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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숭기(崇綺): 청나라때 유일한 몽골족 장원(狀元)

by 중은우시 2009. 8. 19.

글: china138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청나라때의 몽골인은 장원이 될 기회가 없다. 한편으로는, 몽골인들은 한문화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생소하고, 과거시험에서 한족과 맞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때은 "기불점원(旗不點元)" 즉, 기인(旗人)은 장원으로 뽑지 않는다는 조상대대로 전해져오는 규정이 있었다. 기인이면 만주족이든, 몽골족이든 장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청나라조정이 한족지식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측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인들이 한문시험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점을 감추는 측면도 있다.

 

통계에 따르면, 순치3년부터 광서30년까지 청나라조정에서는 전시(殿試)가 112번 있었고 장원이 모두 114명이 나왔다(순치 임신과, 을미과는 만, 한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두 명의 만주족 장원도 나왔다). 112명의 장원중에서 111명은 한족이다. 나머지 1명이 바로 몽골족인 숭기이다. 두 명의 만주족 장원은 그저 만주족 내부의 장원이므로, 전국장원과 같은 반열에서 얘기할 수 없다. 이와 비교하면 숭기의 이 장원은 진짜일 뿐아니라, 아주 전설적이기도 하다.

 

숭기(1829-1900). 자는 문산(文山)이고, 아로특(阿魯特)씨이다. 몽골 정남기 사람이다. 대학사 새상아(賽尙阿)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능했고, 다재다능했으며, 공부주사를 지냈다. 함풍초기에 새상아가 죄를 받아, 부자 2명이 모두 삭탈관직되어 집안이 쇠락한다. 동치4년(1865), 을축과의 과거에 참가하는데, 숭기는 순조롭게 회시, 전시를 통과한다. 그의 시험답안은 문체가 화려하고 서법이 뛰어나며, 8명의 시험관대신들의 일치하여 칭찬한다. 그리고 서태후가 일갑일명(一甲一名)으로 확정했다.

 

시험답안지를 뜯은 다음에 숭기가 기인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태후는 진퇴양난에 처한다. 만일 숭기를 뽑으면, 이는 조상대대로 전해온 규칙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만일 숭기를 뽑지 않으면, 말을 뒤집는 것이 된다. 대신들은 재삼 고려해본 후, 결국 "글로만 판단하고, 만,한을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주어 서태후의 체면을 살려준다. 그리하여, 숭기는 장원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수찬(修撰)의 관직을 수여받는다. <<청사고>>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세운지 이백수십년, 만주,몽고족중에서 한문으로 시험봐서 수찬을 받은 자는 단지 숭기 한 사람이다"

 

숭기가 장원이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숭기의 한문조예는 상당히 높다. 둘째, 기인이 과거의 앞자리를 차지한 전례가 없었다. 셋째, 시험생의 성명과 신분이 밀봉되어 있었다; 넷째, 서태후는 한번 결정하면 뒤집는 법이 없었다; 다섯째, 대신들은 서태후를 아주 무서워했다. 여러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으로 이 몽골인은 청나라 과거사상 '행운아'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행운으로 장원을 거머잡은 것은, 숭기의 영예이자, 비분한 인생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숭기의 영예는 그의 과거에서 장원을 하고 관운이 형통한 것뿐아니라, 그가 황실의 인척이 되고 만주귀족이 되었다는데도 있다. 동치11년(1872) 초, 딸이 황후에 오른다. 동생은 순비(珣妃)가 된다. 숭기에게는 황제의 장인이자, 황제의 처남이 된다. 같은해 연말에 온 집안이 신분을 바꾼다. 몽골 정남기에서 만주 상황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숭기는 당시에 가장 존귀한 기인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위와 딸이라는 두 뒷배경이 된 사람이 모두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순식간에 무로 돌아간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치제가 살아있을 때도 서태후가 그녀를 계속 힘들게 했다. 동치제가 죽은 후에는 서태후가 아들의 죽음을 그녀 탓으로 돌렸고, 그녀를 따라죽게 만든다. 계공(啓功) 선생의 <<나의 몇몇 조상과 외조상>>에 따르면 서태후가 숭기(계공의 외증조부)를 찾아와 그에게 딸의 자진을 도우라고 명령한다. 당시 딸은 이미 모든 희망이 사라져,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자살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숭기는 문밖에 꿇어앉아서 황후에게 말했다: "안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그러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하여, 일대황후가 곡기를 끊고 죽는다.

 

딸의 자살을 도운 것은 서태후의 명령이다. 숭기로는 항거할 수가 없었다. 딸의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부친으로서 애간장이 끊어지는 일이다. 숭기는 비분이 교차했다. 아로특씨가 죽은 후, 서태후는 다시 분노를 숭기에게 향했다. 한때는 그의 이부시랑 관직을 박탈하기도 했다. 딸도 죽고, 관직도 잃었다. 숭기는 이로 인하여 기가 죽지는 않았다. 가족의 흥성을 위하여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 숭기는 딸의 원한은 생각지 않고, 한 마음으로 서태후에게 잘보였다. 그리하여 겨우 새로 기용된다. 직위는 낮아지고 그것도 외직이었지만.

 

그후 거의 10년간, 숭기는 길림, 열하, 성경등지를 전전한다. 광서10년(1884년), 서태후는 숭기를 북경으로 불러들이고, 호부상서에 앉힌다. 다시 경성에 돌아온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관직도 올라갔다. 그리하여 숭기는 서태후에 대하여 더욱 감격했고, 그녀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따랐다. 서태후는 변법에 반대했고, 그도 반대했따. 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하자, 그도 지지했다. 서태후가 광서제폐위를 주장하자, 그도 주장했다. 숭기가 되돌아온 후, 서태후에게 가장 충성하는 관리중 하나가 된다.

 

당연히, 서태후도 숭기에게 관직과 작위를 계속 올려주었다. 북경에 돌아온지 몇년만에, 숭기는 호부상서, 무영전총재, 이부상서, 열권대신, 한림원장원학사등의 요직을 거친다. 이외에 서태후는 그를 홍덕전에 들어가서 대아거의 사부가 되게 한다. 숭기는 말년에 다시 한번 조정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된다. 그러나, 서태후는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책임져야 하고, 누군가 오명을 뒤집어써야할 때면, 숭의가 첫번째로 선택되었다.

 

의화단은 팔국연합군은 막아내지 못했다. 광서26년(1900년) 팔월, 연합군은 동편문을 함락시킨다. 경성이 함락의 위기에 처한다. 위급한 시기에, 서태후는 '도망주의'를 실천하는 동시에 이홍장등을 의화대신으로 임명하여 협상을 하고 조약을 체결하게 한다. 숭기등은 유경판사대신으로 임명하여, 수도를 보위하게 한다. 의화단도 이기지 못한 팔국연합군을 문인출신의 숭기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이는 그에게 이룰 수 없는 임무를 완성하라고 보내는 격이다.

 

숭기는 결국 실력이 부족하여 계속 패퇴한다. 그는 연합군이 서쪽으로 도망친 서태후를 쫓아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황가의 가마로 위장한 후 남쪽의 보정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하여 연합군을 혼란시키려는 의도였다. 보정에 있는 동안, 숭기는 서태후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생각했고, 먹고 자지를 못했다. 경성이 함락되고, 가족들이 해를 입었다는 나쁜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숭기는 광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죄책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서를 남기고 연지서원에서 목을 매어 자진한다.

 

몽고의 빛나는 문창성(文昌星)이 경성함락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대청제국의 쇠락과 함께,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숭기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영화부귀를 위하여,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굽실거렸고, 영혼이 왜곡되었던 자이다. 결국은 서태후에 버림받는다. 서태후는 귀경후에, 숭기의 충성을 생각하여 그가 '삶을 버리고 의를 이루었으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말하며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런 영예를 부여한 것은 아마도 숭기에 대한 서태후의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