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상전명월광, 의시지상상(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
여러해전에 이 싯구에 나오는 "상(床)"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 상(床)이 우물의 난간이고, 잠자는 침상이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또 어떤 사람은 이 "상"이 절첩등(折疊凳, 접이식 의자)이라고 주장했다. 후자의 주장은 마미도(馬未都) 선생이 <<백가강단>>에서 가구수장을 얘기하면서 널리 전해진 것이다. 마미도 선생은 북방말로 이 "상"은 바로 "마찰(馬扎)"이라고 했다. 어떻든 이 '상'은 잠을 자는 침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마미도 선생의 널리 알려진 이 견해가 맞다. 마미도 선생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백의 "정야사(靜夜思)"의 두 싯구는 중국역사상 거대하고 완만한 변화를 반영한다. 중국인은 예전에는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席地而坐). 현재는 의자위에 앉는다. 즉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는다(垂腿而坐). 현재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는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언제 생겨난 것일까? 마미도 선생은 고대가구의 양식변화를 살펴서 이렇게 지적했다. 당나라때, '등자' '의자'와 같은 류가 중국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송나라때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다. 이 견해는 대체로 정확하다. 그 원인은 당나라때 서역과 교류가 이루어진 후, 외국과의 교류에서 새로운 물건들이 많이 중국에 유입되었는데, 거기에는 등자, 의자, 그리고 많은 외국인들이 포함된다. 이리하여 중국인들에게 수천년에 이르는 습관을 점점 바꾸게 만든다.
다만, 왜 이러한 변화가 중국에서 발생한 것일까? 만일 비교연구하지 않으면, 필자의 이 문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다. 비교하기 위하여, 중국의 두 이웃나라인 한국과 일본을 보자. 일본과 한국은 원래 중국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를 궤좌(跪坐)라고 한다. 두 나라는 지금까지도 궤좌의 전통과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원인에서 중국에서는 '좌식'의 변화가 온 것일까? 일본과 한국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오지 않았는데...우리는 알고 있다. 성당시기에, 일본은 중국에 많은 '견당사'를 파견했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배워갔다는 것을. 일본에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고대의 헤이안시대에 일본인들은 이미 의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일본의 헤이안시대는 중국의 당나라중기에서 남송중기에 해당한다(794-1192). 그러므로, 일본 견당사들은 확실히 중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등자, 의자를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그러나, 두 곳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인은 나중에 철저히 '좌식'을 바꿔버린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바꾸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과의 이런 비교가 없다면, 우리는 중국의 변화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것은 역사현상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만일 일본, 한국과 비교해보면, 같은 유행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데 서로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미도 선생을 포함한 여러 전문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의견을 거의 내놓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래서 시도해보고자 한다. 당연히 이것은 본인의 추측일 뿐이다.
등자, 의자는 대체로 당나라때 중국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인의 "좌식" 습관을 바꾼 것은 비교적 기나긴 과정이 필요했다. 등자, 의자가 막 당나라에 나타났을 때는, 그저 어른, 노인, 병자, 장애인 및 특수한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구였다. 당시의 정식 장면에는 여전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것에도 변화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중국인은 궤좌, 즉 꿇어앉았다. 그러나, 당나라이후 오대시기에 궤좌는 이미 바뀌었다. 오대시기의 유명한 그림에 <<한희재야연도>>가 있다. 여기를 보면, 그때 사람들은 양반다리(盤腿坐)가 위주이다. 양반다리의 유행은 아마도 등자, 의자가 나타난 이후일 것이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것이 여전히 정종이고, 양자가 결합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대시기에서 북송초기까지 궤좌와 양반다리의 습관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특히 정식 경우에 여전히 '앉는 방식'이었다. 황제가 출행하는 의장을 보면, 북송말기에 의자는 이미 필수품이 된다. 남송중기의 시인 육유(陸遊)는 일찌기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서돈립이 말했다. 옛날에 사대부가의 부녀가 의자, 올자(兀子)에 앉으면, 사람들이 모두 법도가 없다고 비웃었다" 이 기술을 보면, 북송말기의 남자들에게 의자에 앉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었고, 여자들이 의자에 앉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육유가 살았던 남송중기에는 이미 여자들이 의자에 앉아도 정상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것에서 양반다리로 바뀐 변화의 시기는 바로 북송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어떤 중요한 원인으로 등자, 의자가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왕안석의 변법때문이라고 본다. 왕안석의 변법내용은 아주 많은데, 왕안석의 변법중에서 사람들이 그다지 주의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보마법(保馬法)'이다. 북송은 자주 북방민족과 전쟁을 해야 했다. 말은 중요한 전쟁물자이다. 처음에 전투마는 관청에서 통일적으로 길렀는데, 효과가 좋지 못했다. 왕안석은 변법때, 전쟁준비를 충분히 하기 위하여, '보마법'을 실행한다. 소위 '보마법'은 간단히 말하자면, 백성들이 말을 기르고, 매 집안당 몇 필씩을 기른다. 그리고 정부가 구매해서 사용하며, 면세등 조치를 취한다. 왕안석이 물러난 후, 당시의 개봉부에 백성들이 기르는 말이 6천필에 달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보마법'이 마필을 중원의 백성들 생활 속으로 보급시킨 계기로 본다. 그리하여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는 것이 바뀌는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만일, 우리가 다시 일본을 보면, 이 변화가 일본에서 발생하지 않은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일찌감치 몽고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근대에 일본이 '서양마'를 도입하기 전까지, 일본의 본토말은 대부분 키가 작은 말이었다. 짐을 지는 능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일본의 지리적 원인으로, 마필은 일본 본토에서 전쟁할 때 그다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을 기르는 것은 당시에 일본에서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일본의 마필에 대한 열정은 기본적으로 메이지유신이후이다. 서양마를 도입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안석변법에 있는 '보마법'이 당시 중원지구의 백성들에게 말을 기르도록 보급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는 것을 유행시킨 중요한 원인이다. 왜냐하면 말을 탄다는 것은 바로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한국등지에서는 말을 기르는 것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광범위하게 전통적인 '좌식'을 바꾸지 않았다.
다만, 이런 추측에는 반드시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일찌기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무령왕은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제창했다. 한무제시기에는 흉노와의 전쟁을 위하여, 필이 한나라정부로부터 중시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좌식'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굳이 송나라에 이르러서야 변화가 발생하였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조나라 무령왕시기에는 북방부분의 말을 기를 수 있는 지역이 한족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조나라에 있어서, 말을 기르는 것은 주로 북방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의 접경지역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다. 동시에 대량의 말을 유목민족으로부터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말을 기르는 것이 중원지역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한무제시기에, 말을 사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 말을 기르는 것은 정부의 군사정책이었고,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시키지는 않았다. 한나라의 강역은 송나라보다 넓어서, 한나라때 정부에서 말을 기르는 지역도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북방의 말을 기르기 적합한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하는 것도 제약이 많았다. 송나라정부는 부득이 중원지역에서 말을 기르게 된다. 효율이 높지는 않았지만, 부득이하게 중원의 백성들에게 말을 기르게 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이후에 서양말을 도입하고, 말에 열정을 가진다. 그렇지만 역시 백성들에게 보급하거나 말을 기르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중적으로 상업적으로 말을 길렀다. 그러다보니 일본인들의 궤좌의 습관을 철저히 바꾸지는 않았고, 그저 궤좌와 의자를 동시에 유행시킬 뿐이었다.
이 추측성의 설명에는 또 다른 문제도 안고 있다. 말을 기르는 것이 중원지역에 널리 보급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 있다. 그 특수한 현상은 바로 한족 중원여성의 전족이었다. 수당 오대시기에 중원의 여성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전족의 유행에 관하여, 이전의 통상적인 견해는 전족은 송나라 이학(理學)의 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학자들은 전족을 주장하지 않았다. 전족은 북송때 유행하는데, 이학은 그저 별볼 일없는 자그마한 유파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전족의 유행과 이학은 관계가 없다고 본다. 아마도 북송시기의 마필이 중원에 보급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송나라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전족은 전족은 발을 묶어서 길게 만드는 것이었다(纖直). 후세와 같이 구부리는 것이 아니었다(弓彎). 송나라때 전족의 명칭은 바로 "쾌상마(快上馬)"였다. 그것은 나중의 기형적인 전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전족은 북송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부녀들에게 말타는 것을 유행시켰다. 아마도 교외로 놀러나가기 위하여, 말타는데 익숙하지 않은 한족여성을 말등에서 안정적으로 앉아있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특수한 신발을 고안했던 것같다. 당시에는 "착도저(錯到底)"라고 했다. 이런 신발은 마치 오늘날의 하이힐과 비슷하다. 머리쪽은 비교적 날카롭고, 부녀가 발을 등자에 넣기 편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발을 감싸는 방법이 나타나는데, 오늘 날의 붕대감는 것과 비슷하다. 그 목적은 부녀자들이 말에 타서 등자를 밟을 때, 발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중에 이런 중원부녀들의 유행습관은 남송시기에 남방으로 전해진다. 말을 타지 않는 남방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몰랐고, 그냥 이 습관이 나중의 전족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추측은 아직 증명되지는 않았다. 사료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하여 증거를 더 많이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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