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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중국의 경마(競馬)

by 중은우시 2009. 2. 4.

글: 오기(吳琪)

 

신비하고 조심스런 무한(武漢)의 경마

 

"자태가 당당한 써러브렛말들이 출발갑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경마장은 열기로 가득찼다. 말을 아는 사람이건 알지 못하는 사람이건, 이 순간에는 모두 피가 끓는다." 무한시 금은호(金銀湖)의 가에 만들어진 동방마성(東方馬城)에서는 홍콩모델을 그대로 복제한 "제6회 중국속도경마공개대회(시범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2008년 11월말에 개최된 이 경마축제는 원래 무한시가 연속 5회나 개최해왔던 경마축제의 연속이다. 그러나, "1등말맞추기 경품이벤트"와 사상유례없는 규모로 인하여, "1949년이래 중국대륙의 첫번째 상업적인 의미의 경마"라는 평을 들었다.

 

"무한시정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경마복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지만, 현재 정책이 금지하고 있는 선은 넘지 않으려 했다" 익명을 요구한 무한시정부의 관리가 한 말이다.

 

"1등말맞추기 경품이벤트"는 경마도박을 금지하는 정책하에서, 경마업계에서는 가장 민감한 이슈이다. 11월 29일과 30일의 경기에서, 국내 20개 대표단, 구락부의 기수가 모여들었고, 1100미터, 1000미터, 900미터, 1800미터의 4개조별로 4번의 시범적인 경기를 벌였다. 주최측은 총액 12만위안의 경품이벤트를 열었다. 1등말을 맞추는 관중은 최고 3만위안의 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관중이 상금을 받는 방법은 설계가 복잡다단하다. 관중은 무료입장권을 가지고 2장의 응모권을 받는다. 매 경주를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에, 마필자료소개와 마필의 상황을 보고 스스로 1등으로 들어올 것이 예상되는 마필을 선택한 후, 지정된 교환장소로 가서 자기가 선택한 마필에 대응하는 마권을 받는다. 만일 그 말이 1등으로 들어와서 맞춘 것이 되면 다시 20장의 "딩후과"즉석복권으로 바꾸어준다. 만일 즉석복권을 긁어서 당첨이 되면, 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한경마복권연구센터 주임이자 중국경마복권연구과제조의 수석전문가인 진존문(秦尊文)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관중은 무료로 입장한다. 즉 1인당 무료로 2장의 응모기회를 받는 것이다. 무료이므로 돈을 거는 것이 없다. 그러니, 무슨 도박이라고 할 것도 없다."

 

국가체육총국 부국장 왕균(王鈞)은 개막의 징을 울렸다. 국가체육총국 체육복권센터 부주임도 경마축제에 참석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매체에 무한의 상업경마축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사실상, 무한시의 경마복권을 시행하려는 호소와 노력은 요 몇년간 중단된 적이 없다. 진영외(秦英巍)는 2005년 무한시 민맹조사연구실 주임의 자격으로 무한시 정치협상회의에서 "경마산업체인의 규모와 범위를 늘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무한시는 경마복권에 대하여 무한에 주어진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진영외는 무한시가 이 제안을 아주 중시했고, 2006년, 무한시 정협위원회가 앞장서서 전국의 근 40여개 대도시의 정협위원들과 함께 연명으로 "경마복권의 금지해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 다른 측면으로, 홍콩이 지배주주인 동방신마실업유한공사가 만든 동방마성은 이미 2003년에 무한 금은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투자를 들인 화중지역의 유일한 국제적 기준의 경마장은 국가체육총국 중국마술협회(中國馬術協會, 중국승마협회)의 유일한 마술과 속도경주의 훈련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상적인 경기만으로는 원가를 회수하기 힘들다. 정부가 상업경마를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일부 외자는 대규모로 중국의 경마업에 진입하는 도박을 벌이고 있다.

 

2005년 6월 11일, 재정부는 경마복권에 대한 제안에 대하여 답변을 주었다. 진존문에 따르면, 답변의 전반부에서는 중국이 아직 경마복권을 발행할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경마복권에 대한 사전연구를 진행하는 것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이어서, 국가체육총국은 2005년 8월 무한에 "경주형경기플랫폼시범장소"를 설립하도록 허락했다. 경마복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드물었기 때문에, 호북성 사회과학원에서 지역경제연구를 하던 진존문은 명을 받아 중국경마복권연구과제조의 수석전문가가 되었다.

 

경마복권의 발행은 지방정부에 있어서, 전체 경마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진존문은 경마복권이 세계에서 최대의 복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전세계의 80여개 국가와 지역에서 발행하고 있고, "경마도박과 체육복권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으며, 경마도박의 마권구입금액, 시간과 리스크비율등은 모두 통제가능하다고 본다" 중국의 종마산업은 세계제일인 적이 있었다. 1977년에는 1144만필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재는 700만필로 축소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을 지닌 마필생산대국은 일본인데, 중국은 말 1필을 길러내는 비용이 일본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원가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진존문에 따르면, 경마산업은 종마, 양마, 매마(賣馬), 마구, 마술등 관련산업의 발전을 불러온다. 불법경마와 해외원정도박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 주목하는데 대하여 무한시정부는 침묵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2009년 1월 8일 오후, 무한시체육국은 경마복권판공실을 성립시켰고, 동방마성은 시정부에 경마업무를 보고했다. 작년 11월에 막 면모를 일신한 동방마성은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설비가 가장 선진적인 경마장이 되었다. 원래 경마축제후 시범경기를 더욱 자주 개최하면서, 경마해금시 각종 경기의 세부사항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경마복권판공실 책임자인 진욱동(陳旭東)이든, 동방신마집단 총재인 호월고(胡越高)이든, 모두 경마복권에 관한 매체의 인터뷰는 받지 말라고 시정부에서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진존문은 현재 중경, 사천, 남경등지에서도 모두 경마장을 만들고 있으며, 모든 것이 갖추어진 무한은 정책이 개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무한은 전국에서 1차로 경마복권을 시험하는 도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 시기는 1,2년내로 보고 있다.

 

"일단 무한에서 해금되면, 시행압력이 비교적 클 것이다. 왜냐하며 무한에 지속발전가능한 모델을 만들지 않는다면 국가정책은 5년 내지 10년내에 다시는 이 문을 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하여, 북경은 비록 전국에서 수량이 가장 많은 마술구락부를 지니고 있고, 최대의 써러브렛번식기지이지만, "경마복권과 같은 도박성이 있는 일을 우리나라의 정치중심에서 먼저 해금해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다.

 

민간경마구락부

 

"현재 우리가 얘기하는 말은 과거에 국가가 대규모로 발전시킨 마필과는 서로 다르다. 마필의 기능에 변화가 있는 것이다. 종류도 다르다." 58세의 왕기예(王冀豫)는 업계내에서는 "흑자(黑子)"로 불리우며, 직설적이고 호탕하다. 개혁개방후 그는 가장 먼저 '말'을 다룬 사람이다. 북경 해전구 봉황령의 도향호 마장에 마고(馬褲, 바지)와 마화(馬靴, 신발)을 신은 왕기예는 24명의 이사(理事)들과 22마리의 말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아끼는 9살반짜리 나이든 암말을 데리고 나왔다. 코와 코를 맞대고 말고 서로 냄새를 맡는다. "만일 말이 내쉬는 숨이 달콤하면, 그것은 말이 아주 건강하고, 식도나 폐가 모두 정상이라는 것이다." 왕기예는 말이 가장 귀엽고 예쁜 동물이라고 한다. "충성스럽고, 말이 없으며, 서로 다투지 않고, 자신을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겨울에 말을 타러 오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저 몇몇 장기회원만이 와서 말을 탈 뿐이다. 1985년에 성립된 도향호마장은 전국최초의 마장이다. 왕기예와 그의 친구들은 함께 경마의 20여년의 기복을 경험했다. 지금 마장은 주로 돈있고 시간있는 이사들과 회원들로 유지되고 있다. 그는 중국현재의 경마업을 "부추를 잘라내도 또 나오고, 닭의 목을 따도 다시 우는" 형국이라고 한다. 경마업이 막 고개를 들면, 정책은 칼을 한번 휘두르지만, 이 닭은 목숨을 잃지 않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울곤 한다는 것이다.

 

중국마업협회(中國馬業協會) 이사이며, 국제경마화학가협회 회원인 왕진산(王振山)은 일찌기 중국농업대학의 말전공 교수였다. 그의 기억속에, 1980년대는 중국양마업의 일대전환점이었다. 신중국성립후의 1980년대에, 국가는 대거 양마업을 권장했고, 이전에 소련등 국가에서 큰 돈을 들여서 종마를 도입했고, 중국 자체의 "삼하마(三河馬)", "통료마(通遼馬)"등의 개량품종을 만들어냈다. 전국에 100여개의 국영종마장이 있다. 이때의 마필은 군사전투와 농사용이었다. 1980년대이후 국가는 대거 농업기계화를 추진하면서 트랙터등이 신속히 말을 대체했다. 전쟁의 수요도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국영마장에 대한 재정보조금을 중단했다. 이것은 "감마정책(馬政策, 말의 목을 치다)"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국영마장은 대규모로 도산하였다. 왕기예에 따르면, "국마(國馬)"는 "민마(民馬)"로 너무나 급속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양마에서의 민영화는 뒤따르지 못함에 따라 전체산업이 졸지에 붕괴되어 버렸다.

 

선진국은 공업화과정을 가속화하면서, 역시 "감마"의 시기를 거쳤다. 다만 많은 국가는 순조롭게 마술운동 혹은 경마업으로 넘어가고, 시장메커니즘을 도입하여, 심지어 경마업의 경제에 대한 공헌은 단순한 양마업보다 훨씬 컸다. 중국에서 원래 적지 않은 농업대학에는 모두 말전공이 있었지만, "전국에서 말과 관련한 회의를 하게 되면, 손쉽게 백명이 넘는 연구자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양마업이 쇠퇴한 후, 그저 동북농대, 신강농대, 서부농림학원등 몇 개의 대학에만 말전공을 남겨두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없애버렸다.

 

동북농학원의 저명한 학자인 우문한(于文翰)은 일찌기 농업부 축목전문가소위 고문을 지냈다. 그는 적극적으로 중국에 경마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경마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등소평에게 호소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용어선택에서는 "마술운동"이라고 하여, 직접적으로 경마도박이라는 표현은 피했다. 당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던 이몽화(李夢華)의 답변은 "우리는 지지를 표시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중앙이 경마에 대하여 아무런 구체적인 조치를 내려주지는 않앗찌만, 이 간단한 의견표시는 이미 추진자들을 환호작약하게 만들었다.

 

1985년, 민간마장과 경마구락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북경도향호마장은 당시 해전구 소가타향당위서기인 정경생이 극력 추진한 것이다. 정경생은 마장을 가지고 관광업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하여 몇몇 창립인들은 사직하고, 분마경제관광개발공사를 만든다. 그리고 1무당 매년 8000위안의 임대료로 마장을 설립한다. 개시자금은 사회에서 14만위안을 모집하여 충당했다. 왕기예는 "마장은 몇몇 고관자제가 만든 것이다. 말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일반인들은 시도할 수조차 없다"

 

이때 신강, 동북, 내몽고등지에서도 마장이 여러개 나타난다. 왕기예등은 부대와 연락하여, 내몽고 시린보러 기병2사단을 찾아낸다. 그리고 1필당 250위안의 가격으로 20여필을 사오게 된다. 기본적으로 소련에서 도입한 카바킨과 아하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라면, 1986년 가을에 농업부는 막 삼하마(신규말품종을 인정받으려면 최소한 25년이 걸린다)를 인정했는데, 1987년에 삼하마장은 재정지원이 없어 도산한다. 국영마장이 쇠퇴하는 것과 비교하여, 북경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즐겼다. "그때 승마를 한바퀴 하는데 1위안이었다. 우리는 하루에 2000여위안을 벌었다. 아주 인기있었다."

 

개인마술구락부는 북경에서 대규모로 일어난다. 1992년 북경순의구 마파진의 농민기업가 정춘박은 8000만위안을 투자하여 상당한 규모를 지닌 향촌경마장을 만든다. 향촌경마장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다만 이익상황은 좋지가 않다. 1992년 왕기예등이 제1회 강희배경마축제를 제안한다. 업계내의 말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그는, "우리는 그때야 알게 되었다. 좋은 말이 없는 것이다." 1950년대에 중국은 소련에서 종마 수천필을 도입했는데, 품종은 써러브렛, 둔강, 카바진, 아아-제진, 소비에트마, 아르등, 오를로프등 품종이었다. 다만, 국영농장이 해산되면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말을 키웠고, "말의 족보등기"는 혼란스러워졌다.

 

경마정책의 관방최저한도

 

광주시 황포대도 668호에 위치한 광주경마장은 1990년대에 일찌기 잘나갔던 적이 있다. 전국의 첫번째 경마붐을 불러왔었다. 1993년 광주에서 경마를 시작했다. 개혁개방후 중국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허가를 받은 도박성의 경마장이었다.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후에 현지에서 170여일만에 만든 경마장으로, 광주의 한 부시장이 경마장 현장에서 일을 봤다. 당시 광주시정부 부비서장이던 황계환이 광주경마회의 책임자였고, "광주마왕(廣州馬王)"으로 불리웠다.

 

광주경마가 세운 기록은 입장객수가 2만여명에 달했고, 1일 마권발매금액이 1200여만위안에 달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농업대학 교수였던 왕진산은 그때 경주에 참가하는 말들이 비교적 여러 수준이었으므로, 등급을 나누어 경기를 했다고 한다. 경쟁력이 비슷한 말들끼리 하나의 조로 하여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재미를 주었다고 한다. 내몽고, 동북등지의 조교사들도 광주로 집중되었다. 아주 활발한 경마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광주경마회는 국가정책과 시종 맞지 않았다. 1999년, 국가는 광주경마회에 대하여 정식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책임자인 황계환은 수뢰죄와 공금유용죄로 유기징역 19년형을 받는다. 광주경마는 이로써 중단된다. 비록 광주경마회가 사회에 기부한 것만 3억위안이었지만, 재무가 혼란하고, 공금유용등의 문제가 있어, 6년간 6억위안의 손실을 입었다. "이것은 경마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놀라움이고 타격이었다. 창시적인 일이 개인적인 원인으로 다시 정부에 조사금지당할 구실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의 경마산업은 졸지에 분위기가 가라앉게 된다."

 

왕진산은 홍콩경마회는 아주 좋은 모델을 수립했다고 한다. 경마회는 이사회가 장악하고 있고, 이사회는 주석을 우두머리로 하여, 모두 12명의 홍콩에서 명망있는 이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이사들은 모두 무보수로 임직하고, 경마회에서 급여를 받아가지 않는다. 경마회는 홍콩에서 가장 큰 취업기관이다. 모두 4000여명의 직원과 2만여명의 겸직직원이 있다. 이는 홍콩에서 가장 고급의 클럽하우스의 하나이다. 회원은 존중받고,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반드시 회원의 추천을 받아야 하며, 경마회는 모두 200명의 고급회원이 있고, 매년 추천받는 회원수도 제한이 있다. 홍콩경마회는 홍콩최대의 자선기관이다. 기부금으로 홍콩과기대학, 홍콩해양공원등을 만들었다. 왕진산은 국외에서는 이미 백년이상의 전통을 지닌 경마도박의 경험이 있으므로, 중국은 체제에 있어서, 선진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기 좋고, 따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광주경마가 비록 홍콩경마의 많은 경기방식을 본받았지만, 유효한 관리와 감독매커니즘은 갖추지 못했다. 막 해금의 기미가 보이던 경마업에 철퇴를 맞은 꼴이 되었다. 경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쉽게 부패된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경마업은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

 

광주경마가 인기있던 시절에, 다른 지방에서도 경마는 좋은 시절을 보냈다. 현재 북경 천성조량국제마술구락부의 총교련을 맡고 있는 장가(張可)는 20년의 경마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기수들 중에서는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997년과 1998년이 북경경마에서 가장 붐이 일었던 때로 기억한다. 1998년 가을 순의의 한 경마에서는 관중이 수만명이 모였따. "말을 아는 사람도 있고, 그저 북적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온 사람도 있고, 직업적인 도박꾼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상금을 위하여,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하여, 어떤 사람은 말을 사고팔기 위하여, 시장은 아주 활발했다." 이때 경마장에서는 돈을 걸었고, 이런 시장분위기하에서, 국산마 1필의 가격은 1,2만위안에서 8만,10만위안까지 서로 달랐다.

 

1999년 국가는 경마도박을 엄격히 단속하기 시작한다. 그후 경마, 양마, 마구, 사료, 수의등 각종 업계가 모두 위축된다. 많은 사람들은 업종을 바꾼다. 산서, 내몽고, 동북등지에서는 말을 당나귀값으로 팔아치웠다. 마장은 말고기를 팔아서 겨우 연명했다. 이 해는 중국에서 국산마가 급속히 사라진 시기였다. 한 유럽상인은 아일랜드에서 데려온 숫말과 내몽고의 암말을 교배시켜 "반혈마"를 만들어 냈다. 국산마는 신속히 도태되고, 이 시기에 국산마는 족보가 흐트러진다. 누구도 말들의 족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중국말은 이미 더 이상 속도경주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고, 말의 품종이 대체된다" 제1차붐에서 야심을 품고 투자했던 상인들은 제1차투자를 막 완성하자마자 정책이 변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대홍응(大紅鷹)그룹은 일찌기 닝보시정부와 합작하여 경마장을 만들고자 했다. 광주경마가 시작될 때 투입해서 2001년에 완공했는데, 2002년에 바로 망했다. 장기간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지만, 단기간내에 망해버린 것이다.

 

2001년 북경통순경마장의 출현은 제2차경마붐을 불러왔다. 마카오경마회의 집행이사이며, 홍콩건항그룹 동사장인 정용빈(鄭榕彬)은 1997년 화준육마유한공사를 투자하였다. 원래 그는 육마(育馬)만을 계획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거 써러브렛을 도입하였다. "아무도 그처럼 비행기로 말을 도입하지 않았다. 비행기 1대에 99마리의 써러브렛말을 실었다."  이전에 중국에서 말을 구입하는 사람은 국외로 가서 말을 한, 두마리씩 매입했다. 경매를 통하거나 친구의 소개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마음에 드는 말을 사더라도 비행기로 운송하려면 외국에서 검역에만 1개월여가 걸리고,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45일이 걸렸다. 원가가 아주 많이 들었다. 화준이 대규모로 써러브렛을 도입하여, 북경에서 기르게 되자, 육마원가가 많이 낮추어지게 된다. 정용빈은 돈을 아끼지 않고, 국외의 기수, 수의전문가를 도입하고, 경마의 여러 단계의 선진설비를 갖춘다. 그러나, 중국의 경마시장은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중국은 세계 중국은 세계동물위생조직의 회원국이 아니어서, 마필의 출국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용빈이 수입한 수천필의 써러브렛은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저 국내에서 소화시켜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정용빈은 다시 돈을 투자하여 통순경마장을 만들고, 가신이 도입한 경주마들을 달리게 하였다.

 

통순경마장은 일시에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경마장으로 성장한다. 화준은 2000여필의 써러브렛을 보유하고 있고, 그중 500-600두의 말이 경주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런 실력은 단지 몇 두의 써러브렛을 보유하고 있거나, 잡종마를 보유하고 있는 개인구락부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2002년부터 통순경마장은 도박의 성격을 띄게 된다. 매주 하루 또는 이틀간의 경마에서 하루에 8경주를 편성하고, 북경텔레비전 채널6에서 생중계를 해주었다. 중국마업협회 이사, 국제경마화학가협회 회원인 왕진산은 2002년에 화준에 가입한다. 그리고 써러브렛의 흥분제검사업무를 맡는다. 그는 경마장의 뜨거웠던 분위기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 전국에서 통순만이 깃발을 들고 있었고, 전국에서 경마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많이 고무받았다."

 

그러나, 광주경마의 결말과 비슷하게, 2005년 공안부는 "지하불법도박"을 단속하는 활동을 벌이면서, 북경시공안국 통주분국은 통순경마장에 경기중단을 요청한다. "우리는 전문가로 하여금 리서치하게 한 후에 언제 다시 경주를 재개할 수 있을지 통보하겠다." 다만, 2005년 10월에 경주를 중단한 후, 통순경마장은 지금까지도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후에 수백두의 써러브렛은 안락사처리하였고, 이는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북경천성조량국제마술구락부의 총교련 장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을 잘 알지 못한다. 경마는 자연품종이 아니다. 이들 말은 경기를 위하여 길러진 것이다. 그들의 부모는 모두 빨리 달리던 말이다. 만일 그들을 달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들은 마굿간에서 온몸이 상처로 멍들 것이고, 몸과 마음이 모두 고통스러울 것이다. 전문가적인 각도에서 보자며, 기존의 경기가치를 잃었다면, 안락사시키는 것이 국제관례이다."

경마가 한동안 조용해진 후, 장가는 말과 관련된 사업이 최근 1,2년만에 다시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주 내몽고, 섬서등지의 탄광주들의 전화를 받는다. 말을 사겠다는 것이다. "나는 1마리에 35만유로라고 말해주었는데, 그들은 그럼 50마리만 달라고 했다" 돈있는 사람들이 말을 사는 것은 경주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르면서 즐기고, 친구들과 말경주를 하면서 놀겠다는 것이다" 장가와 같은 전문기수는, 1999년의 경마금지이후 마술운동으로 전업했다. "마술운동은 정책이 지지하고, 국가가 정식경기종목으로 정한 스포츠종목이므로 전망이 더욱 좋다"고 한다. 장가는 유럽에서 시합에 참가할 때, 유럽국가의 경마문화를 아주 흠모하고 있다. 총인구 1600여만인 네덜란드에는 300여만의 말이 있고, 100여만명이 프로경기에 참가한다. 20여명은 세계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실력이다. "중국은 막 시작했다. 내가 추진하는 업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타면 네 발로 달릴 수 있다. 한번 재미를 붙이면 피곤한 줄을 모르게 된다."

 

이번에 무한에서 시연한 상업경마는 다시 한번 경마인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장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먼저 경마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 도박꾼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말들을 죽어라 뛰게할 수는 없다. 도박을 위하여 경마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도박은 그저 경마산업의 아주 적은 일부분이다. 경마문화와 경마산업의 의미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 만일 경마를 하는 사람들이 경마정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경마에 참가하지 않겠다. 일부 개별적인 사람들의 불법행동으로 인하여 경마업이 망쳐져서는 안된다."

 

북경 도향호마장을 운영해오던 왕기예는 중미자금합작으로 새로운 경마장을 건립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정책의 문은 아마도 곧 열릴 것이라고 본다. 왕진산에 따르면, 민간의 경마풍조는 계속 열기가 높았다. 다만 중국의 경마산업은 정부가 추진하는 선순환매커니즘을 가져야 한다. 경마를 일본에서는 농수산성이 관리한다. 러시아에서도 농업부가 관리한다. 그저 공신력이 있는 조직이 추진해야만 경마도박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마정신은 일종의 공정하고 고아한 경기정신이다. 일단 정부에서 이 일을 잘 해낸다면 전체 경마산업은 중국에 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경제에 또 하나의 출로를 마련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