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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1944년 미국의 장개석 암살계획

by 중은우시 2008. 6. 2.

장개석 부부와 스틸웰 

 

글: 예방육(倪方六)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 송미령이라는 '미국통' 부인으로 인하여, 장개석이 주도한 중화민국정부와 미국정부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기밀해제되는 자료, 특히 미국인을 포함한 일부 관련자들의 일기를 보면, 소위 '양국우호관계'는 일시적인 정치적이용관계일 뿐이었는 것이 드러난다. 장개석이 말을 듣지 않아서, 미국인들은 중국의 군권을 빼앗으려는 야심을 갖게 되고, 1944년에는 비행기격추방식으로 장개석을 해치우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이 사건이 1970년대에 타이완에서 공개된 후, 대만섬에는 소란이 일었다. 대륙의 장개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비교적 복잡하므로, 일부 민국사 연구자들도 어떤 때는 이 '사건'을 잊어버리고, 대륙의 일반 민중은 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드물다.

 

2007년말, 장개석, 장경국의 유해를 대륙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다시 나타났을 때, 필자는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유유개(劉維開), 절강대학 중국근현대사 연구소 소장 진홍민(陳紅民),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생 박사지도교수 양천석(楊天石)등 세 사람의 민국사 전문가를만났다. 그중 양천석은 장개석연구의 전문가이고, 2006년 장개석의 일기가 미국 후버연구소에서 비밀해제된 후, 양천석은 미국으로 가서 이를 읽고, 연구했다. 인터뷰과정에서 양천석은 미국인들이 당시 장개석을 암살하려했던 구체적인 정황을 얘기해주었다.

 

미국인의 장개석암살계획에서 스틸웰(Joseph Warren Stilwell, 중국명 史迪威임)이 핵심 주모자중의 하나였다.

 

스틸웰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주중미국대사관의 무관(武官)을 지낸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버마-인도차이나전구미군사령관 겸 중국전구총사령관 장개석의 참모장을 지내며, 연합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에 맞서 버마로 진격한다. 1943년, 스틸웰은 동남아 연합군 최고부사령관을 맡고, 버마북부의 반격작전때 연합군을 지휘하여 버마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스틸웰은 중국공산당을 동정했고, 장개석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장개석은 미국정부에 스틸웰을 소환하도록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1944년 10월, 스틸웰은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에 의하여 본국으로 소환된다.

 

2008년 2월, 양천석은 홍콩에서 <<진실한 장개석을 찾아서 -- 장개석의 일기해독>>이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책에서는 장개석에 대한 대륙민중의 생각을 뒤바꿔놓을만한 사실들이 많이 공개되어 있다. 그 중에는 양천석이 인터뷰중에 밝힌 "스틸웰이 장개석을 암살하고 중국군권을 장악하고자 한 계획"의 내용이다.

 

양천석의 책에서 공개된 역사적 사실로 보면, 미국군부는 일찌감치 스틸웰에게 밀령을 내려,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군대를 지휘하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3년 11월 22일, 스틸웰은 장개석을 따라 중국, 미국, 영국의 삼국정부수반이 카이로에서 개최하는 국제회의에 참가한다('카이로회의'). 이 기간동안 스틸웰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자료를 준비하는데, 스틸웰의 자료에 따르면,"장개석이 어떻게 약속하든간에, 우리가 중국군대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면, 아무리 명문의 규정으로 두더라도 나중에는 휴지로 변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다만, 스틸웰과 루스벨트의 면담시에, 스틸웰을 이 자료를 내놓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12월 6일, 루스벨트는 스틸웰을 면담하는데, 루스벨트가 스틸웰에게 묻는다: "당신은 장개석이 얼마나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스틸웰은 "국면이 아주 엄중합니다. 일본인이 5월처럼 한번만 더 공격하면 그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좋다.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사람들을 찾아서 계속 해나가도록 하지."라고 하였다.

 

12월 12일, 스틸웰은 카이로에서 중경으로 되돌아온다. 오는 길에 곤명에서 그의 후하인 Frank Dorn(중국이름 多恩) 대령과 상의한다. Dorn이 공개한 일기에서 두 사람간에는 당시에 상당히 살기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만한 대화내용이 들어있다. Dorn의 회고에 따르면, 스틸웰은 카이로에서 루스벨트의 구두밀명을 받아 장개석을 암살하는 계획을 준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얘기가 끝난 후, Dorn은 3가지 장개석을 제거할 계획을 내놓는다. 각각 독살, 쿠데타, 비행기격추였다. 스틸웰은 세번째 방안을 선택한다. 스틸웰은 Dorn에게 적극 준비하고 있다가, 명이 떨어지면 집행하라고 해놓는다.

 

미국인이 장개석을 암살하려했다는 내용이 대만에 공개된 후, 대만의 민중과 국민당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높아졌다. Dorn은 당시에 비행기격추의 방식으로 장개석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만들었는데, 이름은 "Blue Whale 행동"이었다. 이 계획은 장개석이 비행기로 인도를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도중에 손을 쓰는 것이었다. 장개석의 전용기가 히말라야상공을 날아갈 때, 비행기가 돌연 고장을 일으키게 만든다. 이때 비행기를 탄 사람은 모두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데, 낙하산이 불량이어서, 장개석을 '비행기추락사고'로 숨지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계획은 세워졌지만, 실시되지는 못했다. 1944년 3월, 일본인이 "대륙교통선"을 열기 위한 "1호작전(예상계전투)"를 시작한다. 전쟁이 시급하였으므로, 장개석은 인도방문계획을 일시 중단하게 되며, 이에 따라 "Blue Whale 행동"은 무산되고 만다.

 

장개석의 명이 길어 위기를 벗어났지만, 스틸웰은 여전히 명확히 "중국문제의 해결책은 장개석을 제거하는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장개석과 하응흠(何應欽) 및 이들 무리의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국면이 변화한다. 미국인들은 그리하여 장개석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당시, 루스벨트는 소련의 극동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만일 장개석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친미적인 중국을 잃는 것이며, 소련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통령특사인 Hurley가 중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극력 장개석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는 장개석이 집권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이나 다른 사람이 집권하는 것보다 미국의 이익에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그제서야 장개석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고, 장개석은 이때부터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계획해온 암살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볼 때, 장개석을 없애기로 한 때로부터 장개석을 보호하기로 한 때까지, 그리고 1949년이후 미국과 대만의 새로운 전략동맹체결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은 시종 미국의 이익에 손해인지 이익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였다.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였지, 중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느냐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