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역사상 유명한 황제의 유모들

중은우시 2009. 3. 20. 17:14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역사적으로, 황제가 처음 접촉하는 여성은 바로 유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유모에 대하여 대부분은 뭐라고 말로 할 수 없는 특수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옛사람들은 황제는 유모의 손에서 자란다고 말했다. 유모는 황제의 유년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즉위후에 황제는 유모에 대한 예우를 극진하고 풍성하게 하였다. 명희종(明熹宗) 주유교(朱由校)는 등극한지 반개월후에 유모인 객씨(客氏)를 봉성부인(奉聖夫人)에 봉하고, 그 아들을 금의천호(錦衣千戶)에 임명한다. 기실 이것은 그저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동한(東漢)때, 안제(安帝)는 유모인 왕성(王聖)을 "야왕군(野王君)"에 봉했다. 순제(順帝)는 유모 송씨를 "산양군(山陽君)"에 봉했고, 영제(靈帝)는 유모 조요를 "평씨군(平氏君)"에 봉하고, 다음해에 "황태후"로 모셨다; 당중종은 유모 간씨를 "평은군부인"에 봉하고, 유모 고씨는 "국부인"에 봏앴다; 당나라때, 예종은 아들 당현종의 유모 장씨를 "오국부인"에 봉했고, 막씨는 "연국부인"에 봉했다; 원나라때, 세조는 황자 연왕의 유모 조씨를 "빈국부인"에 봉했고, 유모의 남편인 공성록을 "성육공"에 봉했다; 문종은 유모의 남편을 "영도왕"에 봉했다; 성종은 유모의 남편을 "수국공"에 봉했다; 인종은 유모의 남편인 양성영을 "운국공"에 봉했다; 원나라 영종은 유모 후두타이를 "정양군부인"에 봉했고, 그녀의 남편인 아라이를 "정양군왕"에 봉했다; 명나라때, 성조는 유모 풍씨를 "보중현순부인"에 봉했다; 인종은 유모를 "익성공혜부인"으로 봉했다; 선종은 유모 이씨를 "봉상부인"에 봉했다. 이들 유모가 책봉받은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황제의 유모들은 존귀무비한 대단한 지위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존귀무비하고 지위가 혁혁한 유모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세 사람을 꼽는다면 아래의 세 사람이 될 것이다.

 

첫째, 총애를 믿고 교만했던 유모

 

황제와 유모간의 감정은 끊기 힘들다. 유모의 영향력은 이처럼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은정을 생각하는 분위기하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황제의 유모는 총애를 믿고 교만하며, 동네에서 횡행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한의 한무제 유철의 유모는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한무제를 고혹하며 한무제의 환심을 사서, 그를 "대유모"에 봉해준다. 하루가 멀다하고 유모에게 비단과 먹을 것을 하사했다. 심지어 유모가 우연히 황제와 얘기하다가 "어느 곳에 있는 전답이 좋더라"고 말을 꺼내면, 황제는 바로 "유모가 가지고 싶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모양이니, 대신들이 모두 유모를 공경하여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원래 천하에 모범이 되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표지가 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유모의 자손과 노비들이 엉망이었다. 곳곳에서 못된 짓을 벌였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장안에서 횡포를 부렸다. 벌건 대낮에 다른 사람의 마차를 끌고가며, 다른 사람의 옷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호랑이를 보듯이 무서워했고, 백관들고 쥐새끼보듯이 했다. 다만 사(邪)는 정(正)을 이길 수 없다. 마침내, '하급관리'들이 참다참다 못해서, 구실을 붙잡아, 한무제에게 유모일가를 변방으로 쫓아보내라고 주청한다. 이 유모는 그 소식을 듣자 아주 기분이 나빠져서 바로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예악태감 곽사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어보았다. 곽사인은 그녀에게 동방삭에게 가서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동방삭은 이 유모와 한무제의 관계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황제가 당신보고 떠나라고 하면서 명령을 내릴 때, 당신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말고, 그저 떠날 때, 두번 세번 계속 고개를 돌려서 황제를 돌아봐라. 그러면 된다. 이 방법이 당신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유모는 동방삭이 시킨대로 했다. 그러자, 황제의 곁에 서 있던 동방삭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너는 뭘 보느냐? 현재 황제가 아직도 네 젖을 먹으려는줄 아느냐?" 한무제는 그 말을 듣고, 옛날에 유모가 자기에게 젖을 먹여준 은정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바로 명을 내려 그녀의 죄를 용서해준다.

 

한무제는 일대의 웅주였다. 조정의 일을 처리하면서 망설이는 법이 없었고, 손속이 매서웠다. 그는 태자, 손자, 딸, 황후에 대하여까지도 악독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그녀는 유모에게는 차마 손을 쓰지 못했다. 이로써 볼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유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무제의 이처럼 과분하게 유모에게 잘 대해주는 태도는 이후 한나라에서 황제유모가 더더욱 총애를 믿고 날뛰게 만드는 화근이 되었다. 유모들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아니라, 조정에 간여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다. 한안제때, 유모인 왕성 모녀와 환관인 강경, 이윤등이 함께 결탁하여, 태후를 비방하고, 태후의 가족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내외에 선동하여, 하고싶은대로 하였다. 재상 양진을 음독자살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태자도 폐위시킨다. 동한영제의 유모인 조요도 총애를 믿고 날뛰었다. 그녀는 환관 증절, 왕보와 원수지간이었는데, 증절, 왕보를 함정에 빠트려 감옥에 가두었다. 이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발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조정을 어지럽힌 유모

 

명나라말기, 명희종의 생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길러주었던 이선시(李選侍)는 궁을 옮겼다. 건청궁에서 황제를 돌보아줄 유모가 마침 필요했다. 이리하여 객씨는 황제의 여덟모친중 하나로 자처하게 된다. 광종황후 곽씨, 희종의 생모 왕재인, 그리고 사종의 생모 유숙녀는 나중에 모두 태후로 봉해진다. 이 셋은 명희종의 이미 죽은 세 모친이다. 아직 살아있는 서이(西李), 동이(東李), 그리고 조선시도 세 모친이다. 이외에 "구귀인(舊貴人)"이 있으니 그녀도 모친의 자격이 있다. 모두 합치면 일곱 모친인데, 여기에 유모 객씨까지 합치면 여덟모친이 되는 것이다.

 

명나라때 궁중관례에 따르면, 궁내(宮內), 여비(女婢), 유모(乳母) 등은 서이소(西二所)에 거주해야 했다. 다만 객씨는 파격적으로 함안궁(咸安宮)에 거주하도록 허락받는다. 매일 아침에는 건청궁으로 가서 황제의 기거음식(起居飮食)을 돌보아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으로 "가선(家膳, 집안음식)"을 올리는데, 이것을 "노태가선(老太家膳)"이라고 불렀다. 원래, 명희중은 궁중 어선방에서 하는 요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객씨가 해주는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객씨가 해주는 조개, 연채, 샥스핀등 십여가지 해산물을 같이 넣고 끓인 것을 좋아했다. <<천계궁가>>에는 이에 관한 시도 실어놓았다.

 

객씨가 명희종의 곁에서 함께, 꽃구경 달구경을 하기도 했다. 객씨의 생일에는, 명희종이 반드시 갔다. 명희종은 그녀에게 하사품을 내릴 때도 통이 컸다. 한꺼번에 그녀에게 "인삼 한 가마니 무게 약 2,30근을 내렸다"고도 되어 있다. 객씨는 여름에 더위를 무서워했는데, 함안궁에 시원한 그늘집을 만들어주고, 명희종이 얼음을 계속 내려주었다. 천계원년 여름, 명희종은 특지를 내려 객씨가 언제든지 궁을 나가서 사가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때 그녀는 영화부귀를 한껏 누렸다.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가졌고,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했다. 객씨는 궁중에서 매일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작은 가마를 타고 오갔다. 마치 후궁과 같았다. 매번 궁을 나서서 집으로 갈 때면, 수행인원이 수백명에 달하였다. 궁안의 내시들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보내고 맞이했다. 출궁후에는 8명이 드는 가마를 탔고, 거리는 경비를 삼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궁으로 돌아올 때면, 고명부인같았다. 앞에는 태감이 8명이 서서, 붉은 홍사등을 들고 길을 안내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어가행차와 같았다. 의장의 뒤쪽에는 네덜란드수정등이 늘어서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이미 명나라와 교분이 있어, 수정등 백개를 헌납했었다. 희종은 그중 객씽게 20개를 하사했다. 밤에 궁을 드나들 때 쓰라고 한 것이다. 누런 비단을 깔아놓은 도로는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빛이 났다. 마지막에는 화려하게 차려진 봉련(鳳輦)이 있는데, 그 위에 객씨가 단정하게 앉아 있다. 정말 위세가 당당하고 따르는 자가 구름과 같이 많았다.

 

조정의 대소신료들, 왕족들중 절반은 객씨의 일당이었다. 그들은 매일 입조하다가, 멀리서 등불이 찬란하여, 마치 은하수가 흐르는 것같은 걸 보면 객씨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 어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객씨의 가마와의 거리가 십여보가 되면, 모두 한꺼번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태부인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성모낭낭이라고 불렀다. 어던 사람은 부인 천세를 세번 외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성부인 누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의모(義母)라고 부르기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양어머니로 부르기도 했다. 입으로는 이렇게 외치면서 몸은 모두 개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는 것과 같았다. 명희종이 보좌에 오를 때면 아안의 곁에 봉좌(鳳座)를 하나 마련해두는데 그곳은 객씨가 앉는 자리였다. 희종이 퇴조하면, 객씨가 그를 따라서 궁으로 돌아갔다.

 

명희종은 객씨를 총애하고 믿었다. 궁중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조리 객씨에게 관장하게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집안노비들에게는 그녀를 '구천새노태태(九千歲老太太)"라고 부르게 했다. 매일 세번 그녀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게 하는데, 입으로는 "노태태천세, 천세, 천천세"라고 외치게 했다. 여덟모친들 중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건 누구 하나 유모 객씨에 미치지 못했다. 정말 천고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용상을 독점한 유모

 

속담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랑은 없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원한도 없다는 말이 있다. 유모로서 귀비(貴妃)에 올랐을 뿐아니라, 용상을 독점하기까지 했으며, 후궁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면 아무런 원인이 없을 수 없다. 이 후궁의 총애를 독점한 유모가 바로 만정아(萬貞兒)이다.

 

만정아는 4살때, 집안이 빈곤하여, 궁녀로 보내어진다. 이때부터 깊은 구중궁궐에서 지낸다. 그녀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잘 살펴서, 선종의 손황후의 궁에서 일하게 뽑혀들어간다.

 

만정아는 금방 손황후의 총애를 차지한다. 그녀가 7살이 되던 해에 명선종이 죽는다. 손황후는 황태후가 된다. 만정아는 바로 황태후가 좋아하는 어린 궁녀였다. 그녀는 손태후의 곁을 따라다녔고, 서화와 글을 배운다. 그리고 궁내외의 각종 암투와 투쟁의 내막을 알게 된다. 그리고 태후의 지위를 선망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녀는 다른 사람의 위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종 정통14년, 즉 1449년, 대명황조는 사상유례없는 위기에 빠진다. 바로 영종황제가 오이라트군에 인질로 붙잡힌 것이다. 명나라조정은 한바탕 소란 끝에 영종의 동생을 새로운 황제로 앉힌다. 영종의 두살된 아들 주견심(朱見深)은 황태자가 된다. 손태후는 자기의 곁에 있던 궁녀중에서 주견심을 잘 보살필수 있는 노련한 아이를 뽑는다. 결국 그녀는 만정아를 선택한다. 21세된 만정아는 이렇게 하여 태후의 시녀에서 황태자의 궁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 어린아이보다 19살이 많았다. 그의 생모와도 나이가 비슷했다.

 

만정아는 주견심을 잘 보호하고 보살폈다. 그녀로서는 온 힘을 다했다. 막 사랑을 알기 시작하나, 정상적인 혼인을 통하여 해소할 방법이 없었던 소녀는 모든 희망을 자신이 돌보는 어린아이에게 걸게 된다.

 

주견심이 점점 자라면서, 처음으로 만정아와 성관계를 갖는다. 이는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한 것같다. 만정아는 이미 삽십이 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궁중에 있었고, 몸을 잘 관리했다. 천진하고 치기어린 궁녀들에 비하여는 성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주견심만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주견심이 사랑을 느낀 대상은 어린 아가씨가 아니라, 그를 길러주고, 보살펴주고, 그를 잘 알고 있는 어려서부터 의지했던 만정아였다. 그는 심지어 만정아를 자기의 처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주견심의 편애 이외에, 만정아 본인은 황후로서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태자의 모친이 될만했고, 용모도 평범했으며, 덩치도 크고, 성격도 활발했다. 숙녀의 기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뿐아니라, 담도 크고 목소리도 컸으며, 나서기를 좋아했다. 마치 사사건건 간섭하기 좋아하는 시어머니 같았다. 그녀는 주견심의 모든 일을 간섭하려고 했다.

 

천순 8년 정월 십칠일, 명영종 주기진이 건천궁에서 사망한다. 16세된 주견심이 명나라황제에 오른다. 천순 8년 칠월 이십일일, 자금성에서는 융중한 혼인의식이 행해진다. 십육세된 오씨가 봉관을 쓰고, 명헌종의 첫번재 황후가 된다. 다만, 겨우 한달간 황후의 자리에 있다가 만정아의 함정에 빠져 폐위되어 서궁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명헌종의 부친인 명영종이 마음에 들어했던 왕씨가 천순8년 십월 십이일 두번째 황후에 오른다.

 

1년후, 삼십칠세된 만정아는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룬다. 18세된 명헌종을 위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이 아들은 황장자이다. 황후에게 적자가 없다면, 그는 바로 미래의 명나라황제이다. 명헌종은 흥분해 마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전국의 명산대천에 황자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한다. 이어서 만정아에게 존호를 내린다.

 

이렇게 하여, 만정아는 "황귀비(皇貴妃)"에 오른다. 만정아는 마침내 자신의 첫번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만정아가 좋아하기는 너무 일렀다. 비록 관리들이 사방에 복을 빌었지만, 하늘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황장자는 이름도 지어주기 전에 요절하고 만다. 만정아는 이때 이미 나이 사십이었다. 자식을 낳을 기회는 줄어들어 있었다. 아들을 낳겠다는 욕심에 거의 미쳐버린 만정아는 한편으로 방문좌도의 방법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 음약춘약을 써서 명헌종을 붙잡아두려 했다. 그러나, 만정아는 계속 임신하지 못했다. 다시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생각한 만정아는 갈수록 변태적이 되고, 갈수록 악독해져갔다. 그녀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므로, 다른 여인들이 자식을 낳는 것도 두눈 뜨고 보지 못했다.

 

한번은 명헌종이 우연히 내고(內庫)에 갔다가, 말하는 것과 행동거지가 단아한 기(紀)씨를 마음에 들어한다. 이런 우연한 한번의 기회로 기씨는 임신을 한다. 개략 내고의 많은 궁녀들이 기씨의 아랫사람들이었을 것이므로, 그녀가 황제와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던 것같다. 배가 점점 불러와서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만귀비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만정아는 기씨가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이렇게 임신하는 것을 보자 화가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리고 즉시 그녀에게 낙태약을 먹이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기씨를 즉시 안락당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한다.

 

안락당은 병이들거나 늙은 궁녀를 수용하는 곳이다. 이 열악한 생존환경하에서, 기씨는 성화6년, 즉 1470년 7월에 비쩍 마르고 약한 사내아이를 낳는다. 궁인들은 만귀비에게 해를 당할까 우려하여 만귀비를 계속 속여왔다. 나중에 이 사내아이가 힘들게 자랐다. 그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5,6살이 되어서야 명헌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남자아이에게 주우탱(朱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기씨를 비로 봉한다. 그러나 그 해 후반에 기씨는 급사하는데, 독살당한 것이거나 목졸려 죽은 적이지만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모두 알고는 있었다. 명헌종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후하게 장사지내주라고 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기비(紀妃)에게는 "공각장희숙비"라는 시호를 내린다.

 

만정아는 온갖 머리를 짜내서 후궁을 장악한다. 그러다보니, 간병이 도져서 성화23년 봄에 죽는다. 만귀비가 죽자, 명헌종은 의지할 곳을 잃어, 처연하게 말했다: "귀비가 갔으니, 짐도 얼마 못있어 세상을 떠나겠구나" 그는 만귀비의 장례를 친히 주재하고, 7일간 조정을 보지 않는다. 이해 팔월, 우울하게 지내던 명헌종은 과연 중병을 얻어 만귀비를 따라 죽는다.

 

만정아는 비천한 궁녀에서 나이든 몸으로 젊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했고, 그 기간이 20여년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