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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수나라의 4차에 걸친 고구려침공

by 중은우시 2009. 2. 27.

글: 건가(健哥)

 

1. 배경

 

589년, 수나라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국을 통일했고, 300년간에 걸친 분열국면을 종식시켰다. 중국을 통일한 후, 수나라는 주변국가, 민족들에게 신하로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그에 따랐다. 다만, 고구려의 평원왕과 이후의 영양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여러차례 수나라의 북방변경을 소규모로 침입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수문제는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다. 596년, 수나라의 특사가 돌궐에서 고구려가 돌궐에 보낸 특사와 만난다. 수문제는 서신을 고구려에 전하여 고구려에 돌궐과의 군사연맹을 종료시킬 것을 요구하고, 수나라 변방을 교란시키지 말 것과 수나라에 신하로 복속한다는 것을 표시하라고 요구한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수문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였지만, 다음 해, 즉 597년, 평양왕은 말갈과 연합하여 수나라의 하북 군사기지를 공격한다.

 

2. 제1차전쟁(598년)

 

598년, 수문제는 어린아들 양량(楊諒)을 고영(高潁) 및 대장 주라후와 함께 30만 육군해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량의 군대가 출발할 때는 마침 고구려의 우기(雨期)였다. 큰 비로 인하여 양량의 군대는 전진하고 물자공급을 받는데 아주 곤란을 겪었다. 고구려는 계속 양량의 군대를 습격하여 손실을 크게 끼쳤다. 그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없다고 생각하고, 양량은 주라후의 해군과 회합한다.

 

주라후의 해군도 여러가지 곤란을 겪고 있었다. 비록 수나라의 해군은 가능한 한 해안에 붙어서 전진했지만, 해상에서의 큰 파도는 많은 배를 전복시켰다. 수나라의 해군이 닻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면, 고구려는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습격하곤 했다. 주라후와 강이식(姜以式)의 5만 고구려해군이 발해에서 맞붙었다. 주라후는 미리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어서 원기를 크게 상해서, 고구려에 대패한다.

 

역사서에서 이번 전투에서 수나라군은 90%를 잃었다고 적고 있다. 수나라와 비교하자면, 고구려는 사상이 아주 적었다. 양량은 별 도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철수한다. 이번 전투는 수문제에 있어서 유일한 대패전이었다. 수나라의 재차 침입을 막기 위하여, 영양왕 고원(高元)은 일찌기 글을 올려 "요동분토신원(遼東糞土臣元)"이라고 칭한다. 수문제는 할 수 없이 병력을 철수시키고, 예전과 같이 고구려를 대해준다.

 

3. 제2차전쟁(612년)

 

(1) 사전준비

 

604년, 수양제가 부친 수문제를 죽이고 등극한다. 그 후 경항대운하를 건설하여, 중국북부의 정치중심과 경제가 발달한 중국남부를 연결시킨다. 이는 지역간 대규모 군대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항대운하의 건설은 수백만에 이르는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백성들은 피로하고 재물도 많이 썼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통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611년, 대운하가 건설된 후, 수양제는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모집한 군대는 현재의 북경에 집중시켰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번 모집은 수년간이 걸렸고, 규모도 전대미문이었다. 한꺼번에 개략 113만의 작전부대를 꾸린다. 물자조달과 운송을 책임진 인원은 이 숫자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전체 군대의 총인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개략은 300만 내지 500만이 될 것으로 본다. 612년, 수나라의 대군이 출발한다. 인원이 너무 많아서, 전체 부대는 40일만에 비로소 출발을 완료한다. 행군부대의 길이는 400리에 이르렀다.

 

(2) 요동지전

 

598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완충지대를 얻었다. 이들 지역은 수나라와 같은 대규모 군대와 정면으로 맞부닥치는데는 불리했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군대를 요하일대에서 철수시킨다. 하늘과 땅이 도와서인제, 그 해의 요하는 일찌감치 해동되었다. 수양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요하의 물이 이미 완전히 녹아 있었다. 수양제는 전혀 기죽지 않고, 유햐에 3개의 다리를 놓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수양제가 만든 다리가 건너편에 도달하기도 전에 고구려군은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양제의 제1차진격을 막아낸다. 그래도, 수양제는 마침내 다리를 완공시키고, 수나라군대는 다리를 건너 고구려의 성보(城堡)를 포위한다.

 

개전하기 전에, 수양제는 수나라장수들에게 함부로 어떠한 작전결정도 내리지 말라고 명령하고, 반드시 자신에게 보고한 후에 다시 명령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수나라군대로 하여금 전장터에서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수나라장수는 매번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사람을 수양제에게 보내어 지시를 받았다. 이는 즉시 의사결정을 하여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구려의 군대는 이로 인하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재정비하고 반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5달이 흘렀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성보 한 개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전략을 바꾸어야할 필요가 생겼다.

 

(3) 평양지전

 

수양제의 신전략은 고구려와 요동에서 싸우는 동시에, 해군을 보내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30여만육군과 20만해군으로 구성된 선발부대는 이렇게 출발한다.

 

(4) 해상의 진공

 

수나라의 해군은 육군보다 먼저 대동강에 도착한다. 그리고 수나라의 육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양왕은 약간의 군대를 보내어 수나라 군대와 교전을 시작한다. 가볍게 한번 싸우다가, 고구려의 군대는 패배한 척하며 성안으로 철수한다. 수나라군대의 장수들은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로 보고 10만의 군대로 평양을 공성하기 시작한다.

 

수나라군대가 평양의 외곽 성보를 포위공격할 때, 대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성벽위에는 아무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성보에 들어간 후, 땅 위에는 돈과 무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중하기 위하여 수나라군대장수는 약탈을 금지시킨다. 수나라군대가 한 사묘(寺廟)에 도착했을 때,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는다. 그러나 고구려군대가 승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는 도망친다. 이번에 수나라군대장수는 정말 고구려가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외곽성보를 약탈하기 시작한다.

 

수나라군대가 약탈을 할 때, 수천명으로 구성된 고구려의 선발부대가 수나라군대에 매복공격을 개시한다.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던 수나라군대는 일시간에 흐트러진다. 그리고 바닷가로 철수한다. 10만의 수나라군대는 겨우 수천명만 살아서 돌아온다. 이번의 단독행동이 실패한 후, 수나라군대의 장수는 육군이 도착한 후에 다시 평양을 포위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5) 육상의 진공

 

그러나, 수양제가 파견한 육군도 오는 도중에 문제에 부닥친다. 수나라국내에서 행군할 때는 물자조달이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단 고구려의 영토에 들어오자, 수나라군대의 물자공급은 계속 고구려의 습격을 받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양제는 모든 사병들에게 자신의 음식물을 휴대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는 사병들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켰다. 많은 병사들은 짐을 줄이기 위하여 가지고 있던 음식물을 버려버린다. 수나라군대가 압록강을 건널 때쯤에는 이미 물자부족이 심각했다.

 

압록강과 평양의 중간에는 청천강이라는 강이 있다.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은 청천강의 상류에 댐을 쌓아 물을 보관하도록 한다. 수나라군대가 청천강에 도착한 후, 강물이 아주 얕은 것을 보고는 수나라군대가 강물을 그대로 건너왔다. 수나라군대가 강을 막 건널 때쯤, 을지문덕은 갑문을 열도록 하여, 물을 내려보낸다. 수천의 수나라군대가 익사한다. 을지문덕은 그후 고구려군대를 이끌고 수나라군대를 향하여 맹렬하게 공격한다. 수양제가 파견한 30만군대는 겨우 2700명만이 살아서 돌아간다.

 

4. 제4차전쟁(613년)

 

613년, 수양제는 다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번에도 아무런 성과없이 되돌아온다. 수양제가 없을 때, 양소(楊素)의 아들인 양현감(楊玄感)이 모반을 일으킨다. 양편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자,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귀국하여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다.

 

5. 제5차전쟁(614년)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양제는 614년 다시 고구려를 공격한다. 비록 수양제가 고구려의 제1차방어선은 뚫었지만, 고구려의 계속적인 매복공격과 수나라군대의 공급선차단으로, 수양제는 요하를 차지하지 못했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상황을 파악한 후, 적극적으로 쌍방에 아무런 이득이 없이 장기간 계속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영양왕은 양현감의 반란후 고구려로 도망쳐온 곡사정(斛斯政)을 수양제에게 되돌려보낸다.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수양제는 국내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평양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철군한다.

 

6. 후속

 

수양제의 계속되는 고구려 정벌전쟁으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리하여 수나라 국내인민들은 수양제에 대하여 불만이 커진다. 수양제가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후, 수나라는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강도로 천도하지만, 이미 백성을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계속되는 정벌로 수나라의 국력이 급감했을 뿐아니라, 수양제는 민심도 잃었다. 그러다보니 수나라의 장수들도 속속 반란에 가담한다. 수나라의 수도 대흥은 이연이 점거한다. 618년,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 대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양제를 죽여버린다. 이연은 수나라황제를 폐위시킨다. 이로써 수왕조가 멸망한다.

 

그러나 수나라의 연속된 공격으로 고구려도 국력이 쇠약해진다.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공격하에, 고구려도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