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란가(賀蘭佳)
두번에 걸친 결혼실패이후, 섭위평의 감정세계는 한때 진공상태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한 공개적인 행사에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섭위평의 세번째 부인인 난리아(蘭莉婭)이다. 그녀는 섭위평보다 23살이나 어리다. 섭위평은 8년전에 난리아와 결혼한 것은 "금덩어리를 주운 것"이라고 표현했고, 익살스럽게 이것은 "끝내기"라고도 얘기했따. 섭위평과 세 명의 부인들간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첫째, 공상명(孔祥明)
공상명은 일찌기 여러번 바둑대회에서 전국1위를 차지하였고, 일본의 프로9단 바둑기사를 물리친 바 있다. 그러나, 결혼후, 그녀는 점차 자신의 바둑사업을 포기했고, '내조'에 전념했다. 그녀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섭위평을 돌봐주었고, 남편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내조했다. 결혼후 3년째, 그들의 사이에는 아들이 출생한다. 세 식구의 가족이 섭위평에게 가져다준 것은 생활상의 안정뿐아니라, 정신적인 의지처였다. 그것은 섭위평이 밖에서 계속하여 성과를 거두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때 섭위평의 기력은 점차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혼인은 1990년에 변화가 나타난다. 섭위평이 호남TV의 행사에 참가하러 갔을 때, 가곡배우 왕정(王靜)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몇달만에 급격히 불이 붙는다. 섭위평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나와 공상명의 결혼은 이미 끝이 났다. 그러나 나는 왕정에 관하여 그녀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우리는 결혼10주년 기념행사를 했는데, 많은 명사를 불렀다. 이는 '고별파티'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참가했던 많은 친구들은 아직 진상을 몰랐다. 그날 왕정과 그녀의 오빠인 왕강(王剛)도 참석했다. 여자의 감각은 아주 뛰어나다. 당시 수백명이 있는 로비에서 나는 왕정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공상명은 나와 왕정의 관계를 눈치챘다.
나중에 왕정이 임신을 했고, 아이를 유산하려 하지 않았따. 섭위평은 어쩔 수 없이, 정식으로 공상명에게 이혼하자고 말한다. 섭이평은 말했다: "왕정과의 일에 있어서 나는 너무나 남자다웠고, 너무나 책임을 졌다. 왕정이 이미 임신을 했으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왕정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공상명과 이혼하고 왕정과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섭위평의 바둑에 공상명의 도움이 아주 컸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공상명이 작년 노예와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공상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 자신도 바둑에 대하여 많은 꿈이 있었다. 나는 그의 기력이 확실히 나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재능에 있어서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고, 더 큰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상명이 아들을 데리고 일본에서 생활할 때, 아들의 이름을 섭운총(聶雲聰)에서공영문(孔令文)으로 바꾼다. 그녀는 아들과 섭위평을 얘기할 때, 매전 아들은 바둑에 있어서는 부친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섭위평의 다른 면은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공상명은 재혼한 후, 작년에 상해의 바둑대회에서 섭위평과 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확실히 공상명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섭위평의 배신을 아직 용서하지 않은 것같다. 섭위평도 공상명을 선택한 것은 맞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 그가 잘못된 길을 갔다고 인정한 바 있다.
둘째, 왕정(王靜)
1991년, 섭위평은 공상명과 이혼한 후, 급방 왕정과 결혼절차를 밟는다. 3개월후에 섭위평의 둘째아들인 섭운청(聶雲靑)이 태어난다.
섭위평은 이렇게 회고한다. 호남TV에서 왕정과 알게 된 후, 북경에 돌아갈 때 기차로 바꿔타고, 그들은 한 침대칸에 탔다. 그러면서 관계가 급속히 발전했따. 헤어질 때 서로 전화번호를 남겼고, "다음날 왕정이 전화를 해서 우리는 함께 카라오케를 갔다. 우리는 거기서 술을 마셨고, 나는 내가 아무리 바보같다고 하더라도 뭔가 다른 점을 느꼈다. 내가 카라오케에 갔다는 것은 이미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섭위평은 말한다: "내가 그녀의 총정치부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아주 몰래 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갔다; 그녀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 때도 몰래 왔다. 종이로는 불을 감쌀 수 없는 법이다. 금방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따. 나에게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나에게 그만두라고 조언했따. 총정치부쪽에서도 상관이 그녀를 찾아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만일 그만두지 않는다면 신강으로 보내버리겠다고도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나는 당시에 왕정과 그다지 깊은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완전히 정신적인 곻허함으로 잠시 접촉한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자 나는 오히려 강해졌다. 비록 나의 선택이었지만, 나중에 내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당시에 나는 내가 책임감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아주 불쌍해졌을 것이다."
섭위평과 왕정의 결혼후 생활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섭위평은 말한다. "우리 둘은 전공이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사업적으로 서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공연을 하고, 나는 시합을 했따. 진정으로 감정을 교류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생활에 있어서도 나는 의존형이다. 그러나 왕정도 생활형은 아니었따. 우리는 각자의 전공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개성도 모두 강했다. 아무도 가족의 자격으로 나타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주 짜증났다. 사람이 짜증이 나면 시골의 어떤 곳을 가고 싶어진다. 가서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고 싶어진다.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다. 너무나 짜증났다."
2001년, 섭위평은 자신의 두번째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다. 왕정은 섭위평과의 사랑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호남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섭위평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와 함께 나가서 놀자고 했다(섭위평이 말한 것처럼 왕정이 그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결혼후, 섭위평은 바둑에 졌을 때 아주 짜증을 냈다. 그녀에게 화를 내곤 했다. 섭위평과 왕정 가운데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섭위평과 왕정은 연예계 혹은 유명인사들이 손쉽게 범하는 낭만이라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낭만이 남긴 것은 그들에게 10년간의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이었다.
셋째, 난리아(蘭莉婭)
2001년 4월, 섭위평은 상해로 가서 섭위평기패(棋牌)구락부의 정식 성립행사를 한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구락부의 고객담당부장인 난리아를 만난다. 비록 이미 두번이나 결혼에 실패했고, 당시 이미 50에 가까운 섭위평이지만, 아름답고 서글서글한 난리아에게 마음이 기울어진다. 그후에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펼친다. 두 달후, 두 사람은 연애관계로 발전한다. 같은 해 8월, 섭위평은 난리아와 난리아의 고향인 귀주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섭위평은 말한다. "나는 이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봐라. 우리는 나이가 20여세나 차이난다. 모든 측면에서 차이가 너무나 크다. 최소한 어떤 때는 세대차를 느낀다. 그러나 그래도 아주 잘 어울리고 함께 즐겁게 지낸다. 결혼절차를 진행할 때 나에게는 조그만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마치 금덩어리를 주운 듯하다"
현재의 부인에 대하여, 섭위평은 아주 만족한다. 그는 말한다 예쁠 뿐아니라, 난리아는 아주 생활을 잘하는 여인이다. 혀냊 미일 난리아는 북경의 집에서 그의 입맛에 맞는 아침을 준비한다. 그는 정시에 일어나서 식사를 한다.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술마시는 것도 절제한다. 심지어 옷입고 분장하는 것도 과거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섭위평은 말한다. "이번에는 저번과 확실히 다르다. 장애가 있었느냐고? 당연히 있었다. 그건 방법이 없다. 세속적인 압력은 항상 있다. 그녀와 함께하면 많은 공통언어가 있다. 나는 아무 일이 없으면 집에 머문다. 그녀와 함게 있는다. 예전에는 나가서 카드를 치거나, 접대를 하거나 했지만, 현재는 기본적으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핸드폰도 켜놓지 않는다."
말하는 와중에, 섭위평은 난리아라는 부인에 대하여 확실히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정말로 그가 말한 적처럼 이번이 "끝내기"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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