았다는 것이 보다 믿을만하다. 호설암은 돈을 벌고 싶었고 권력자와 줄을 댈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돈이 모자란 관리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반드시 돈을 좌종당에게 쏟아부을 필요는 없었다. 좌종당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쉽게 주머니를 열어 돈을 쳐바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좌종당은 군량조달이 시급했고, 목마른 사람같았다. 그로서는 재물을 구할 필요가 컸다. 누구든지 큰 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면 그가 적극적으로 찾아나섰다.

 

좌종당은 일찌감치 호설암이 부유한 상인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절강에 들어온 후, 호설암이 관청과 결탁했다는 여러가지 소문도 들었다. 당연히 백설들은 호설암을 좋게 보지 않았다. 관상결탁은 모두 싫어하는 것이고, 부자를 미워하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좌종당은 일부 보고서를 받았는데, 호설암을 고발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 내용은 항주에서 첫손꼽히는 대부자가 항주가 함락되기도 전에, 졸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호화주택을 사고 첩도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좌종당은 근검절약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심리상태는 아주 건강했다. 돈있는 사람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그가 사야로 지낼 때 부자들에게 돈을 기부하라고 권한 적이 많았다. 천하의 부자들이 모조리 죽어버린다면, 누구에게 기부를 받을 것인가. 이 가난한 관리는 돈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을 더 많이 내놓았고, 부하들에게 먹을 것이 생겼고, 군수물자가 조달되었다. 그가 투기꾼이든 아니든, 권력자에게 빌붙으려는 자이건 아니건, 좌종당은 오로지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좌종당이 묘사한 호설암은 절대 이익의 앞에서는 의리를 버리는 간사한 상인이 아니고, "공적인 일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자 하며 근면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군수물자조달책임자가 되는데 더욱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절강순무가 된 후, 바로 청나라조정에 이 사람을 그의 군영에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호설암의 당시 관직은 강서후보도였다. 그리고 사람은 이미 강서에 도착했다. 혹자는 이것은 호설암이 도망친 것이라고도 말한다. 당시 전체 절강성은 거의 태평군에게 모두 점령되었다. 그는 관리이면서 상인인 신분이므로 태평군의 점령지역하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좌종당은 군수필요에 따라, 호설암을 시급히 기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의문이 없다. 공식적인 이유는 "절강의 신사로 하여금 절강의 일을 처리하게 한다"는 것이지만, 좌종당이 겨냥한 것은 호설암의 주머니에 든 돈과 그의 투자이념이었다.

 

호설암은 한동안 생각한 후에, 좌종당이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고, 이 나무의 그늘아래에서는 시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의 이전 배경인 왕유령보다 몇 배나 강한 인물이다. 그는 크게 망설이지 않고, 좌종당을 위하여 힘을 쓰기 시작한다.

 

이 결심은 이후 호설암에게 더욱 큰 성공을 가져다 준다.

 

호설암이 처음에 좌종당을 보았을 때, 풍성한 예물을 준비한다. 좌종당은 군영에서 한참 바쁘게 일처리를 한 후에야 예물을 받는다. 그가 좌종당에게 보내준 것은 군량이었다. 20만석의 쌀이었다.

 

좌종당은 자신이 금으로 된 벽돌을 받은 것보다도 기뻐했다. 기근과 질병이 횡행하던 시절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먹거리이고, 쌀은 금보다도 귀했다.

 

양식은 무가지보였다. 전년에 태평군이 항주를 공격할 때, 10개의 성문을 죽어라 방어하면서, 수비병사들은 배고픔을 견뎠다. 성안에는 공포분위기가 감돌았다. 양식이 모자라다보니 1석의 쌀이 100냥은자에 팔렸다. 주민들은 군대에 10만냥을 기부하였는데, 쌀을 살래야 살 수가 없었다. 길가에는 굶어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풀뿌리, 부평, 파초잎도 모조리 먹어치웠다. 할 수 없이 가죽을 끓여먹으면서 배고픔을 견뎠다.

 

이 20석의 쌀은 초군에 있어서 눈속에 목탄을 보내온 것보다도 훨씬 진귀한 것이었다.

 

호설암의 큰 씀씀이는 좌종당의 마음에 와닿았다. 좌종당은 그와 정오까지 얘기하다가 그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부인 주이단이 친히 만든 납육으로 그를 대접한다. 이는 아주 높이 대접한 것이었고, 주인과 손님이 모두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

 

그후 좌종당은 이 남정상인(藍頂商人)에 대하여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 호설암은 상인들 중에 기남아이다.

- 호설암은 비록 상인출신이지만, 호협의 기개가 있다. 저번에 절강이 함락당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도와준 적이 있다.

 

그러나, 1862년은 호설암과 좌종당의 교분이 막 시작된 때였다. 그가 홍색(紅色)의 정자(頂子)를 매려면 아직도 한동안의 노력이 더 필요했다.

 

호설암은 십여년을 하루같이 좌종당을 위해 세 가지 일을 처리해준다. 첫째는 군량조달이다. 둘째는 무기구매이다. 셋째는 서양업무를 처리해주는 것이었다. 좌종당이 매번 사령관이 되어 전투에 나갈 때마다 병마가 움직이기도 전에 양식과 풀이 먼저 움직였다. 호설암은 시종 그의 경제적 지주였다. 그는 자신의 돈을 내놓았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돈을 기부하도록 권했다. 좌종당은 돈이 조금 부족하면, 즉시 그를 생각하게 된다.

 

호설암은 머리를 잘 굴렸다. 좌종당을 위하여 군수물자를 조달할 새로운 방법을 잘 강구해냈다. 외국상인들로부터 대출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출은 저당도 필요없고 정부가 보증하는 것이었다. 보증인은 통상항구의 세관이었다. 심사허가인은 모두 각 성의 순무였다. 각 성은 규정된 기간내에 원금에 이자를 가산하여 상환할 것을 보증해주었다.

 

이 방법은 좌종당의 큰 난제를 해결해준다. 조정의 문서만 가지고 동남연해의 5개성에 돈을 달라고 해도 그것은 잘 통하지 않았다. 각성은 여러해의 전쟁을 겪다보니, 재정이 아주 어려웠고, 돈을 제때 지급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는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울 수는 없다. 그래서 먼저 군량을 손에 넣은 다음에 각성으로 하여금 천천히 갚도록 하는 것은 아주 타당한 방법이었다.

 

외채를 빌려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파천황적인 조치였고,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에 맞지 않았다. 다만, 조정은 이해관계를 잘 따져본 후에 역시 강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국고는 비었고, 전투는 시급하니, 외국인들에게 대출을 받자는 것이다. 이는 부득이한 조치였따.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은 외채를 빌리는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 일의 처리는 좌종당이 직접 나서기 불편했다. 호설암이 앞에 나섰다. 그는 일찌감치 서양상인들과 어울렸고, 상해탄의 양행의 오너들과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나서자 일은 바로 성사되었다.

 

이때부터 호설암은 정부에서 외채를 대출하는 브로커역할을 하게 된다.

 

좌종당은 매년 전투를 했다. 1867년부터 1881년까지 14년간, 호설암은 청나라조정을 대표하여 서양상인들로부터 돈을 빌린다. 금액은 1,595만냥백은에 이른다.

 

금액이 이처럼 커지게 되니, 대출과정에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았겠는가?

 

호설암은 상인이다. 좌종당을 도와준 것도 결국은 자신이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거금을 다루다보니 그는 거기에서 큰 이익을 취한다. 당시 상해에서 중국인들에게 대출해주는 서양상인은 많았다. 그리고 브로커에게 주는 커미션이 상당히 풍성했다. 호설암은 외국은행과 본국정부간에 대출건을 처리해주게 되니, 거기서 얼마나 많은 돈을 챙겼을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만일 그가 엄격히 규정을 지켜 일처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좌종당이 그에게 공짜로 일을 시키지는 않았지 않겠는가? 그의 정치투자에 대하여 좌종당은 당연히 댓가를 되돌려 주었다.

 

사실상, 호설암의 재물은 직선으로 상승한다. 1872년, 동치11년, 그의 부강전장은 20여개의 분점을 보유하고, 대강남북에 포진된다. 20여만냥의 자금을 제외하고, 호설암은 1만무(1무는 200평)의 전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2명의 첩을 두었는데, 세상에서는 "동루십이채(東樓十二釵)"라고 불렀다. 호설암은 그녀들을 위하여 호화로운 휴게장소인 교루(嬌樓)를 만들어준다. 거기에 수만냥을 썼으니, 현대의 라이창싱의 홍루에 버금갈만하다. 이 교루는 금벽휘황하고, 사방의 풍경이 아름다웠으며, 인공적으로 서호, 볼래선각등 경치를 교묘히 배합시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볼거리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그의 첩들은 나누어 거주했고,

호설암은 황제가 후궁을 총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마다 여기저기를 옮겨다녔다. 생활이 극히 호사스러웠다. 그는 자주 교루에 머무르고, 여인들과 지냈다. 왕강년이 <<장해선록>>에는 그의 파산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에서 연유한다고 적었다.

 

"항주사람 호 모는 부유하기가 군주와 같아, 근 수십년동안 드물게 보는 정도였따. 그러나 황음하고 사치하여, 나중에 패망하게 된다"

 

호설암은 좌종당을 위하여 서양사업을 대거 벌인다. 좌종당은 복주선정국을 만들었는데, 호설암이 빠질 수 없었다. 재료구매부터 서양엔지니어의 초빙, 본국 기술자의 고용, 공예국의 개설까지 좌종당은 모조리 호설암에게 맡겨서 처리했따. 나중에 감숙직니총국을 만들었는데, 호설암이 외국에서 기계를 구매하였다. 또한 호설암이 외국에서 구매해온 서양의 새 기기로 경하를 뚫었다. 이외에 부대의 모든 병영건설, 군수물자공급, 명절선물구매등도 호설암이 처리했다.

 

군량의 조달, 무기구매와 서양업무의 처리의 3가지 큰 일은 호설암이 모조리 깔끔하게 처리했다. 이 세가지 큰 일을 잘 처리한 것은 좌종당과 호설암에게 있어서 모두 인생의 최정점에 이르게 해준다.

 

좌종당과 호설암의 교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관상결탁이다. 다만, 좌종당은 거기서 사리사욕을 도모하지 않았다. 이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호설암은 국가가 곤란할 때, 있는 힘껏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 비록 그 가운데 많은 이익을 챙겼지만, 그는 좌종당을 도와서 신강을 수복하게 하는데도 공로를 세웠다.

 

좌종당은 의리를 중시하는 호남사람이다. 그는 호설암이 돈을 크게 벌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뿐아니라, 황제에게 그의 공로에 대한 포상을 요청한다. 좌종당은 세번에 걸쳐 호설암에게 상을 내리도록 요청하고, 섬서순무 담종린과 연명으로 청하여, 파격적으로 호설암에게 상을 내리도록 요청하기도 한다. 그의 공로로 언급한 것이 9가지 정도이다.

 

청나라조정은 호설암에게 포정사의 관직을 내리고, 황마괘(黃馬)를 하사하고, 자금성을 말을 탈 수 있도록 해주고, 호설암의 모친은 1품부인의 직위를 내린다. 이홍장까지도 그의 집을 찾아와서 예물을 주고 축하할 정도였다.

 

좌종당과 호설암의 합작은 큰 성공을 거둔다. 좌종당은 호설암을 위하여 더욱 큰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에게 거액의 사업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호설암은 민족공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프랑스인들과 생사대전(生絲大戰)을 벌이기도 한다. 좌종당의 은혜를 갚아주는 도움하에서 그는 엄청난 재물을 모은 상인이 되고, 일세를 풍미한 홍정상인이 된다.

 

호설암이 좌종당을 알기 전에는 부유한 상인에 불과했지만, 그는 나중에 투자자가 되고, 신흥공업을 일으키며, 대외개방에 앞장선다. 이것은 모두 좌종당을 알고 난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