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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중국성격(中國性格)은 무엇인가?

by 중은우시 2009. 4. 19.

글: 호두(虎頭)

 

중국성격이 무엇이냐고?

사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중국이냐는 것이다.

무엇이 중국인가?

중국은 시서예역(詩書禮易, 시경 서경 예서 주역), 당시송사(唐詩宋詞), 진황한무(秦皇漢武, 진시황과 한무제), 창힐현장(蒼玄奬), 해현관운장(解縣關雲長), 상산조자룡(常山趙子龍)이다.

그러나, 중국은 또한 하걸은주(夏桀殷紂, 하나라 걸왕와 은나라 주왕), 조고진회(趙高秦檜), 혹리내준신(酷吏來俊臣), 엄당위충현(黨魏忠賢),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이임보(李林甫),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진시황(秦始皇), 그리고 사람의 간을 먹었던 조사관(趙思), 사천을 도살했던 장헌충(張獻忠), 일으켜세울래야 되지 않는 유아두(劉阿斗), 탐욕이 끝이 없던 청나라 화신(和), 말갈아타기의 삐에로 원세개(袁世凱), 호두사미(虎頭蛇尾)의 왕정위(汪精衛)이기도 하다.

 

무엇이 중국인가?

인류문명의 기원을 대표하는 것은 사대고대문명이다.

중국은 유일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고대문명이다.

유프라테스-티그리스유역의 고대 바빌론은 기원전3000년에 나라를 세웠고, 인류에게 함무라비법전, 설형문자와 세계7대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남겼고, 문명역사는 2000여년간 지속되었다.

나일강가에서 탄생한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32세기에 나라를 세웠고, 31개왕조를 거쳤으며, 문명사는 2500여년에 걸친다. 영토는 이집트, 수단, 알제리, 이스라엘, 예루살렘, 터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에 걸쳤고, 인류에게 상형문자, 피라미드, 기하학과 역법을 남겼다. 고대이집트문명이 없었더나면, 나중의 고대 그리스로마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갠지즈강유역에서 탄생한 고대 인도는 기원전 2000년에 나라를 세웠고, 영토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부탄, 네팔과 아프가니스탄에 걸친다. 인류에게는 사시(史詩) Mahabhrata(摩訶婆國多)와 Ramayana(羅摩衍那), 그리고 위대한 불교를 남겼다. 이외에 아라비아숫자의 기원도 고대인도이고, 아랍을 통하여 서방에 전해졌을 뿐이다. 문명사는 1500년에 걸친다.

그러므로, 고대인도는 인도가 아니다. 고대 이집트는 이집트가 아니다. 고대 바빌론은 아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고대문명은 이미 멸망했다. 고대 바빌론은 기원전 729년 앗시리아제국에 멸망한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에 멸망당한다. 고대인도는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그들이 멸망한 것은 이미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 넘는다. 그래서 역사서에서 그들의 앞에 '고대'라는 말을 덧붙여놓는 것이다.

중국문명은 기원전 2800년에 황하유역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서에서 "고대중국문명"이라는 말은 없다. 지금까지 계속하여 "중국문명"으로 불리워왔다.

나의 주제는 이것이다: 왜 중국문명은 단절되지 않았는가?

 

중화제국의 영토가 넓기 때문은 아니다.

세계사상 영토가 더욱 넓은 제국은 수두룩하다. 예를 들면, 고대로마제국이 있다. 이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대륙에 걸친 방대한 제국이었고 기원전9세기에 시작된다. 전성기때의 영토는 이탈리아, 바티칸, 산마리노, 안도라, 말타, 사이프러스, 그리스,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니그로,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리히텐시타인,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모나코,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루마니아, 영국 및 네덜란드,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터키, 요르단,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및 모로코의 일부분이 포함된다.

그러나, 2천여년후인 1453년, 오스만제국의 철기가 독수리처럼 고대로마의 지평선에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와 고대유대문명을 무너뜨렸던 방대한 제국은 무너지고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중화재국의 군대가 특별히 용맹해서도 아니다.

세계역사상, 더욱 용맹한 군대는 수두룩하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대왕의 군대가 있다. 마케도니아의 왕자인 알렉산더대왕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나이가 겨우 스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가 가는 곳은 적수가 없었다.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쓰러졌다.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와 고대인도등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그의 말발굽아래에 죽어갔다. 알렉산더대왕이 세계를 정복하던 11년간 패전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만들었는데, 판도내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사이프러스, 터키,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과 인도의 일부분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제국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같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대왕이 바빌론에서 술을 마신 후 열이 난 다음 10일만에 사망하니, 나이 겨우 32세때의 일이다.

그 다음날 제국은 붕괴된다.

 

중화민족이 특별히 강인해서도 아니다.

세계역사상 더욱 강인한 민족은 수두룩하다. 예를 들면, 스파르타가 있다. 스파르타는 모든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사이다. 모든 여인은 전사를 길러내기 위하여 살았다. 스파르타의 영아는 출생하면 바로 장로의 검사를 받는다. 불합격하면 바로 황야에 버려버린다. 장로가 인정하면 모친이 반드시 독한 술로 영아를 씻겨야 한다. 만일 영아가 혼미해지거나 경련이 일면, 즉시 버려버린다. 사내아이가 7살이 된 후에는 일률적으로 정규군사훈련에 편입된다. 스파르타의 모친은 자식을 전장터로 내보낼 때 방패를 하나 준다. 그녀들이 하는 말은 모두 똑같다. "방패를 들고 영광스럽게 돌아오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너의 시체를 들고 오게 하라"

스파르타의 사전에 '도망'과 '투항'이라는 말은 없다. 강적이 스파르타에 굴복을 요구하면서, 만일 따르지 않으면 스파르타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했다.

스파르타국왕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해보라"

이것이 역사상 "스파르타식의 대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원전480년, 페르시아국왕인 크세르크세스는 친히 5백만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한다. 스파르타국왕인 레오니다스는 아테네의 요청에 따라 친히 300명의 전사를 이끌고 그리스 테르모필레로 가서 정면으로 응전한다. 3일간의 혈전을 거쳐 적군 2만여를 죽이고, 결국 레오니다스의 전사는 전멸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인이 전장터를 정리할 때 단지 298구의 시신을 수습했을 뿐이다; 2명의 전사는 병으로 그리고 명을 받아 고향에 소식을 전하러 갔다가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전국민은 그들와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1명의 전사는 자살하고, 다른 한명은 그 다음 전투에서 희생된다. 다만, 스파르타인은 여전히 그들을 열사의 묘지에 묻어주기를 거절한다.

자그마한 스파르타는 바로 이런 강인함으로 위대한 아테네를 물리치고, 그리스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전국민이 강인했던 국가도 겨우 300년을 존속했을 뿐이다. 2004년초, 필자가 아테네대학에 객좌연구권으로 가 있을 때, 그리스 교수 크라마이스에게 스파르타를 가보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거기 가서 뭐할 건가? 현재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고 그냥 농사짓는 땅이다. 농지를 보고 싶은 것인가?

 

중국문명은 모든 이런 위대한 문명을 뛰어넘었다.

중화민족은 이런 모든 위대한 민족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중국성격때문이다.

중국의 성격은 광대하지도, 용맹하지도, 강인하지도 않다.

중국의 성격이 무엇인지 말해주겠다.

중국의 성격은 "완강(頑强)"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완강은 위대의 계관이다.

 

중국문명은 중단된 적이 없다. 중국문명은 고난의 와중에서 중단되지 않았다.

한 국가의 최대의 고난은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다(人相食). "인상식"은 인류사회의 모든 도덕과 질서의 막장이다.

알고 있는가? 중국역사상 '인상식'은 드물지 않았다는 것을. 노신은 역사서를 보다가 '사람을 먹다(吃人)'라는 두 글자만 보았다고 한다. 실제역사를 보더라도 그 말은 지나치지 않다.

오호난화(五胡亂華). 각 이민족군대가 중원에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성행했다. 갈()족의 군대는 군량미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양식을 빼앗지 못하면 한족 여자를 약탈하여 밤에는 간음하고, 낮에는 죽여서 삶아먹었다. 요하에서 온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업성을 점령한 후 5만의 한족소녀를 빼앗아 모조리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병들은 먼저 간음한 후 삶아먹었다. 겨울이 지나자 5만의 소녀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유골은 업성의 바깥에 산언덕처럼 쌓였다.

북송말년의 "정강지난(靖康之亂)"때 금나라병사가 남침하여, 강회일대에서 양식이 모자라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육은 돼지고기나 쌀보다 값이 쌌다. 당시 군대는 인육을 군량으로 삼았는데, 사람을 "兩脚羊, 두 다리 달린 양)"이라고 불렀다. 늙고 마른 남자는 "요파화(饒把火)"라고 불렀는데, 그 살을 구우려면 불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젊은 여자는 "불선양(不羨羊)"이라고 불렀는데, 양고기보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어린아이는 "화골란(和骨爛)"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살과 뼈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원나라말기에 관군의 양식이 부족하자, 역시 백성을 붙잡아서 먹었다. 인육을 먹는 방법은 아주 풍부하여 3권짜리 요리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인육(人肉)을 "상육(想肉)"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맛이 좋아서 먹고나면 또 먹고싶어진다는 뜻이었다.

수나라말기의 제갈앙(諸葛昻)과 고찬(高瓚)은 식인마였다. 어느날 고찬이 제갈앙을 연회에 초청했다. 주요리는 10살된 쌍동이형제였다. 머리, 손, 다리를 각각 접시에 담아서 식탁에 올렸다. 오래지 않아, 제갈앙이 고찬을 연회에 초청했다. 한 미첩(美妾)이 술을 따라주었는데, 미첩이 아무런 이유없이 웃음소리를 냈다. 제갈앙은 물러나라고 말한다음, 바로 그 첩을 큰 찜통에 넣고 삶게 했다. 화장을 예쁘게 시킨다음 비단으로 덮어서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로 식탁 위에 내놓았다. 제갈앙은 손으로 다리살을 떼어 고찬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감히 보지를 못했다. 제갈앙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유방을 떼어내어 씹어먹었다.

필자는 더 많은 놀랄만한 사례들을 많이 보았지만,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나중에 병란을 만나서, 제갈앙과 고찬은 모두 도적에게 붙잡혀 돈을 요구받는다. 그들이 돈을 내놓지 못하자, 도적은 그들을 나뭇기둥에 묶어놓고, 살을 한점 한점 떼어내어 구워서 술안주로 삼았다.

불가에서 말하는 소위 "현세보(現世報)"이다.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여, 어떻게 이런 고난과정에서 열반할 수 있었는가?

 

한 나라에 있어서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광경보다 더욱 큰 고난이라면 아마도 망국(亡國)일 것이다. 앞의 세 고대문명은 모두 망국으로 사라졌다.

사실 중국에 망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조의 오호난화는 이미 망국이라고 할 만하다. 그 후에 쇠약한 송나라는 계속하여 거란, 여진과 몽골의 살인방화와 약탈을 겪었다. 수백만의 평민들이 도살당했다. 군량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악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가군은 거의 유일하게 승리한 송나라군대이기 때문이다.

원나라군대가 남하하면서, 도시를 도살했다. 사병들의 취미스포츠활동은 바로 누가 사람머리를 더 많이 자르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북방의 등기인구는 4,500만이었다. 원나라군대가 지나간 후 겨우 600여만이 남았다. 중원지역은 수천리에 인적이 끊겼고,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으며, 우물에는 시신으로 가득 차서,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특히 기록할만한 것이라면, 원나라군대를 지휘하여 송을 멸망시킨 것은 하북 탁주의 한족인 장홍범(張弘范)이었다는 점이다.

원나라군대는 베트남, 일본과 같은 소국들에는 쳐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10여만의 원나라군대는 백만이 넘는 송나라군대를 격파했고, 총인구가 1억이 넘는 송나라를 멸망시키면서, 5천만이 넘는 한족을 죽여없앴다.

이것은 중국의 제1차망국이다.

컴퓨터에 이 글을 쓰는 동안 마침 북경에 봄추위가 몰려왔다. 나는 온 몸이 떨려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여, 너는 어떻게 이런 망국과정에서 열반할 수 있었는가?

 

276년후(1644년), 두 한족 이자성과 오삼계는 기녀 진원원을 위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에서 전투를 벌인다. 청나라군대의 도르곤은 홍승주의 계책하에 그 틈을 뚫고 이자성을 대패시킨 후, 북경에 진주한다. 1662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오삼계에 의하여 운남에서 교살당한다. 1683년,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장수인 한인 시랑(施琅)은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쳐들어가 정성공의 후손을 물리친다. 명나라의 감국 영정왕 주술계는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중국의 제2차 망국이다.

청나라군대는 남하하여, 명나라가 오랫동안 먹여살렸던 장수들은 모조리 투항한다. 그저 일개문신 사가법(史可法)이 양주에서 칠일밤낮을 버티면서 사수하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청나라군대는 십일 밤낮동안 성안에서 도살극을 벌인다. 이것이 역사에서 전하는 "양주십일(揚州十日)"이다. 이때 죽은 자가 80만이 넘는다.

1년후, 청나라군대는 10일내에 강남의 인민들에게 체두변발을 할 것을 명한다.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은 남길 수 없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길 수 없다". 가정사람인 황순요와 후동은 가정인민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킨다. 서주를 수성할 때 눈치만 보다가 도망친 명나라때의 총병이자 한인인 이성동은 이때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가정으로 쳐들어가 도살극을 벌여 2만여명을 죽인다. 여자들 중에서 용모가 못생긴 경우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젊고 예쁜 여자는 모조리 밤낮으로 길거리에서 간음당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못으로 두 손을 나무판에 박아놓고 강제로 간음했다. 3일후, 가정은 강물에 시신이 둥둥 떠서 나룻배가 다닐 수가 없었다. 핏자국이 강물위를 한겹 덮어버렸다.

그후, 이성동은 삼백척의 배에 금은보화와 미녀를 실어서 고향으로 보냈다.

다음 날, 강동사람 주영이 다시 가정성으로 들어가서 청나라에 항거하나, 다시 패배한다. 이리하여 청나라병사는 다시 가정성에서 도살극을 벌인다. 성내에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밖의 수십리안에는 초목이 모조리 사라졌다.

나중에 명나라총병인 오지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시 가정을 점거한다. 그도 역시 패하면서 가정은 다시 한번 도살에 휘말린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역사혈안 "가정삼도(嘉定三屠)"이다.

명나라군대는 백만이 넘었다. 그런데도 10여만의 청나라군대가 중원을 종횡하면서 무인지경처럼 휘저었다. 양주, 가정만이 아니라, 도살당한 성은 강음, 곤산, 상숙, 소주, 남창, 해녕, 광주, 감주, 상담, 대동, 사천, 하문등등이 있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청나라군대는 관내에서 37년간 살륙전을 벌여서 3,257만의 한족을 죽였다. 명나라 천계3년(1623년)의 중국등기인구는 5,165만이었는데, 청나라순치17년(1660년)에 이르러 청나라강산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을 때 1,908만으로 격감한다. 전국인구중 2/3가 죽은 것이다.

컴퓨터에서 이 부분을 쓰면서, 나의 태양혈은 그때 강물처럼 흐르는 선혈로 북을 치듯 때리는 것같았다. 나의 신체는 당시 산처럼 쌓였던 친척의 시신들처럼 뼈가 시리게 추웠다.

나는 외동아들이다.

그러나, 도살당한 사람은 하나하나 나의 친형제, 친자매이다.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여, 너는 어떻게 이런 피바다 속에서 열반할 수 있었던가?

 

중국이 불구덩이속에서 열반한 것도 한번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중국성격이다.

원나라의 철기가 장사를 함락시켰을 때, 악록서원의 수백명의 서생은 모조리 전사했고, 한 명도 투항하지 않았다.

700여년후, 문천대지진때 사천 면죽의 동기중학에 있는 51세의 교사 담천추는 무너지는 담장을 등으로 떠받치며 학생들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 담천추는 호남대학을 졸업했다.

원나라 16년(1279년), 장홍범이 원나라군대를 이끌고 애산(광동 강문)에서 남송의 잔여부대를 섬멸시킨다. 마지막 재상인 육수부는 9살된 어린황제 조병을 등에 업소 바다에 뛰어들어 죽는다. 장홍범은 애산의 석벽에 "장홍범이 이 곳에서 송을 멸망시키다(張弘范滅宋於此)"라고 새기고 돌아간다. 후인은 그의 글 앞에 '송(宋)'자를 하나 더 새긴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장홍범이 이 곳에서 송을 멸망시키다"로 바뀌게 된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이 놀라운가? 이때 공식통계에 따르면 죽은 자가 1503명이다.

그러나, 애산해전때 남송의 군민이 집단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순국하니, 다음날 바다에 떠오른 시신이 10만이었다!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부유하게 살면서 유약한 기풍을 지닌 강남의 작은 마을 가정은 3번에 걸친 도살을 당하면서도 한 명도 청나라에 투항하지 않았고, 모조리 머리카락을 남기고 머리를 남기지 못했다.

사가법은 성이 함락된 후 포로가 되어, 청나라에 의하여 투항하도록 유혹을 받지만, 사가법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의 남아이다. 어찌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겠는가? 성이 있으면 나도 있는 것이고, 성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것이다 나의 머리를 자를 수 있지만, 나의 뜻은 꺽을 수 없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조차 보존을 못한다. 집안사람들은 그의 의복과 모자를 성밖의 매화령에 묻어주니 의관총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나중에 그는 "충정공(忠正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사가법의 모친은 아들을 낳기 전에 꿈에서 문천상(文天祥)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다음에 사가법을 낳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전설이든 아니든, 사가법은 이미 문천상과 나란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건륭은 사가법등 명나라의 충신들은 "완인(完人)"으로 칭송했다; 사가법이 흐트러진 국면을 수습하려 애쓰고 ,홀로서 충성을 다하였지만, 결국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외에 유종주, 황도주등도 일대의 완인이라고 할 수 있다.

1645년, 강음사람은 체발령으로 인하여 염응원과 진명우를 수령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24만의 청나라군대가 자그마한 강음성을 포위했다. 81일동안 버텼다. 청나라군대는 3명의 왕과 18명의 대장을 잃었고, 병력 7만5천을 잃었다. 8월 20일에야 성이 함락되었는데, 눈이 벌개진 청나라군대는 성내의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서야 칼을 거두었다. 강음성에서는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부터 기녀들에 이르기까지 먼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한명도 투항하지 않았다. 도성은 3일밤낮 계속되었고, 죽은 자가 17만2천에 이르고, 노인과 어린아이 53명만이 살아남았다.

 

전략적으로 보자면, 사가법, 문천상, 육수부가 했던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뜨거운 피를 뿌리며 한목숨을 바쳤다. 그래도 망국의 국면을 되돌리지 못했다.

인류문명적으로 보자면, 단지 그들이 한 이런 일들만이 의미가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중국은 성격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이들 학문이 깊은 사람들이 그저 책벌레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의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너 자신이 무엇이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 자신이 글을 읽어본 책벌레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저 장홍범, 이성동과 같은 자들만 있고, 문천상, 사가법과 같은 사람이 없는 중국을.

그러한 중국이라면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퉁린각(麟閣)은 중화민국의 2급육군상장이다. 항전시기에 북경의 남원전투이전에 사령관인 송철원이 퉁린각에 군대를 철수시켜 성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그의 부인은 부친이 병이 깊으니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통보한다. 퉁린각은 이렇게 회신한다: "큰 적을 앞에 두고 있으니, 효보다는 충성을 해야할 때이다. 내가 친히 탕약을 다려드릴 수 없으니, 아들보도 대신 해서 쌍친에게 효도를 다해달라" 그리고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제 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할 때이다." 그는 결국 그 전투에서 죽는다.

북경의 서직문안에는 아직도 퉁린각로가 있다.

중국의 성격은 완강이다.

무엇이 완강한 것인가? 완강은 바로 '분명히 안되는 줄 알면서 그래도 하는 것'이다.

 

중국문명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분명히 안되는 줄 알면서 그래도 하는 중국인' 때문이다.

명나라말기 청나라초기의 삼대가인 왕부지, 고염무, 황종희는 정신적으로 청나라에 귀순한 적이 없다.

1142년 1월 28일,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악비(岳飛)는 조구와 진회의 '막수유(莫須有)'의 모반죄로 임안의 풍파정에서 독살된다. 그의 나이 39살때였다. 악비는 죽기 전에 붓을 들어, "천일소소, 천일소소(天日昭昭, 天日昭昭)"의 여덟글자를 썼다.

송나라의 신하 문천상은 완강하게 원나라에 항거했다. 1278년 12월 20일, 장홍범에게 오파령에서 패배한 후, 빙편을 먹고 죽고자 하였으나, 죽지를 않았다. 장홍범은 그를 애산으로 압송한다. 그리고 그에게 송나라군대의 투항을 권유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한다. 문천상은 자신의 시 <<과영정양(過零丁洋)>>을 써서 장홍범에게 준다. 장홍범은 "인생자고수무사, 유취단심조한청(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세상에 태어나서 누가 죽지를 않겠는가. 아름다운 이름을 역사에 남기겠노라)"라는 부분을 보고는 탄식하면서 더 이상 그를 강요하지 않았다.

문천상은 4년간 갇혀 있었다. 원나라에 투항한 승상 유몽염이 그를 찾아와서 투항을 권유하려 했으나, 문천상은 만나주지 않았다. 원나라에 투항한 송공제 조현도 그를 찾아와서 투항을 권유하려 했으나, 문천상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눈물만 얼굴가득 흘리면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며, "황상께서는 돌아가시오소서(聖駕請回)"라고 외쳤다. 조현은 그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서 그냥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원세조 쿠빌라이가 친히 나서서 그에게 재상자리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문천상은 "천상은 송나라의 장원 재상이다. 송나라가 망하면 죽는 길 뿐 사는 길은 없다. 그저 죽으면 족하다." 1283년 1월 9일, 47세의 문천상은 대도(북경)의 시시구(柴市口)에서 남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목을 내밀고 형을 받는다. 이로써 그는 천추에 이름을 남긴다.

명나라때 원숭환(袁崇煥)은 문천상이나 사가법보다 더욱 참혹했다. 일대명장 원숭환은 여러번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청태종)을 물리치지만, 청나라군의 '반간계'에 휘말려, 명사종은 참언을 듣고 1629년 12월초 원숭환을 감옥에 가둔다. 반년후에 서시(西市)에서 거열(車裂)의 형에 처한다. 그리고 천하에 원숭환이 '매국통적(나라를 팔고 적고 내통하다)'했다고 선포한다. 그런데, 청나라군대로부터 고난을 겪고 있던 북경시민은 불행히도 정부의 주장을 믿고, 원숭환이 형을 받을 때, 그의 살 한점씩을 돈울 주고 사서 그자리에서 씹어 먹으면서 그를 욕해댔다. 순식간의 원숭환의 살은 다 팔려버렸다.

원숭환은 그가 깊이 사랑하고, 그가 밤낮으로 보호해주려던 인민들에게 먹혔던 것이다.

이는 어느 그리스의 비극도 뛰어넘지 못할 정도이다.

그날 밤, 위병인 사모는 밤중에 몰래 원숭환의 머리를 훔쳐내어 북경 동화시 사가52호의 집안에 묻어준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영남의 원적으로 돌아가지 말고, 대대로 북경에 남아서 원숭환의 묘를 지키도록 유언한다. 현재 60여세된 사유지(幼芝) 할머니는 1630년부터 지금까지 사씨집안에서 묘를 지켜온지 17대, 379년에 이른다고 말한다.

명나라황제는 나중에 자신이 멍청했다는 것을 알고 원숭환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1772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청나라에 건륭황제가 나타난다. 그는 다시한번 원숭환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그는 비록 우리 청나라를 힘들게 하였지만, 그래도 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때는 군주가 어둡고 정치가 암담해서, 제대로 이해하여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니 아주 가련한 일이다." 그리고는 원숭환의 후순을 찾아서 관직을 준다.

누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가?

그것은 바로 적마저도 존경하는 사람이다.

1776년, 건륭은 <<이신전(貳臣傳)>>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여기에는 명나라에서 투항해온 신하 120여명이 기록되어 있다. 건륭은 친필로 그들에 대하여 "위급한 시기를 맞이하여, 주공을 위하여 위기에 목숨을 바치지 못했으니,' '절개에 크게 손상이 갔다"고 적었다. 이들 구차하게 삶을 구한 자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신전>>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홍승주(洪承疇)이다. 이 홍승주는 명나라의 태자태보이고, 병부상서이다. 한때는 이자성과 싸워서 겨우 18기만 남겨둘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몰기까지 했다. 그의 군대는 "홍군(洪軍)"이라고 불리웠다. 송산대전후에 그는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다. 홍승주를 귀순하도록 하기 위하여, 홍타이시(청태종)는 자기의 애첩인 보르지지터까지도 잘 차려입혀 그에게 보낸다. 그가 청나라에 투항한 후, 홍승주는 청나라군대의 총참모장이 된다. 그는 산해관대전을 기획하고, 청나라군대가 북경을 점령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하여 중원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건륭제의 그에 대한 평가는 각박했다. "그 사람됨이 보잘 것없는데, 그의 책은 남겨서 무엇하겠는가?" 그리하여 건륭제는 그가 쓴 책마저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하나 비열한 오삼계가 있다. 그는 나중에 사리사욕으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러다 실패하여 멸족이 된다. 자손후대는 강보에 쌓인 영아까지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건륭은 <<이신전>>에도 그를 올려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삼계는 역사상 명나라에 속하지도, 청나라에 속하지도 않는 떠돌이혼령이 되어 버린다.

건륭이 마지막으로 표창해준 명나라의 충신은 3600여명이었다. 그는 사가법이 도르곤에게 쓴 청나라에 투항할 것을 거절하는 서신을 보고 탄신해서 말했다: "사가법의 고충(孤忠)이 아쉽도다. 복왕(福王)의 불민함이 한탄스럽다. 이러한 신하를 두고도 믿고 쓰지를 않았다니, 그리하여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결국은 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명을 내려 원래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그 서신을 남겨서 후세에 전하게 한다.

건륭이 이렇게 한 것은 당연히 자기의 통치를 유지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왜 그가 이렇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자기의 통치를 유지보호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중국문화때문이다.

시간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인류가 어떻게 진보하더라도, 중국문화에는 "충신(忠臣)"과 "반적(叛賊)"이 있다. 이것은 영원히 서로 전혀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성격이다.

이것이 비로소 중국성격이다. 또한 오늘까지도 여전히 중국성격이다.

중국문화에 정통한 건륭은 알았던 것이다. 그는 반드시 반적을 욕해야 했다. 설사 그가 청나라가 천하를 얻는데 견마지로를 다한 반적일지라도.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보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중국의 각지에서 도살을 벌였다. 그런데도 한인들이 만청문화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가 없었다. 중국문화는 그의 곁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중국문화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정복했단 말인가?

혹자는 말한다. 어느 정복이 진정한 정복인가?

오늘날의 만청문화는 이미 완전히 중화문화에 융합되었다. 만청은 피로서 중국을 뒤덮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최고의 검술은 무검의 검이다(無劍之劍).

인류문명사를 살펴보면, 사실 단 하나의 무검지검이 있었다. 

이 무검지검은 바로 '문화'이다.

5천년의 중국역사는 계속되면서 변하지 않았다.

매번 왕조가 쇠락하면, 모두 와신상담하여 권토중래했고, 매번 피바다에 빠질 때면, 붕이 되어 날개를 펴고, 봉명기산(鳳鳴岐山)했다.

5년년이래로, 중국문화는 영원히 불이 붙어 있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어떤 성격의 외부물질이 들어오든, 그 안의 잡물질은 한줄기 푸른 연기가 되어 소실되고, 그 중의 쇳덩이는 단련되어 정강(精鋼)으로 되었다.

그것이 바로 중국문화의 정강이다.

 

이것이 비로소 진정한 중국성격이다.

중국성격은 오삼계도 아니고, 홍승주도 아니다. 이성동도 아니고, 장홍범도 아니다. 당연히 제갈앙이나 고찬도 아니다.

이들의 학명은 인간쓰레기이다.

중국성격은 악비이고, 사가법이고, 원숭환이고, 담천추이다. 강음 17만2천의 '모두 먼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보통백성이다.

그들이 비로소 중국이다.

중국문화는 존엄이 충만한 완강함이다. 비록 이미 쇠약하여 외부의 모욕을 견딜 수 없게 되더라도, 여전히 불굴의 정신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침량자의 피묻은 칼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필승의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도 중국인으로 바뀔 것이다.

너희가 우리의 국토를 통치하지만, 우리는 너희의 영혼을 지배할 것이다.

오호난화의 그들 '호(胡, 오랑캐)'들이 나중에는 모두 중국인이 되었다. 하나도 예외가 없었다.

중국은 자주 전쟁에서 졌다. 그래도 중국이 훼멸된 적은 없다.

천수이벤은 역사를 읽지 않았다. 그는 대만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싶었지만, 영원히 성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대만이 너무 작아서도 아니고, 중국문화때문이다. 왜냐하면 대만은 중국이기 때문이다.

오호난화때 중국은 동시에 20여개의 국가가 있었다. 민국시대에, 중국은 7성연합통치, 12성연합통치등이 있었다. 연합통치는 독립선포와 마찬가지였다.

모든 이들 분열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문화에서 '매국노'는 자자손손 무거운 부담을 안는다.

민진당은 천수이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항주 서하령의 악비묘 앞에 진회는 이미 800년을 꿇어앉아 있었다고.

 

역사서에는 쓰여져 있다. 강대한 것이 바로 위대한 것은 아니라고.

현재 세계에는 미국보다 강대한 나라가 없다. 다만, 금년초에 필자는 미국으로 가서 강의한 바 있다. NBC에서 미국의 저명한 교수가 미국은 근본적으로 위대한 민족이라고 자칭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친히 들었다. 위대한 민족은 역사상의 질곡, 심지어 멸망까지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의지하여 다시 일어선 민족이어야 한다.

그렇다.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 그 미국교수의 말은 맞다.

나는 심지어 미국이 하나의 민족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의구심이 든다.

모든 비바람을 견대고, 모든 역경을 거치고, 모든 실패를 딛고서, 한번만이 아니라 멸망의 불구덩이에서 다시 살아난 이러한 민족이야 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민족이다.

위대한 민족은 충만한 존엄의 완강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에서 오직 하나의 민족이 중국에 비견할 수 있다.

유태인. 그들도 강인한 민족은 아니다. 인육을 먹기를 즐기는 민족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의 국가조차도 없던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 민족의 문화는 중단된 적이 없다. 중단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들 국가의 종교는 현재 거의 모든 세계강국의 국교가 되었다.

 

위대한 것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위대한 것은 전세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것은 전세계를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것은 전세계가 자기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것은 문화이다. 국가의 멸망도 중단시킬 수 없는 문화이다. 정복자도 부득이 몸과 마음으로 인정하고 따르게 하는 문화이다.

중화민족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그가 위대함은 심지어 우리들 자손이 승인할 필요도 없다.

그가 위대함은 중국은 쇠퇴한다고 떠들어대는 분청(憤靑, 분노한 청년세대)을 신경쓸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분청들도 뼛속에서는 그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이 말이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이 바로 성격이다.

중국의 운명은 사실 이미 중국의 성격을 증명해준다.

이 글을 읽은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읊은 것은 들었을 것이다:  

 

노발충관빙난처, 소소우헐(怒髮衝冠憑欄處, 瀟瀟雨歇)
대망안,앙천장소,장회격렬(抬望眼,仰天長嘯, 壯懷激烈)
삼십공명진여토(三十功名塵與土)
팔천리로운화월(八千里路雲和月)
막등한, 백료소년두, 공비절(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정강치유미설(靖康恥猶未雪)
신자한하시멸(臣子恨何時滅)
가장거, 답파하란산결(駕長車, 踏破賀蘭山缺)
장지기찬호로육(壯志饑餐胡虜肉)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
대종두,수습구산하, 조천궐(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

 

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정도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지르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년간 쌓은 공명이 한갓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이 없구나.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젊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그저 비감한 마음이 애절할 뿐.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없앨 수 있을 것인가.

전차를 몰고,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옛 산하를 다시 되찮은 후에 황제를 만나러 가리라.

 

무엇이 중국성격이냐고?

화하대지가 이민족의 말발굽아래 짓밟히더라도, 대지가 도살한 피로 강물을 이루더라도, 매국노가 희희낙락하면서 살아가더라고, 한족의 정권이 멸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5천년동안, 한족은 여전히 무수한 뜻있는 지사들과 충신, 의사, 열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완강하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피바다속을 헤치고 나와서도 꺽이지 않았다.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고함을 질렀다: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 황제를 만나러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