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북경아 북경. 북쪽에는 장성(長城), 동쪽에는 운하(運河). 이는 두 개의 역사를 개괄하는 글자없는 기념비이다. 남쪽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이는 다른 도시와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북경의 지리적인 특징이다. 필자의 생각 속에서 운하는 모성(母性)이고, 평원은 부성(父性)이다. 북부중국의 이마를 꼬불꼬불하게 이어간 장성은 풍화된 주름살처럼 병풍같은 산들의 아들로서, 영원한 동정인 남아의 혈성을 뿌리고 있다. 장성에 바친 헌시는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유독 노신은 20세기초에 다른 평가를 내렸었다: "일찌기 많은 사람을 노동력과 생명을 헛되이 앗아간 것일 뿐이다. 오랑캐를 막아내지도 못했다. 현재는 그저 유적일 뿐이다. 다만 일시적으로는 완전히 없애지 않거나 혹은 보존해야 할 것이다. 내 느낌은 주위가 장성에 둘러싸인 것같다. 이 장성의 구성재료는 오래된 옛날 벽돌과 새로 추가한 새 벽돌이다. 두 물건이 하나로 합쳐져서 성벽을 이루었고,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장성에 새로운 벽돌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게 될 것인가? 이 위대하고 저주서러운 장성!" 장성의 실용가치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가 장성이 현재의 평화로운 시대에 심미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북경에 와 본 사람이라면, 장성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장성은 북경의 가장 유명한 이웃이다. 그것은 심지어 이 도시보다도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여전히 장성을 보수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이것은 전란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장성은 일찌기 우리를 보호했었다. 현재는 우리가 장성을 보호해야 할 때이다. 그의 전타(箭垛), 계단, 봉화대등은 어떻게 세월과 함께 삭아가는지, 거의 몇년마다 한번씩은 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 속에서 오래된 중국은 치통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장성에 새로운 벽돌을 추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일 세계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은 새로 분칠한 장성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것은 중국의 수천년문명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이다. 들쑥날쑥한 장성의 모든 성벽위에는 몇 세대의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을까? 혹은 중국의 과거가 농축되어 있을까? 이 각도에서 보자면, 장성은 이미 신격화되었다. 전체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역사의 숭배와 신앙을 상징한다. 도대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장성이 무너지는 날, 또 누구의 손으로 지도에서 이것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장성은 중국의 제1호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지고무상의 존중과 보호를 받고 있다. 마치 우리 주위에 살아있으면서도 민족의 기억속에서 살아있는 침묵의 노인처럼. 장성의 영향은 시공을 초월한다. 아마도 모든 중국인들이라면 모두 노신처럼, "주위가 항상 장성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안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제약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전통일까? 장성의 발자락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전통의 영향하에서 순종하거나 반역한다는 것이다. 방황하거나 고함친다는 것이다. 바로 한 세대 한 세대 중국인들의 운명이다.
북경은 장성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그리고 전통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은 도시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몇 왕조의 수도였었다. 장성의 발자락아래에 서있지만, 그것은 전통문화의 맹목적인 추종자는 아니라, 그 자신의 사고와 판단도 지니고 있다. 전통에 대하여 소화하거나 혹은 반발한다. 그리하여 북경은 역대왕조에서 정치적 분위기가 가장 농후한 곳이다. 사상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개성적인 도시이다. 특히 근대이래에 이러한 성격은 더욱 강했었다. 예를 들면, 노신은 장성의 그 저주에 대하여, 바로 '5.4'신문화운동이후에 썼다. 그는 한마디로 장성을 보수, 폐쇄, 낙후된 전통문화의 상징물로 비판했다. 실제로 장성 자체는 무고하다. 노신은 채시구의 소흥회관에서 "눌함(吶喊)"이라는 글을 썼다. 이로서, 은인자중하고 침묵하는 장성의 발아래에서 마침내 반역의식이 충만한 눌함분자가 탄생한 것이다. 눌함의 소리는 북경성위에 울려 퍼졌다. 역사는 이를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 노신이 첫번째로 소리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로 소리친 사람이거나 반역자인 것은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수천년간 쌓여온 전통의 건설자들은 위대하다. 그러나 파괴자들도 마찬가지로 용기가 충만한 사람들이다. 마치 장성의 칼바람이는 이야기는 지키려는 자들과 진공하려는 자들이 함께 써온 것이다. 혹자는 그들이 공동으로 역사를 창조했다고 한다. 나는 외국역사학자의 <<나일강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당시에 생각했었다. 당연히 <<장성이야기>>도 있어야 한다고. 그것은 중국의 길고 긴 봉건시대의 시작과 끝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성은 명실상무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마도 이 <<장성이야기>> 자체는 무자천서(無字天書)의 형태로 존재하여 북부중국의 책상위에 놓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강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성이 중국민족의 역사에 가로놓인 응고된 강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바로 내가 북경에 도착한 후에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장성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나타낸다. 여러해전에 유행한 티비드라마 <<곽원갑>>의 주제가는 "만리장성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천리 황하는 물이 도도히 흐른다..."로 시작했다. 장성과 황하를 중국인의 정신적인 지주로 비유했다. 황하는 민족의 요람이다. 조물주가 그의 자손들에게 준 하나의 선물이다. 장성은 중국인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이다. 혹은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혹은 사람의 뜻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지금 사람들이 장성을 보수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를 보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성이 영원불멸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다. 노신이 암흑의 세기에 항의하기 위하여 격렬한 주장을 펼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신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성의 의미는 그 최초의 건설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특히 쇄국의 봉건시대가 끝난 후, 방어기능은 일찌감치 퇴화했다. 장성은 기록된 승리와 실패가 모두 이미 역사로 되었다. 그것의 현대사회에서의 최대의 가치는 바로 멀리를 내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장성은 중화민족역사의 오래된 증인이다. 침묵의 증인이다. 그것의 존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장성과 비교하자면, 운하는 훨씬 적막하다. 북경의 동쪽 교외인 통주는 일찌감치 유명한 경항대운하의 시작점이었다(금나라때 판 조백하의 하류는 원, 명의 두 기간동안의 준설을 거쳐 항주까지 연결되었다). 조백하의 강물이 끊기고, 항운이 중단되면서, 북운하는 배수강물이 되었다. 주로 농지에 관개하는 용으로 쓰였다. 봉건시대를 꿰뚫는 천년 조운사(漕運史)에 옛날의 휘황은 이미 암담한 마침표로 바뀌었다. 북운하 유적지는 통주성내에 현존하는 문화유적지의 하나이다. 내가 북경에 온 후, 일부러 차를 몰고 조양문을 나서서 찾아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고운하는 이미 물이 고여 있었고, 속에는 빈깡통, 폐지, 썩은 나무와 채소잎이 가득 차 있었고, 가볍게 움직이는 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더구나 낭만적인 노젓는 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따. 북운하는 이미 죽었다. 온유한 부귀의 꿈을 꾼 후에 그것은 호흡을 멈췄다. 아마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옛날에 수천 수백의 배들이 경쟁하듯 운행하던 번화한 장면을. 심지어 석양하에 나처럼 이곳을 찾는 이도 드물었다. 마치 이러한 광경을 한번 볼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나, 원, 명, 청 심지어 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운하의 물길이 남북교통과 운수에 얼마나 중요했던가, 당시 통주가 북경성의 양식창고였고, 거의 매일 양식, 비단 그리고 다른 화물을 실은 배들이 들어오고, 부두에 이를 쌓아놓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사라졌다. 이제는 마치 원시의 꿈속처럼 느껴진다.
북운하유적지는 이미 볼 거리가 없는 유적지가 되었다. 관광객 하나 없는 유적지가 되었다. 이것을 만회하기는 힘들다. 이로써 볼 때 운하는 장성처럼 행운적이지 못했다. 비록 마찬가지로 역사의 증인이지만, 하나는 전쟁의 산물이고, 하나는 평화의 화신이다. 운하의 번화는 일찌기 충실하게 하나 또 하나의 태평성세를 기록했다. 당연히 운하의 부유, 자유, 충만의 꿈은 장성의 보호하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전쟁과 평화의 관계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역사이다. 그래서 나의 기억중에 장성과 운하는 상호 보완적이다. 장성이 무너지지 않으면, 운하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일찌기 길고긴 봉건시대의 가장 중요한 명맥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추억하는데 침묵의 증언을 제공한다. 북경아 북경. 북쪽에는 장성(長城), 동쪽에는 운하(運河). 이는 두 개의 역사를 개괄하는 글자없는 기념비이다. 이때, 나의 두 손은 그들을 만진다. 그들의 파도흔적과도 같은 무늬 혹은 무늬같은 파도흔적을 만진다. 돌맹이는 차다. 물도 차다. 그러나 나는 시공을 넘어 오래된 중국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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