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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국은 중국전통문화의 보존에 공헌을 했다

by 중은우시 2009. 2. 18.

글: 갈검웅(葛劍雄)

 

최근 나는 광주의 "영남논단(嶺南論壇)"에서 발표를 했다.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한국이 중국전통문화를 보존하는데 공헌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매체에서 보도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심지어 나를 "매국노", "미한(媚韓, 한국에 아첨하는 자)"하는 자로 몰아부쳤다. 인터넷에서 욕하고 조롱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원래 한 가지 견해나 주장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협의하고 비판하고 논박해야만이 제대로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술이 죽어버리고, 진리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본 모든 반대의견은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아주 간단한 말도 잘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다.

 

먼저 역사적 사실부터 얘기해보자. 일찌기 선진(先秦, 진나라통일이전)시기에 한반도에는 대량의 중원이민이 있었다. 특히 요동반도와 인접한 서북지역이 그러했다. 진,한시대에 건립된 위만조선은 중원이민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것이다. 서한의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영토를 한반도북부까지 넓혀, 요동과 조선에 4군을 설치하고 조정이 직접 관할하며, 내지와 똑같은 행정제도를 적용했다. 동한후기때 국경선이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삼국, 서진시기에는 다시 약간 확장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정치행정구역을 두는데 바로 영주(營州)이다. 6세기후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중원정권에서 벗어난다. 당고종때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때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조선을 정복했고, 정동행성을 둔다. 다만 대내적으로는 국왕을 남겨두었다. 명,청 시기에는 조선이 속국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되어서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비록 오늘 소수의 한국인들이 온갖 방법으로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를 단절코자 노력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 개인은 본말을 전도시키고, 사실을 날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은 계속하여 중국의 일부분으로 자처해왔거나, 천조(天朝)의 번속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적지 않은 옛날 사대부의 묘비를 보았다. 묘비의 제목은 하나같이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대청조선국(大淸朝鮮國)",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었다. 특히 명나라 만력연간에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일본의 침략을 격퇴시켜준 이후로, 조선의 군신은 모두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했다. 청나라가 입관한 후에도, 조선은 나라가 적고 백성이 곤궁함에도 불구하고, 군신들은 여러차례 북벌을 모의하고 명나라를 회복하도록 도우고자 했다. 이리하여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의 의복과 두발을 거절하고, 여전히 명나라식의 의관을 유지했다. 19세기말, 내우외환이 침중하고 망국의 위기에 처해서도 여전히 종주국인 청나라에 군대를 보내어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기원전2세기에 서한판도에 들어온 이후, 한반도북부는 중원왕조의 일부분으로 수백년을 지낸다. 중국문화는 현지의 주류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전통문화의 원류이자 주체가 된다. 그때부터 한반도는 직접 한자를 쓰기 시작하고, 이후 자신의 한글문자를 창제한 이후에도 한자는 여전히 관방에서 쓰이는 정식문자였다. 조선의 주요제도, 주류문화, 윤리도덕, 학술문화는 어느 것 하나 중국에서 전래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기초 위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서한말기, 한반도북부의 방언은 "연(燕)"나라(대체로 하북성 북부, 산서성 서북부) 일대와 비슷했다. 조선의 명문대가는 스스로 중원의 성씨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자(箕子), 주공(周公), 공자(公子), 태원왕씨(太原王氏), 청하최씨(淸河崔氏), 형양정씨(滎陽鄭氏), 하동류씨(河東柳氏)에서 주희(朱熹)까지...조선에 많은 '후손'을 남겼다. 비록 이들은 대부분이 반부(攀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 중국 및 중국문화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물며 문화라는 것은 국경이 없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예속관계일 때도 있고 독립관계일 때도 있고, 밀접할 때도 있고 소원할 때도 있었지만, 근대이전에 한반도는 계속하여 중국문화구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에서 발원하였고, 다만 전승과정에서 한반도의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창조했다. 이는 한국문화의 성취이자,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다.

 

다음으로, 공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예실구제야(禮失求諸野)", 즉 예를 잃었으면 초야를 뒤져서 찾아내야 한다. 중화제민족이 황하중하류에서 형성한 화하문화(한문화)는 인구의 이동, 경제와 문화의 교류로 점차 중원왕조와 속국으로 확대되었고, 중국문화의 주체가 형성되었다. 발전과 변화의 과정에서, 각종 문화현상은 파도와 같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갔다. 선진,발달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주변지역은 왕왕 지형이 폐쇄적이고, 교통이 막혀있거나, 인구유동이 적어서,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심지역이나 선진지역보다 훨씬 늦다. 이런 지체현상은 기존문화의 보존과 연속을 가져오고, 중심지역에서 일찌감치 소멸한 문화현상이 주변지역에서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변화한다. 이런 문화는 현지에서 주류문화로 자리잡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면 현지인들이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혁신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어떤 측면에서는 모체문화를 뛰어넘는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공자는 "야"로 가서 중원의 화하가 이미 잃어버린 "예"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예"를 한국에서는 온전하게 찾을 수가 있다. 만일 이러한 "예"를 널리 알린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인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 중국문화 자체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한국은 1972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를 성공적으로 등록했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물로, 1377년에 탄생했다. 명나라 홍무(주원장)연간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실구제야"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이와 활자인쇄는 중국이 발명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에 인쇄된 주요한 내용은 <<경덕전등록>>, <<선문염송집>>등 사전부의 불서를 살펴본 후, 역대 제불조사들의 게, 송, 찬, 가, 명서, 법어, 문답중에서 선(禪)을 장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부분을 초록하고 쓴 것이다. 이는 확실히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와 중국에서 탄생한 선학이며, 쓴 것도 한자이다, 그 자체는 중국문화의 일부분이다. 다만, 현재 중국에서는 아직도 더욱 빠른 동일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문화상품은 확실히 한반도 현지에서 창조한 것일 것이나, 아니면 혹시 중원에서 전래되었는데, 한국인들이 완벽하게 보존해왔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모두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이다. 만일 이후 중국에서 더욱 빠른 동일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된다면, 보완신청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 문화유산의 기록을 앞당기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이후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 없다면, <<직지심체요절>>를 중국의 불교문화, 인쇄술과 제지술을 대표하여 세계에 전시하게 하면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청나라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갈아입게 하였기 때문에 명나라의 복식은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다만 조선은 19세기말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는 찾기로 마음먹으면 수도 없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중국에서는 아예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애국적인 열정을 가졌다는 것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다만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모른다면, 애국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결과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