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국의 노비근성은 어떻게 뿌리내렸는가?

중은우시 2009. 8. 1. 13:32

글: 사걸붕(史杰鵬)

 

공자는 일생동안 열국을 주유했고, 72군주에게 유세를 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시대요구에서 너무나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의 얼굴이 두껍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된다. 그 외에 다른 원인도 물론 있다.

 

그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 위령공(衛靈公)은 그를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위령공의 뜻에 어긋나는 말만 했다. 하루는 위령공이 공자에게 전쟁에 관하여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콩을 요리하는 일은 일찌기 들어본 적이 있지만, 군대에 관해서는 배워본 적이 없다" 그 뜻은 예의를 다스리는데는 내가 약간 알고 있지만, 전쟁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전국시대로 접어드는 때였다. 제후들은 모두 전쟁을 배우고 싶어했다. 공자와 같은 쓸모없는 인물을 두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위령공도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다음 날 공자와 얘기하는데, 기러기무리가 하늘을 날아갔다. 어느 순간 "인(人)"자를 이루고 어느 순간 "사(渣, 찌꺼기 쓰레기/인사는 인간쓰레기라는 뜻임)"자로 보였다. 위령공은 머리를 들어 기러기를 바라보니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 이후로는 공자를 무시했다.

 

공자가 보고는 위령공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에 얼굴이 온통 빨개져서는 바로 짐을 챙겨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제자가 그에게 말했다: "위후께서 매월 6만두의 급여를 주고, 대우를 장관급으로 해주는데, 왜 그냥 떠나려고 하십니까." 그 말의 뜻은 이처럼 높은 임급의 직위를 버리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공자가 말했다: "눈치를 주지 않는댜. 더 머무는게 무슨 재미가 있느냐. 나무가지위에 앉은 새들을 봐라. 우리가 가까이 가면 그들은 우리가 붙잡을까 겁을 내서 하늘로 모조리 날아오르지 않느냐. 하늘을 한참 빙빙 돌다가 비로소 다시 내려앉지 않느냐. 새도 눈치를 아는데, 사람이 어찌 새보다도 못할거냐." 그렇게 말하고는 사직하고 다른 나라로 유세를 떠나버렸다.

 

600여년후인 한성제때 손보(孫寶)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학에 조예가 깊어서, 어사대부(御史大夫, 지금의 부총리급에 해당)인 장충(張忠)의 눈에 들었다. 장충은 그를 자기 자식의 가정교사로 삼고자 했다. 손보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사직한다. 장충은 손보에게 남아있으라고 권하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를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지나지 않아서 손보를 "주부(主簿)"에 임명한다. 그 당시 주부는 그다지 체면나는 직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손보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주부의 숙사로 이사들어가서, 바로 부엌신에 제사도 지내고, 이웃들에게도 인사를 하러 다녔다. 마치 오랫동안 머물 자리를 구한 것처럼. 장충은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종을 보내어 그에게 물어본다: "이전에 어사대부가 자식의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했고, 대우도 괜찮고, 넓다란 살 곳도 주겠다고 했는데, 그 때는 맡지 않더니, 이제는 주부를 하라고 하고, 사는 곳도 7,8평방미터의 좁은 숙사인데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왜 앞뒤의 반응이 이렇게 많이 차이나는가?" 그 말 뜻에 숨은 것은 결국 정신이상자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손보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부라는 관직이 체면서는 자리는 아니어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사대부가 나를 주부로 임명하는데, 아무도 그에 대하여 반대를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사람들이 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나 혼자 내가 존귀하다고 우겨가지고야 존귀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괜찮다. 그런데, 스승이 되는 것은 다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도(道)"에 관련된다. 도라는 것은 존엄한 것이다. 원래 학생이 스승을 찾아서 학문을 구하는 것이지,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서 가르치는 도리는 없다. 그래서 조건이 아무리 좋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명언을 덧붙인다: "도는 굽힐 수 없다. 몸은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道不可, 身何傷)" 그 뜻은 스승제자관계는 '도'에 관한 것이므로 이것은 원칙이고 절대로 굽힐 수 없다. 이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좀 굽혀도 상관이 없다. 주부를 맡는것은 직위가 높든 낮든 관리가 되는 것이다.

 

시종이 돌아와서 손보의 이 말을 전했다. 장충은 아주 부끄러워했고, 즉시 글을 올려 손보를 황상에 추천했다. 그는 경전에 밝고 성품이 바르니 가까이 두고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황제는 바로 손보를 시랑으로 임명하고 다시 간대부, 익주자사로 임명했다. 관운이 트인 것이다.

 

다시 600여년이 흘렀다. 당태종이 명을 내려 과거를 통해서 선비를 뽑는다. 그는 시험생들이 줄에 꿰인 굴비처럼 시험장으로 몰려 들어오자 아주 기뻐서 말했다: "천하의 영웅이 일망타진되었구나" 모든 시험생들은 대전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답안을 작성했고, 그들은 요행히 급제해서 관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는 어떻게 글읽는 사람들이 한걸음 한걸음 존엄을 상실해갔는지를 보여준다. 공자는 눈치를 주자 바로 사임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제후에게 가서 유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보는 비록 주부의 직위를 부득이하게 받아들였지만, 스승제자관계의 원칙은 굳건히 지켰다. 도저히 안되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방관리를 지낼 수도 있었다; 당나라이후의 유생은 단지 과거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길은 모두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 시험장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머리위에 태양이 내리쬐고, 땀이 비오듯흐르는데도 대전아래 꿇어앉아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관자(管子)>>에 이런 말이 있다: "이익이 하나의 구멍에서 나오면, 그 나라는 무적이다" 사실 이 말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운명을 바꿀 출로가 하나밖에 없고, 그것을 황제가 손안에 꽉쥐고 있을 때, 그저 황제만이 무적이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존엄을 가질 수 없다. 선비는 그저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 노비근성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