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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은 왜 2000년올림픽개최신청에서 실패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5.

글: 적화(翟華)

 

북경시간으로 10월 3일 새벽,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제121차전체회의가 덴마트 코펜하겐에서 개최되었다. 2016년 하계올림픽개최도시로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가 3차투표끝에 선정되었다. 마드리드가 왜 패배했는지에 대하여 매체에서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것이다. 1993년 북경이 2000년올림픽개최도시선정에서 시드니에 패배했을 때도, 국내의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북경에 반대표를 던져서 북경이 졌다"고 생각했다.

 

올림픽조직위원회의 투표기록은 기밀이다. 그래서 북한이 북경에 반대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한걸음 양보하여, 이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1표를 던져주지 않아서 45:43으로 졌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북한의 그 1표때문에 북경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드니에 찬성한 45개국가는 모두 북경이 패배한데 기여한 것이고, 어느 한 나라가 북경의 패배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북경에 반대표를 던졌을까? 2008년 올림픽전날, 봉황TV는 전 중국체육총국 국장 우샤오주(伍紹祖)를 인터뷰했다. 우샤오주는 1993년 북경올림픽신청실패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소문은 좋은 것도 아니고 맞지도 않다. 심지어 누군가가 고의를 가지고 만들어낸 유언비어라고 할 수도 있다" "도대네 어느 나라가 중국에 표를 던지고, 어느 나라가 표를 던지지 않았는지, 귀국후에 분석을 해보았다. 그러나 모두 분석이다.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북한에 객관적으로 대해야 하고, 소문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일찌기 2006년 CCTV와의 인터뷰에서, 우샤오주는 이미 이 문제를 명확히 한 바 있다. 북한올림픽조직위원회 주석과 우샤오주는 잘 아는 사이이다. 사람됨이 올바르고, 전쟁시에는 김일성의 경호원이었다. 그리고 우샤오주와는 친구이다. 우샤오주는 말한다. 그때 개최도시선정투표전에, 북한노동당은 중국에 투표하기로 결의했다. 북한올림픽조직위원회의 주석은 사람이 아주 좋고 당성도 강하다. 조선노동당의 명령을 어기면서 중국에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전량(何振梁) 부인이 쓴 <<허진량>>이라는 책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북한위원인 김유순은 원래 이미 체육분야를 떠난 사람이다. 본국의 올림픽조직위원회주석을 더 이상 맡지 않고 북한의 루마니아대사로 나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올림픽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다만, 북경의 신청을 지원해주기 위하여 북한은 그를 모나코로 보내어 북경에 투표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북경의 2000년올림픽이 실패한 책임을 북한에 돌려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타이완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06년 5월 19일 봉황TV의 <<이오유화설>>에서 북경이 2000년올림픽신청에 실패한 일을 언급했다:

 

"서기2000년의 올림픽신청때, 투표결과는 45대 43이었다. 북경의 표는 45표반대, 43표 찬성이었다. 설사 1표를 가져오더라도 45대 44이다. 43이 44로 바뀌는 것이다. 즉 44표의 찬성과 44표의 반대라면 그때 IOC의장인 사마란치가 올림픽개최도시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마란치은 북경이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한데 동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마란치는 북경이 2000년올림픽을 개최하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투표해보니 45대 43이었다. 왜 1표를 가져오지 못했는가? 그 표는 타이완의 1표였다. 타이완은 1표를 중국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황색인종에게 투표하지 않고 오스트레일리아에 투표했다. 그래서 서기 2000년 북경올림픽은 실패한 것이다."

 

확실히 당시 타이완 국민당당국은 북경이 2000년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유보적이거나 심지어 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다만, 투표권은 리덩휘에게 있지 않았다. 중화타이페이의 IOC위원인 우징궈(吳經國)의 손에 있었다. 우징궈는 북경에 1표를 던졌는가 아닌가? 그는 2005년 10월에 출판된 <<올림픽중화정>>이라는 책에서 1993년 그 표를 어느 도시에 던졌는지를 토로했다:

 

"북경이 처음으로 올림픽을 신청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북경이 다시 2008년올림픽개최를 위한 신청에 들어감에 땨라 나의 당시 '1표의 수수께끼'도 다시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사실, 당시 투표가 끝난 후, 역사에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나는 특별히 표에 'BEIJING"이라고 쓴 글자를 기록해 두었다. 나중에 언젠가 나의 이 표의 향방에 관심이 있는 역사학자라면 이 표를 검증해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내가 손을 쓴 글자모양을 비교해보면 증명될 것이다. 나는 또한 출발전에, 부모가 무게있게 나에게 이렇게 말한 것도 기억한다: '이번 투표에서 너는 반드시 중국인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그들은 나에게 북경을 지지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 속의 기대는 내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외에 투표후 1달이 지나서 허전량 주석의 감사편지를 받았다. 나개 지지해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외에 내가 북경을 위하여 표를 끌어준 것에 더욱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1993년 북경은 도대체 왜 실패했을까? 허전량 선생은 북경TV의 <<신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이집트 대표는 노인이었다. 중국과는 관계가 좋았다. 병구를 이끌고 참가해서 투표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출발전에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불가리아 대표는 불가리아공산당서기의 사위였다. 역시 중국에 투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불가리아의 정국에 변화가 일어나서, 이 대표가 연루되고, 투표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신뢰성있는 견해는: 1993년 북경이 2000년올림픽신청에서 실패한 관건은 이집트, 불가리아 두 국가의 IOC위원이 투표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