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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중국인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by 중은우시 2009. 4. 14.

글: 예성강(芮成鋼)

 

한 대학에서 강연을 요청해서 갔다가, 대학생들에게 한가지를 물어보았다. 중국인으로서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그러자 모두 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여러분이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사람은 장강(長江)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성(長城)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하고, 5천년문명이라고도 하고, 문자(한자)라고도 하고, 올림픽이라고도 하고, 인공위성발사라고도 했다.

 

나는 곧이어 다시 물어보았다. 만일 새벽에 깨어났을 때, 너 자신이 돌연 필리핀사람이 되어 있다면, 너는 그래도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겠는가? 혹은 네가 르완다인으로 바뀌어 있고,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며 인종말살을 겪고, 항상 기아상태에 시달린다면, 그래도 너는 전세계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 강연회장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은 이런 각도에서 "자부심"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았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자신에게서 자부심을 찾아내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감의 가장 본질적인 근원은 무엇인가?

 

내가 막 예일대학에 들어갔을 때, 같은반 학생들이 서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필리핀에서 온 한 학생이 나에게 준 인상이 아주 깊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아주 상세하게 말했다: "나의 이름(Vincent Ferez)는 2개의 단어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단어는 전형적인 영어명사이고, 두번째 단어는 전형적인 스페인 말이다. 나의 이름은 필리핀이 일찌기 식민지국가로서 여러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비하를 하지도 않았고, 평화로운 목소리로 필리핀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그의 자신감은 일종의 신념에서 온 것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나 이외의 물건으로 나를 폄하할 수 없다. 그 어느 누구도 나의 국가, 나의 고향, 나의 가난으로 인하여 나를 경시할 수 없다.

 

2007년, 나는 북경 굉지반(宏志班)의 신년교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에게 사연이 있었다. 경제적인 곤란은 그들에게서 미소와 쾌락을 빼앗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에게 초인적인 의지와 근면함, 소박한 태도와 성격을 길러주었다. 그들의 교실 벽에는 작은 산과같이 쌓여있는 코카콜라빈병과 음료캔이 있다. 이것들은 이런 음료를 마셔본 적이 없는 그들이 다른 반이나 다른 학교에서 주워온 것들이다. 이들 페품은 그들에게 수백위안의 비용을 마련하게 해준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차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담담하게 마주해야 한다. 인격적으로 전세계의 사람들은 평등하다. 모두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진정한 자신은 마음 속에 뿌리박힌 이런 신념에서 나온다.

 

중국식의 가정교육

 

중국에서, 많은 가정은 자신감을 배양하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부모는 아이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다. 아이의 앞날을 가장의 궤도와 틀에 집어넣고, 가장의 설계에 따라 성장하도록 한다. 아이 스스로의 기호에 따라 방향을 선택하도록 하지 않는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식당에서는 한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스스로 식사를 고르게 하는 것이다. 아이는 직접 웨이터에게 말한다. "나는 샌드위치 1개, 거기에 햄 2조각, 달걀은 반숙으로하고, 야채를 추가하고, 토마토는 세 조각이면 됩니다." 그들은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고른다. 이와 비교하면, 중국의 부모는 아이를 대신해서 음식을 고른다. 요리가 나오고 나서 아이는 먹지 않고, 싫어하는 요리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아이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고, 음식을 고르게 하지도 않는다. 영어문장중에 아주 딱맞는 말이 있다. "Charity begins home"(모든 미덕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자존, 독립과 자유가 없다. 가정에서부터 존중을 받아야 비로소 내심으로부터의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다.

 

중국인의 자부심

 

한 사람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독립된 인격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지, 역사를 강조하고, 유산을 강고하고, 심지어 완전히 자기에게 속하지도 안흔 것을 강조한다고 하여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사대발명이 어떻고, 사백대발명이면 또 어떤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라. 외투, 상의, 바지, 셔츠, 내의, 상하로 어느 하나 우리가 발명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간단히 누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발명했는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태산에서 돌아오면 산을 보지 않고, 황산에서 돌아오면 바위를 보지 않는다. 필자의 고향은 황산이다. 나는 황산을 사랑한다. 다만, 나는 세계에 황산보다 더욱 장관이고 위용있는 산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설마 세상에 옐로우스톤공원, 킬리만자로산, 후지산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자기비하감을 느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역사의 전승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사람들이 감탄하는 GDP의 성장속도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그저 굳은 신념만 있다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배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유구한 역사가 있고 없고, 인구가 많고 적고, 국토면적인 넓고 좁고에 따라 자신감에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자신감의 가장 본질적인 근원은 평등함을 믿는 것이고, 자신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너무 개의할 필요가 없다. 눈을 자신에게 향하자. 그래야 더욱 오래가고 견실하다.

 

자기와 비교하라

 

중국인의 자부심은 왕왕 불평등에서 유래한다.

 

너의 월급이 3천위안인데, 내 월급은 1만위안이니까,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너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나는 자가용을 몰고 출근하니,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너는 혼다를 몰고 출근하는데, 나는 BMW를 몰고 출근한다. 그래서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너는 BMW320을 몰고 출근하는데, 나는 BMW750을 몰고 출근한다. 그래서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유럽에서는 많은 경우 벤츠, BMW같은 급의 차량의 뒷부분에 중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S500" "750i"와 같은 차량등급표시가 없다. 유럽의 소비자들은 자주 차에 이런 표지를 붙이지 말아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중국의 일부 사람들은 이들 표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강조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이처럼 불평등에서 나오는 자신감은 일순간에 자기비하로 전락하기도 한다. S500을 몰고가다가 S600을 만나면, 롤스로이스를 만나면, 페라리를 만나면, 그리고 요트를 모는 사람을 만나면, 자가용비행기를 모는 사람을 만나면, 마지막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자인 아왈리드가 구매한 A380과 비교하면 철저히 자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일 정말 비교를 하려면, 마땅히 자기 자신과 비교해야 한다. 자신의 오늘날 취득한 업적과 자신의 어제의 성적을 비교한다든지, 다시 자기가 예측할 수 있는 내일의 성적과 비교하는 것이다. 자신이 계속 발전하고 있따면, 비록 보잘 것없는 진보를 이루었더라도, 역시 자신의 승리이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성과물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외국과 지나친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확실히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차이를 명확히 하고,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비로소 중국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