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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남송(南宋)과 금(金)의 화폐전쟁

by 중은우시 2009. 6. 22.

글: 등신화(鄧新華)

 

<<화폐전쟁>>의 음모론 시각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남송시대에 이미 화폐전쟁이라는 이슈가 나타났다.

 

금나라도 남송과 마찬가지로 국영주전기관을 통하여 동전을 주조했다. 동전주조원가는 동전의 가치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즉, 왕왕 1문(文)짜리 동전을 만드는데, 3문(文)의 비용이 들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그리하여. 금나라도 송나라를 본떠서 지폐(紙幣)를 만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금나라는 민간에 동전을 보관하는 수량을 제한했다. 한 집안에서 2만관이상은 보관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1207년에는 민간에서 거래시 동전을 사용하는 것을 엄금한다. 상인들이 휴대하는 동전은 10관(貫)을 넘을 수 없도록 하였다. 1관이상의 거래는 반드시 지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1215년에는 동전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지폐와 백은(白銀)만은 사용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동전은 대거 송나라 국경내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이전에, 남송의 동전이 대거 금나라로 유출된 현상이 나타났었다. 당시, 남송과 금나라는 모두 동전의 외부유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상품이 대량으로 송나라에 매각된다. 예를 들면, 양식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금나라사람들은 동전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동전으로 지급하면 가격을 깍아주었다. 이렇게 하여 송나라의 동전이 대거 금나라로 흘러들어갔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금나라사람들은 남동의 동전가치를 비교적 높게 평가해주었다. 당시의 동전계산에는 한가지 용어가 있었는데, "단백(短陌)"이 그것이다. 그 뜻은 100문이 안되더라도 그것을 100문으로 계산해준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70문이면 1백으로 계산해주었다. 그런데 ,남송의 동전이 금나라로 들어오게 되면 어떤 때는 일,이십문을 백문으로 계산해주기도 하였다.

 

이것은 사실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그저 금나라사람들이 송나라동전에 대한 가치평가를 높게 하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마치 중국인들이 이전에 미화달러에 대한 평가를 높게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금나라사람들이 자국화폐를 저평가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중국인들이 인민폐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듯이. 그러나, 금나라사람들이 자국동전을 저평가한 것은 정부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저평가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시장에서 형성된 환율이 그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이 중앙은행에서 강제로 인민폐의 가치를 저평가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과 차이점이다.

 

어찌되었던 남송은 동전을 수출했고, 그것은 양식등 고귀한 상품으로 바꾸어 왔다. 이것은 손해보는 거래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이로운 무역이다. 다만, 남송의 관리들은 오늘날의 금융관리들과 마찬가지로, 대외무역에서 역조현상에 대하여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계심을 나타냈다. 송이종때 관리인 포회(包恢)는 대외무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장사를 할 때, 분명히 천관의 가치가 있는 것을 겨우 백관에 팔고, 백관의 가치가 있는 것을 십관에 판다. 포회가 보기에 이들 간사한 백성들은 조정이 동전의 외부유출을 방지하는 위대한 전략을 파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남송의 동전이 금나라로 외부유출되는데 대하여, 송나라의 관리들은 두려움을 나타냈다.

 

어떤 관리는 금나라의 '단백'에 대하여 그것이 송나라의 동전을 유인하는 책략이라고 보았다. 대신인 사호(史浩)는 금나라사람들이 이런 동전을 가져가도 쓸모가 없다. 그저 송나라에서 동전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나라는 동전을 많이 수장하여 '우리를 괴롭히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하던 논조이다. 당연히 이에 상응하여, 송나라는 동전의 외부유출을 금지하는 정책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했다.

 

오늘의 <<화폐전쟁>>은 일부 금융현상을 서방의 신비한 가족이 교묘하게 계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인들은 금융을 수백년간 해왔고, 여기저기 함정을 파놓았다. 중국인들이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늦게 시작한 중국인들이 현대금융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남송시기에 오랑캐국가인 금나라는 금융모략에서 어찌 총명한 한족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남송의 사대부들은 그대로 음모론을 가지고 동전의 외부유출을 접근했다. 이를 보면, 경제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들이대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인식방법이 결론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오랑캐민족도 심계가 깊은 금융음모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보자면 아주 분명한 일이다. 금나라정부는 금융전을 벌일 의도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남송의 동전이 유행하여, 금나라가 발행한 지폐의 가치가 하락했다. 이는 금나라정부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금나라정부는 계속하여 지폐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고민했다. 이를 위하여 동전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여, 금나라자신의 동전이 송나라로 유출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송시대에 누구든지 위와 같은 사대부들의 논조에 반박을 했다가는 바로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적을 아버지로 삼는다"라거나, "금나라의 돈을 받아먹고 금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주구"라거나, "금나라의 늑대같은 야심을 저평가한 것"이라거나, "이런 헛소리나 지껄이는 자는 필요없다"라거나....

 

화폐음모론 이외에도, 남송에는 또 하나의 음모론사건이 있었다.

 

송고종시대에, 금나라의 권력자 완안창(完顔昌, 撻懶)이 송나라와 금나라의 화의를 주재한다. 적극적으로 금나라가 지배하던 섬서, 하남의 땅을 송나라에 되돌려준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남송의 일부 대신은 두려움과 의구심을 나타냈다. 음모론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들은 말했다. 금나라가 어찌 그렇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토지를 공짜로 되돌려 주겠는가? 여기에는 분명히 거대한 음모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했다: 금나라는 이를 통하여 남송의 역량을 소모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지방의 토지를 반환해주면, 남송은 병력을 파견하여 지켜야 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려야 하므로 국력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나라의 각개격파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음모론 대합창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민족영웅 악비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들 항금파의 대신들은 매일 고토수복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금나라가 스스로 나서서 돌려주겠다는데, 왜 싫다는 것인가? 이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상대방이 돌려주겠다면 먼저 받고나서 생각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저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다. 남송의 신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스스로 반환하는 땅은 받지 않겠다. 우리가 싸워서 찾아오겠다.

 

그러나, 결국 화의는 성립되고, 송고종은 사람을 보내어 그 토지를 결국 접수한다.

 

실제로 완안창이 섬서, 하남의 땅을 되돌려준데는 개인적인 사심이 있었다. 첬째 그는 섬서, 하남의 땅은 다스리기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그는 이를 통하여 남송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남송이 그의 조치에 감격한다면, 그가 산동지역을 통치하는데는 적극 협력하리라고 믿었다. 당시 금나라는 여전히 부족통치의 유습이 남아 있었고, 귀족들은 저마다의 세력범위가 있었다. 완안창의 세력범위는 바로 산동지역이었던 것이다.

 

완안창의 이런 조치는 금나라의 많은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완안종한(完顔宗翰, 兀術)은 완안창이 남송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화의안을 집행하고, 합의된 토지를 반환한다. 당연히 그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중에 완안종한은 쿠데타를 일으켜, 완안창을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스스럼없이 돌려주었던 토지를 다시 빼앗아 온다. 남송의 신하들은 이에 대하여 눈만 멍하니 뜨고 어떻헤 해야할지 몰랐다. 아무도 더 이상 음모론을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전투를 통하여 이들 지방을 되빼앗아 오는 것은 그저 백일몽에 불과했다.

 

사서를 들춰보면, 오늘날 분청(憤靑)들이 나타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상들도 음모론을 즐겼던 것이다. 고금을 불문하고, 음모론은 흥분하기 좋아하는 무리들에게는 항상 유행했었다. 조상들과 비교하자면, 오늘의 음모론이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