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많은 사람들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소녀>>를 읽었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내가 보기에는 무슨 동화라기 보다는 사실 비교적 단순한 어른의 이야기이다. 성냥팔이소녀의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이런 이야기를 동화로 어린이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아마도 아이들의 동정심을 자극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어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른의 세계에도 양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그런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였다. 본문은 동화에 대하여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그마한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창작과 발표시간은 19세기중엽이다. 서방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영국인이 성냥을 발명한 때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냥은 당시의 유럽에서는 아주 새로운 물건이었다. 안데르센이 이러한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당시 유럽의 상당히 엉망인 사회현실을 빗대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성냥은 원래 유럽의 보통사람들에게는 아주 신선한 흡인력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성냥팔이소녀>>는 유럽에 있어서, 한 시대의 산물이고, 한 예술가의 성공이다. 왕왕 현실에 적응하면서 역사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필자가 어렸을 때 책을 읽을 때, 이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근대중국은 낙후되었는데,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방대한 중국에서 성냥조차도 자체생산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성냥은 근대중국에서는 "자래화(自來火)" 혹은 "양화(洋火)"라고 불리웠다. 지금도 중국의 어떤 지방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명칭을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력1827년, 영국인이 성냥을 발명했고, 성냥을 팔 때 마찰을 통하여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사피지(砂皮紙)를 함께 주었다. 수십년이 지나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그 후에 중국은 신속히 쇠락해갔다. 그리하여 결국은 알거지꼴이 되고 만다. 성냥조차도 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애매모호한 역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그리하여 중국은 원래부터 낙후하고 우매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1986년, 템플이라는 영국인이 나타나서 책을 하나 썼다. 그리고 중국은 "발명과 발견의 나라"라고 불렀다. 템플은 과학기술사학자이다. 그는 과학기술사의 각도에서, 중국의 고대인들이 세계적인 의미를 지니는 발명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기술했다. 템플은 이 책에서 성냥의 발명도 중국에서 비롯된다고 적었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전이고, 구체적으로는 서력577년이다. 그때는 중국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였고, 생활이 곤란했던 후비(后妃)가 성냥을 발명했다고 한다. 이 주장이 나타나자, 즉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첫째는, 중국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결론을 정설로 생각해버리고, 중국이 자고이래로 대단했던 나라라는 증거의 하나로 삼아버린다. 둘째는 중국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헛점을 찾아내려고 했다. 577년에 중국의 어느 후비가 발명했다는 성냥은 현대적인 의미의 성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지(點火) 못하고 그저 불이 붙을(引火) 뿐이다. 그러므로 성냥은 19세기에 영국인이 발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완고한 문화관념은 성냥발명이라는 이러한 자그마한 일마저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문화관념은 역사진보라는 명목하에 중국역사는 하나도 좋은 점이 없다고 치부한다. 정치, 문화, 경제, 과기등을 모두 포함해서. 현재의 서방과학기술의 발달을 보면서, 중국이 낙후한 원인의 하나를 중국의 전통문화에 생산과학기술의 토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관념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중국역사에서 갖가지 추악한 것들을 들춰내서, 이러한 관념을 기정사실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역사의 기록은 아주 풍부하고, 자료의 풍부하고 상세한 정도는 세계의 그 어느나라보다도 대단하다. 그래서, 매번 중국의 야만성, 낙후성이 증명되면, 어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자신이 절대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뭐가뭔지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중국은 일찌기 아주 선진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낙후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을 만드는 외국인들을 어떤 중국인들이 아주 귀찮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중국인들의 기존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만일 영국인인 템플의 주장이 성립된다면, 중국인들이 모두 과거 자신의 역사에 대한 인식, 관점과 정설을 뒤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반대로, "중국은 일관되게 암흑이었다"는 이론이 너무 심하다고 하여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반발을 해서, 상반된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즉시 보물을 얻은 것처럼 여기면서 깊이 연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들은 내 머리를 골치아프게 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외국인들이 오히려 우리의 역사의 긍정적인 면을 먼저 제기하는가. 그러므로, 중국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이든, 중국역사를 긍정하는 사람이든, 나는 그들이 모두 외국인들의 견해를 너무 중시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부정하는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이 중국이 좋지 않다고 말을 하기만 하면 그들을 도와서 한무더기의 증거를 찾아내준다. 그리하여 자신이 선진적인 외국인들과 같은 반열에 섰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역사를 긍정하는 어떤 중국인은, 외국인들이 중국이 좋다는 몇 마디 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성지(聖旨)나 상방보검(尙方寶劍, 황제로부터 하사받는 검, 일정한 직위이하의 인물에 대한 즉결처분권이 있음)을 얻은 것처럼 군다. 양자는 모두 득의만면하지만, 자신의 주관은 없다.
"성냥"문제로 돌아가보자. 영국인 템플이 성냥은 577년에 중국인이 먼저 발명했다고 말했는데, 그 근거는 이런 사료이다. 도종의(陶宗儀)가 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에서는 "역사서에 기록되기를 주건덕6년, 제나라의 후비중 가난한 자는 발촉(發燭)을 업으로 삼았다" 여기서 "주건덕6년"은 바로 남북조시대를 가리키고, 북조의 북주 건덕연간을 가리킨다. 그중 '발촉"이라는 단어때문에 영국인은 이를 "성냥"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사실상, 영국인 템플이 사용한 이 사료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남북철경록>>의 작자인 도종의는 14세기 원나라말기, 명나라초기때의 사람이다. 6세기 북조 북주의 역사시대와는 상당한 시간차이가 있다. 11세기에 도종의보다 300년 앞서, 북송의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선제 태건9년, 제나라 후비중 가난한 자들은 심지어 양초를 파는 것(賣燭)을 업으로 삼았다" 여기서 진선제는 바로 남북조시기에 남조의 진나라 황제이고, 구체적인 시간은 북제의 주나라 건덕연간과 일치한다. 두 기록은 문자로 보면 연호가 서로 다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자가 거의 같다. 일반적인 역사학의 법칙에 따른다면, 300년가량 앞선 <<자치통감>>이 더욱 신뢰할 만하다. 300년가량 늦은 <<남촌철경록>>은 아마도 <<자치통감>>에서 그 부분을 따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잘못 전해지는 결과가 초래된 것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자치통감>>에서 언급한 "매촉"이 맞는 것이지, <<남촌철경록>>의 "발촉"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인 템플은 중국사료에 대한 이해와 감정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냥은 중국인이 577년에 발명했다"는 명제는 기본적으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외국인의 입을 빌려 중국이 6세기에 성냥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인이다. 중국역사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성냥은 정말 영국인이 발명한 것인가? 아니다. 성냥은 확실히 중국인이 발명한 것이다. 단지 중국인이 성냥을 발명한 시간이, 템플이 얘기한 577년이 아니라, 북송이전의 오대(五代)말기일 뿐이다. 오대말기에 도곡(陶谷)이라는 사람이 책을 한권 썼는데, <<청이록(淸異錄)>>이다. 책이 만들어진 때는 개략 960-980년 사이이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밤에 급한 볼 일이 있을 때 등을 만드려면 느리다는 불편함이 있다. 지혜있는 자는 삼나무가지를 잘라서, 유황을 묻혀서, 곁에 두고 썼다. 일단 불과 만나면 바로 불꽃이 인다. 이를 '인광노(引光奴)'라고 불렀고, 오늘날 그 물건을 가진 자는 '화촌(火寸)'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을 중국인이 성냥을 발명한 근거로 삼는다면, 성냥의 발명은 10세기경이 된다. 이것은 말이 된다. 왜냐하면 10세기라면 이미 중국에서 화약기술이 성숙되었고,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약간만 머리를 굴린다면, 손쉽게 성냥을 발명할 수 있다. 굳이 900년이 지나서 영국인이 생각해내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청이록>>의 기록이 진정으로 마찰을 통하여 불을 일으키는 성냥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 기록에는 단지 불을 붙는다(引火)는 내용만 있지, 불을 일으킨다(發火)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그저 성냥의 원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사료에 따르면, 일찌기 남송 시대, 늦어도 원나라초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성냥이 이미 중국에 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성냥을 "발촉(發燭)"이라고 불렀다. <<무림구사(武林舊事)>>는 원나라때 남송의 도성 임안(지금의 항주)을 추억하는 책이다. 거기에는 '발촉'이 남송의 임안에서는 시장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상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촉"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시 한번 <<무림국사>>보다 약간 늦게 나온 <<남촌철경록>>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항주사람들은 소나무를 깎아서 작은 조각으로 만드는데, 얇기가 종이와 같다. 유황을 녹여서 나무조각의 꼭대기에 약간 바른다. 이름은 발촉이라고 하는데 쇄아(碎兒)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두 불을 일으키고(發火), 등촉을 대신하여 쓰인다" <<남촌철경록>>에서 이 구절은 도종의가 원나라때 사람이므로, 원나라초기의 항주사람들은 이미 "발화"하는 "발촉" 혹은 "쇄아"를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종의 이후, 명나라때의 기록에서도 '발촉'은 명나라때의 항주에서 여전히 흔한 상품이라고 나온다.
잠깐 "쇄아"라는 칭호에 대하여 살펴보자. 항주말을 아는 사람이면 알 수 있겠지만, "쇄아"의 발음은 "수아(燧兒, 부싯돌)"와 같다. 항주는 남송의 임안시대에 많은 북방사람들을 받아들여, 항주성내의 지방말은 확실히 '얼화(兒化)"한 특색을 보인다. "수"라는 글자는 고대에 원래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쓰였고, 나중에는 "취화(取火)"와 동일어로 쓰인다. 그러므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도종의의 기록에 나오는 '쇄아'라는 칭호는 바로 '수아'일 것이다. 기록자는 그저 그 음만 듣고 적다보니, 그 문자의 내력까지는 살피지 못한 것이고, 비교적 간단한 한자인 '쇄아'라고 적은 것일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성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기괴한 항주말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그냥 '발촉'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썼다.
"발촉"이라는 단어가 대중화한 것은 나관중의 소설에서도 증명된다. 나관중의 소설에서 "발촉"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도종의는 더욱 대중화된 "발촉"으로 성냥을 형용했다. 그리고 어떤 알수 없는 원인으로 "제나라의 후비중 가난한 자는 발촉(發燭)을 업으로 삼았다"고 적으면서, "매촉"을 "발촉"으로 잘못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영국인은 이 고립되고 의심스러운 사료를 근거로 서기577년에 중국인이 성냥을 발명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중국이 성냥을 발명한 구체적인 일자는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얘기하기 힘들다. 다만, 최소한 13세기에는 성냥이 이미 항주에서 상품으로 팔렸다고 보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시간은 서방역사상의 영국인이 성냥을 발명한 때보다 600년이 앞선다. 만일 <<청이록>>의 기록을 성냥으로 볼 수 있다면, 중국인이 성냥을 발명한 시기는 더욱 앞당겨진다. 13세기에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항주에 가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때 항주의 '발촉' 혹은 '쇄아'를 보았을 것이다.
"발촉"이라는 단어가 원나라때 이미 성냥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으므로, 어떤 사람은 중국의 역사서적에서 더 많은 기록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서한(西漢) 시대에 회남왕 유안이 방사가 만든 성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일 이 주장이 인정된다면, 중국이 성냥을 발명한 역사는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만, 나는 이러한 주장이 믿을만하다고 보지 않는다. 회남왕 유안의 이 기록은 송나라때의 고승(高承)이 쓴 <<사물기원>>에 나타난다. 그 내력을 분명하지 않다. 다른 방증도 없다. 그리고 고승은 "법촉(法燭)"이라는 단어를 썼고, "발촉"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내력이 불문명한 송나라때 기록을 가지고 서한때 이미 성냥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들이 성냥을 "양화"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한동안 생산을 하지 못하였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성냥이 불을 일으키는 원리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도종의가 기록한 "쇄아"는 상세하고 구체하게 발화원리를 적지는 않았고, 그저 '유황을 나무조각의 꼭대기에 약간 바른다'고 적었을 뿐이다. 유황은 물에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황을 용해아려면 다른 화학성분 혹은 접합제가 필요하다. 도종의는 여기서 명확히 적어놓지는 않았다. 이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성냥의 발화기술은 서양에서 비교적 크게 진보했다. 예를 들면, 황인 혹은 홍인을 추가하고, 공업조건이 이루어진 상황하에서는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원래 수공업에 의존해서 생산하던 성냥은 발화원리, 사용방법, 원가등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경쟁력을 잃었다. 성냥이라는 이 자그마한 일이 설명해주는 것은 중국인들이 멍청하지는 않고, 발명창조능력이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공업조건하에서 현대기술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공업기술이 서방에서 출현하여 중대한 역사적 진보를 이루는데, 중국인은 이 역사의 전환기에 충분히 기회를 붙잡지 못했다. 이것도 유감이다. 오늘의 중국인은 자신김이 있고, 이러한 유감을 보완할 능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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