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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능은 왜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가?

by 중은우시 2007. 5. 16.

글: 예방육(倪方六)

 

여기서는 징기스칸에 관한 가장 흥미있는 주제, 즉 죽은 후 그는 어디에 묻혔는가를 살펴보자.

 

일반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징기스칸의 능은 바로 지금의 내몽고 어얼도로(鄂爾多斯)시 이진호로(伊金洛)기 경내에 있지 않느냐고. 실제로는 아니다. 이 건축은 속칭 "팔백실(八白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징기스칸의 의관총(衣冠塚, 시신이 아닌 의관을 묻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고, 징기스칸이 실제로 묻혀 있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이동된 적이 있고,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었다.

 

"팔백실"은 바로 여덟개의 몽고빠오(蒙古包)식의 장전(帳殿)이다. 여기에서 모시는 대상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의 견해에 따르면, 여기에서 모시는 공물(供物)은 징기스칸의 영구(靈柩)외에 각각 홀란합돈(忽蘭哈敦), 고일포륵진고와합돈(古日布勒津高娃哈敦), 징기스칸 궁전(弓箭), 보일온도이(寶日溫都爾), 징기스칸말안장(馬鞍), 징기스칸좌기화상(坐騎畵像), 마지막 한 실은 상경한이각(商更翰爾閣)이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징기스칸의 생전 비밀기록들이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견해는 팔백실에서 모시는 것은 공물이 아니라 징기스칸등 8명의 사람이라고 한다. 각각, 징기스칸, 보르테부인, 후란부인, 예수부인, 수간부인, 베리구타이, 하사르, 톨로이등이라고 한다.

 

징기스칸의 실제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최근들어, 일본, 미국의 고고학전문가들이 GPS시스템을 이용하여 찾아보았지만,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 <<원사>>에는 겨우 4글자로 답안을 마련하고 있다: "장기련곡(葬起輦谷, 기련곡에 묻었다)" 징기스칸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한 20글자보다도 훨씬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글자 하나하나가 황금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명나라때의 일대문신으로써 송렴(宋濂)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아마 그도 어쩔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기련곡"이 어디인지 아마 그도 몰랐을 것이다.

 

"연(輦)"은 원래 고대 제왕이 타는 가마이다. "기연곡"이라는 글자의 뜻으로 보면, 분명히 징기스칸이 가마를 타고 떠난 골짜기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징기스칸이 몽고각부의 두령이 되어, 마지막으로 유라시아대륙을 걸치는 대몽고제국을 만든 발상지라는 의미로 보인다. "기련곡"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하여 논쟁이 많고, 견해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내몽고내에 있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외몽고(몽골공화국)에 있다고 하고, 내몽고내에서도 영하, 감숙, 신강, 북경일대등 지금까지도 논쟁이 그칠 줄을 모른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여행기에서 징기스칸은 알타이산에 묻혔다고 적었다. "모든 칸과 징기스칸 - 그들의 첫번째 주인 - 은 죽은 후에 모두 반드시 알타이라고 부르는 높은 산위에 묻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죽든지간에, 거리가 100일을 가야하는 거리일지라고, 영구를 반드시 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은 이미 황실의 불변의 전통관례가 되었다" 이 주장에 의하면, 기련곡은 알타이산 일대이다. 이 주장에 대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가 잘못 기재했다고 본다. 심지어 중문번역자들은 번역문의 아래에 "이 설을 잘못되었음"이라고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의 이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알타이산맥이 소재하는 청하현(靑河縣) 삼도해자(三道海子) 주변에서 신강의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개조한 흔적이 있는 산릉(山陵)을 발견했고, 장기스칸이 서방정벌을 위하여 만든 고잔도(古棧道)를 발견했다. "연"이 지나갔던 곳이므로, 징기스칸의 능이 있는 곳이 아닌가도 생각하고 있다.

 

명나라때의 공지월(之玥)이 지은 <<후산새록>>에서는 기련곡이 북경시 방산현에 있다고 보았는데, 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청나라때의 장붕번편(張鵬翩)은 원나라때 제왕과 황후는 죽은 후 모두 귀화성(歸化城, 지금의 내몽고 후허하오터의 옛성)의 북쪽 9리지방에 있는 "기련산(祁連山)"에 잠시 놓아두었다고 적고 있다.

 

청나라때의 장목(張穆)이 지은 <<몽고유목기>>에서는 "역사서에서 말하는 기련곡이라는 장소가 지금의 새인낙안(賽因諾顔) 좌익우기(左翼右旗)와 어얼도스 우익중기(右翼中旗)가 만나는 곳에 있다는 것에 의심이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하투(河套) 이극소맹(伊克昭盟) 등격박(騰格泊)의 서북쪽이다.

 

중화민국의 저명한 지학자인 장상문(張相文)이 지은 <<징기스칸능침변증서>>에서는 내몽고 어얼도스시의 어토크(鄂托克)기 경내에 있는 "홀기이도구(忽幾爾圖溝)"로 보았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는데, 1226년, 징기스칸이 제6차로 대군을 이끌고 서하를 치러갈 때, 도중이 지금의 이금곽락을 지날 때, 수중의 은병망평(銀柄鞭)을 땅에 떨어뜨렸다. 징기스칸은 이 곳이 그가 죽은 후에 묻힐 장소라고 생각했고, 즉시 병사들에게 이곳에 아오빠오(敖包)를 만들어 표시하게 하였으며, 말채찍을 묻었다. 다음 해, 징기스칸이 병으로 죽은 후, 시신을 이 곳으로 가져왔을 때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영구차의 바퀴가 구르지를 않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련(起輦, 가마여 떠나자)"라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에 묻었고, 이름을 "기련곡"이라고 하였다. "이금곽락"이라는 것은 바로 황릉(皇陵)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징기스칸은 이 곳에 묻혀 있다.

 

중화민국의 저명한 몽고사학자인 도기(屠寄)는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에서 기련곡은 지금의 투세투한(土謝圖汗) 중기(中旗)의 동쿠룬(東庫倫)이라고 보았다.

 

또다른 어떤 사람은 기련곡은 천리산(千里山)에 있다고 하였다. 황하 가까이에 천리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는데(지금의 내몽고 경내), 산중간에 있는 한 계곡의 이름이 천리구(千里溝)이다. 그런데, 몽고이름으로 "기액륵(其額勒)"이어서, "기련"과 발음이 같다. "기련곡"은 "천리구"의 몽고어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주장의 방증이 되는 것은 천리산의 위에 징기스칸과 그 가족의 화상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근에는 백여개에 달하는 지금은 폐쇄된 우물도 있다는 것인데, 이 옛우물의 이름이 "오릉뇌해음기일알(敖楞腦海音其日)"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이름은 징기스칸이 당시 출정하면서 데리고간 108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 곳은 징기스칸이 이끌던 수십만의 군대가 머물던 곳으로 추정되고, 징기스칸이 죽은 후 이 곳에 묻은 것으로 추정했다.

 

남송의 서정(徐霆)은 팽대아의 <<흑달사략>>을 설명하였는데, 기련곡은 당연히 커루룬하(克魯倫河)(몽골공화국경내, 溝河라고도 한다)의 강가에 있다고 본다. "나는 테무진의 묘가 노구하의 곁에 산수로 둘러싸여있다고 본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테무진은 이 곳에서 태어났고, 이 곳에 묻혔다'고 한다. 사실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작가본인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지는 알 수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에서 다시 새로운 증거를 추가했는데,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과 몽고의 공동고고대는 위성설비를 사용하여, 이 일대에서 대량의 몽고귀족의 묘를 발견하였으며, 이 곳이 고대 몽고귀족의 가족묘지였음을 확인했다. 징기스칸과 다른 원나라의 황제릉이 그 사이에 숨어있는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19세기에 편찬된 <<다상몽고사>>는 기련곡은 당연히 "알난하(斡難河), 겁록하(怯綠河), 독랄하(禿剌河)등 세 강의 원천이 있는 곳인 포이한산(布爾罕山, *중국발음으로 부얼한산이 되며, 최남선이 말한 不咸山인 것으로 보인다)일대 즉, 지금의 몽고 긍특산(肯特山) 지역이라고 본다. 이 주장은 <<흑달사략>>에서 기록한 노구하와 서로 호응하는 것인데, 하나는 강을 얘기하고, 하나는 산을 얘기하지만 모두 같은 지역을 얘기한다. 현재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모두 이 주장을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 곳은 징기스칸의 보얼지진(博爾濟錦) 가족의 발상지인 성지이고, 원나라 후손들도 조상들을 따라 이 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설에 의하면 징기스칸이 지정한 묘자리이기도 하다. 한 전설에 의하면, 징기스칸은 생전에 긍특산상의 한 느릅나무(楡樹)의 아래에 앉아서 오래 생각하다가 돌연 일어나면서 영감이 떠올라서, 따르던 사람에게 죽은 후 이 곳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소위 기련곡이라는 주장은 징기스칸 후손들의 장안법(障眼法, 눈을 가리는 수법)이라고 본다. 실제로, 징기스칸은 바로 그가 병사한 육반산(六盤山, 지금의 감숙성)에 묻혔다는 것이다. 몽고인들의 과거의 습속에 따르면, 한 사람이 죽은 후, 시체가 썩으면, 영혼이 천당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3일내에 시신을 묻어야 한다. 징기스칸이 죽었을 때는 바로 여름이었는데, 천리 먼길을 운구하여 발상지까지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소련의 고고전문가들은 오히려 징기스칸이 바이칼호 호수아래에 묻혀 있다고 본다. 이 주장은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고대의 감여술(堪輿術, 풍수)에서도 근거는 찾을 수 있다. 감여술에 따르면, 풍수길지는 수성(水城)일 수 있고, "수성"에 묻으려면, 물결이 높은지 아닌지, 물색깔이 하얀지 아닌지를 보아야 한다. 만일 물결이 용머리처럼 높이 일어나고, 물색이 은색깔이면 대길지이다. 분명히 바이칼호는 수성이며, 용의 기운을 담고 있는 풍수길지라고 할 수 있다.

 

왜 징기스칸의 매장지에 대하여 이렇게 많은 주장이 존재하는가? 이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당시에 고의로 퍼뜨린 여러가지 허위정보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징기스칸릉을 왜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는가?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원나라 제왕들은 "비장(秘葬)"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비장으로 인하여 징기스칸의 후예들도 조상의 묘자리가 도대체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비장"은 "잠장(潛葬)"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비밀리에 묻는 것이다. 이로써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인데 몽고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만일 한족 제왕처럼, 길지를 찾고, 지궁을 건설하고, 산릉을 만든다면, 송렴과 같은 대학자가 <<원사>>를 편찬할 때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저 "기련곡에 묻었다"는 네 글자만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원나라의 제왕의 매장방식은 중원의 제왕과는 전혀 달랐다. 과거 몽고인들은 샤먼교를 믿었고, 제사의 대상은 선인의 영혼이지 유골이 아니었고, 영혼이 있는 곳이지, 유골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즉, 영혼을 중시하고 유골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인과 달리 유골을 매장하는 것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유골의 처리는 비교적 간단하게 하였던 것이다.

 

<<원사>>권77 <<국속구례>>에서 기재하고 있는 원나라 제왕의 사망후의 매장방식은 이렇다: "관은 향남목(香楠木)을 가운데서 둘로 나누고, 사람의 모양으로 깍으며, 그 너비와 길이는 겨우 시신이 들어갈 수 있게 판다. 염에는 담비가죽웃옷과 가죽모자를 입히고, 신발, 허리띠, 주발은 모두 흰색가죽으로 한다. 함께 묻는 것은 금주전자 2개, 잔 1개, 접시, 그릇, 수저, 젓가락 각 1개이다. 염이 끝나면, 황금으로 네줄을 묶는다. 상여차는 흰색과 청색 납실실로 주렴을 달며, 황금으로 말머리를 장식한다. 납실실로 둘러싸는데, 금령마(金靈馬)라고 부른다. 하루에 세번 양으로 제사지낸다. 매장하는 장소에 도착하면, 묘자리에서 파낸 흙을 차례대로 늘어놓는다. 관을 묻으면, 다시 차례대로 덮는다. 남은 흙은 먼 곳에 버린다. 매장을 한 관리 3명은 5리바깥에서 살며 하루에 한번 밥을 올려 제사를 지내다가 3년후에 돌아간다"

 

이상의 문자기재에서 알 수 있듯이, 원나라 제왕의 매장풍속은 확실히 특이했다. 중원제왕의 매장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심지어 관도 그저 큰 나무를 잘라 가운데를 파내서 만든다. 매장시에는 아주 조심해서 한다. 파낸 흙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하나하나 떠내서 차례대로 놓고는, 관을 내려놓은 후, 다시 순서대로 원래대로 복귀시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중원제왕처럼 요란스럽게 토목공사를 벌이고 천하인들이 어디에 묻는지 모를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떠벌이지 않는 것이다.

 

매장후에 땅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흑달사략>>에는 "묘에는 총(塚)이 없다. 말로 땅바닥을 밝아서 평지처럼 만든다. 테무진의 묘는 화살을 꽂아 '원(垣, 담장)'으로 삼고, 말을 타고 돌아서 '위(衛)'를 삼았다" 원말청초의 섭자기(葉子奇)는 그의 저작 <<초목자>>에서 칸의 릉은 "만마리의 말로 밟아서 편평하게 만들고, 낙타의 자식 죽인다. 천기로 짘고, 다음 해 봄에 풀이 나면 장막을 거두고 흩어진다. 편평하게 넓어서 어디에 묻었는지 사람이 알 수가 없다. 제사를 지내고자 하면, 죽은 낙타의 모친을 가이드로 하여 그가 주저하며 우는 곳이 바로 묻은 곳이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자손들도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외에 다른 주장도 있는데, 징기스칸을 묻은 후, 매장지 사방에 대량의 나무를 심어서, 몇년후에 작은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버리니, 아무도 어디가 확실한 매장지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매장지를 발견당하지 않고, 비장이 성공하기 위하여, 징기스칸의 영구가 지나가는 곳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징기스칸이 죽은 후, 영구가 운송되는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다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례는 바로 영구를 운송하는 도중에 호송하는 사람이 도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은 죽여서 순장을 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현세를 떠나 내세로 가서 너희의 돌아가신 주인을 섬겨라'" "뭉크칸의 시신이 알타이산으로 운송될때, 호송하는 병마는 도중에 이천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

 

비장이외에 "박장(薄葬, 간소하게 장례치름)"관념도 비밀유지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박장"은 그말 그대로 부장품이 없는 매장법이다. <<원사>>에 기재된 풍습에 따르면, 원나라 제왕이 죽을 때 "담비가죽웃옷과 가죽모자를 입히고, 신발, 허리띠, 주발은 모두 흰색가죽으로 한다. 함께 묻는 것은 금주전자 2개, 잔 1개, 접시, 그릇, 수저, 젓가락 각 1개이다. 염이 끝나면, 황금으로 네줄을 묶는다"고 하였다. 가장 귀중한 부장품은 아마도 두 개의 금주전자일 것이다. 한나라 제왕과 같이 금루옥의(金縷玉衣)를 입히지도 않았고, 당나라제왕처럼 귀금속류의 무가지보를 함께 묻지도 않았다. 입에도 옥구슬을 물리지 않았고, 발에도 금신발을 신기지 않았다. 만일 부장품이 풍성하였다면, 아무리 몰래 묻었더라도, 도굴자들의 눈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캐낼 재물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 재물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도굴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징기스칸의 가장 뛰어난 점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원나라의 제왕들은 모두 이런 비장과 박장의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징기스칸의 능만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제왕릉도 지금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박장은 여러 기관을 설치하는 것보다 도적을 막는데 유효했다. 예를 들어 조조의 고릉(高陵, 西陵이라고도 함)은 도대체 어디인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삼국지>>의 기재에 의하면, 조조는 임종에 유언으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날을 따르지 말라.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주둔하는 병사들은 모두 주둔지를 떠나지 말라. 유사는 각각 자기의 직책을 수행하라. 염은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라. 금옥진보를 함께 묻지 말라." 금은재보를 같이 묻지 않으면 된다. 죽을 때의 수의조차 따로 만들지 못하게 하였고, 그 때 입고 있던 대로 묻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조는 묻을 때, 나무도 심지 않고 봉토도 하지 않았다(不樹不封). 땅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비장에 더하여 박장까지 하였으니, 조조의 능묘는 도굴꾼들의 주의를 끌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명한 의총(疑塚)이 되었다.

 

기련곡이 도대체 어디인가? 징기스칸이 거기에 묻혀 있기는 한 것인가? 현재까지도 이것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고, 역사의 유감이다. 그러나, 현재 인류의 비밀을 탐구하는 열정으로 볼 때, 징기스칸의 묘가 발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적지 않은 국가와 지역에서 모두 탐사의 행렬에 뛰어들고 있다. 그중에서 일본, 대만, 미국, 러시아, 한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일본은 20세기에 몽골공화국과 함께, "징기스칸묘고고탐사대"를 조직하였다. 결국 아무 것도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들어 다시 협력하고 있으며, 여러 방면에서 넓은 면적의 고찰을 벌이고 있는데, 이미 어느 정도 소득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미국은 민간방식으로 나누어 몽골공화국에 들어가고 있고, 그들이 발견한 고묘가 징기스칸능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말한 바 있다. 2000년 중국대만에서도 고고탐험대가 신강 알타이산의 삼도해자에서 중대한 발견을 하였다고 선언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재미가 있다. 만일 언제인가 징기스칸 능이 발견될 것이고,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또한 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원장이 당시 <<원사>>를 편찬하도록 지시할 때, 만일 찾고자 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쉽게 찾았을 것이다. 그는 왜 찾지 않았는가? 아마도 주원장은 징기스칸과 원나라 황제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역사에 수수께끼로 남겨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