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궁절계(蟾宮折桂, 달나라에서 계수나무를 꺽는다는 말로 과거에 급제함을 가르킴), 금방제명(金榜題名, 과거급제자를 발표하는 방에 이름이 오름)은 봉건사회 독서인들이 추구하던 이상이었다. 그리고 장원(狀元)은 역대독서인들이 추구하던 최고의 경지였다.
"장원"이라는 말은 한나라때 나타난다. 당시는 찰거징벽제(察擧徵僻制)를 시행했는데, 삼공등 국가의 중신들이 인재를 추천하면, 시험을 거쳐 관직에 임용하는 것이었다. 징벽때는 거장(擧狀)이 필요한데, 여기에 명단, 이력이 적히는데, 그 안에 적히는 순서는 문제되지 않았고, 장(狀)에 이름만 있으면 장원이라고 불렀다. 당나라때부터 원나라때까지 장원은 점차 민간에서 과거시험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조정에서 명문의 규정을 두어, 전시(殿試)에서 일갑(一甲)으로 일등을 차지한 경우에 장원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당송이래의 화본, 소설, 희곡의 작자들은 모두 장원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도 여럿 전해진다. 청나라때 여작가인 구심여가 쓴 <<필생화(筆生花)>>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한 관리의 딸인 강덕화(姜德華)가 궁녀로 뽑히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물에 몸을 던졌다가 다른 사람에게 구해진 후에 남장을 하고 북경으로 간다. 마침 대비(大比)가 있어 참가했다가 장원이 되고, 관직이 재상에 이른다. 나중에는 미혼부인 문소하와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희극으로 끝난다. 그러나, 과연 역사상 장원이 이처럼 간단히 될 수 있을까?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수당이래오 청나라까지 과거제도는 여러 선비들이 관직에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중국고대의 인재선발제도의 일대 개혁이었다. 한나라때의 찰거징벽제하에서는 고관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많은 인재들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그리고 위진시대의 "구품중정제"하에서는 문벌이 뛰어난 사람만이 발탁되었었다. 과거제를 실시하게 됨에 따라 청빈한 독서인들도 공개적인 시험을 통하여 평등하게 경쟁하고 우수한 자가 발탁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여기에서 문장재능은 공명을 얻는 필수조건이다. 다만, 과거에 참가하는 선비는 반드시 여러단계의 선발을 거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북경의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참가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비(大比)"는 원래 주나라때의 인구를 조사하고 관리의 실적을 평가하는 제도였다. <<주례>>에 따르면 삼년에 대비를 하여 덕행과 기예를 보고 뛰어나거나 잘하는 자를 뽑는 것이었다. 수당을 거쳐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대비"라는 말을 과거라는 것으로 사용했다. 명청양대에 매3년에 1회씩 향시(鄕試)를 거행한다. 자(子), 묘(卯), 오(午), 유(酉)의 해에 치는 것을 정과(正科)라고 불렀다. 향시를 거행하는 해는 대비의 해라고 불렀다.
향시에 참가하는 것도 아주 골치아픈 일이다. 먼저 동생(童生)에서 생원(生員,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수재(秀才)')으로 신분변화가 있어야 한다. 청나라때 이를 이루려면 동시(童試)를 통과해야 하는데, 현시(縣試), 부시(府試), 원시(院試)의 3단계가 있었다.
첫번째 단계는 현시이다. 이는 각현의 현령이 주재하는 과거시험이다. 대부분은 2월에 거행한다. 시험 1개월전에, 지현은 시험일자를 공포하고, 시험에 참가하는 동생은 본현의 예방(禮房)에 신청을 한다. 성명, 관적, 연령, 3대의 경력, 그리고 시험에 참가하는 5명이 상호 서명하고, 당해 현의 1명이 보증을 서서, 시험생이 당해 현의 관적을 가지고 있고, 신분이 깨끗하고, 즉 창기, 희자, 차역, 노비의자손이 아니라는 것, 부모상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어야 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 시험내용은 팔고문(八股文), 시첩시(試帖詩), 경론(經論), 율부(律賦) 등이다. 4,5번의 시험을 거쳐 합격자의 명단은 현의 유학서(儒學署)에 보내어 보관하고, 이로써 부시에 참가할 자격을 증명받는다.
두번째 단계는 부시이다. 부(혹은 직예주, 직예청)의 관리가 주재하며 시험은 대부분 4월에 거행된다. 신청절차, 시험과목은 현시와 대체로 비슷하다. 합격자는 원시에 참가할 자격을 갖는다.
세번째 단계는 원시이다. 이는 각성의 학정(學政, 원래 명칭은 提督學院)이 주제하는 시험이다. 학정은 3년을 임기로 하며, 자, 묘, 오, 유년 8월에 황제가 친히 선발하여 파견한다. 부임후, 주재지의 원근에 따라 순서대로 각부현에 가서 시험을 친다. 첫째해는 세시(歲試), 둘째해는 과시(科試)라 한다. 정장(正場)과 복시(復試)가 각각 1번이며, 시험에 합격하면 생원이 된다. 그리고 부, 주, 현에서 설립한 학교에 보내어진다. 새로 합격한 생원은 친공(親供, 자술서)를 써야 하는데, 내용은 현시를 칠때와 비슷하다(성명, 관적, 연령, 3대이력), 그리고 신체, 용모를 적는다. 주관관리가 심사한 후 도장을 찍어서 학교로 보낸다. 입학후에 생원은 자주 현지 시험관으로부터 검사를 받는다.
청나라때는 생원을 다시 나누었다. 늠선생원(廩膳生員, "늠생"이라고 약칭함), 증광생원(增廣生員, "증생"이라고 약칭함), 부학생원(附學生員, "부생"이라고 약칭함)의 3개 등급이 있다. 늠생은 반드시 세과양시의 1등인 자로 하며, 매년 국고에서 백은 4냥을 받는다. 동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주요한 직책은 동생의 집안이 깨끗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지 않았다는 것등을 보증하는 것이다; 증생은 돈을 받지도 않고 직책을 맡지도 않으며, 지위는 늠생보다 떨어진다; 부생은 부, 현에서 정원외로 뽑은 생원이다. 시험관이 생원을 시험칠 때 6개의 기준으로 삼는데, 문리가 잘통하면 1등, 문리가 통하면 2등, 문리가 약간 통하면 3등, 문리에 약간 하자가 있으면 4등, 문리가 황당하면 5등, 문리가 통하지 않으면 6등이다. 생원이 과거시험에 참가한 후 1,2, 3등중 앞에 이름이 오르면(큰 성은 10명, 작은 성은 5명), 비로소 향시에 참가할 자격을 준다. 나머지 3등에 오른 생원이나 어떤 사유로 향시에 참가하지 못한 생원은 향시를 치는 해 7월하순에 학정이 주재하는 녹과(錄科)에 참가할 수 있다. 녹과에 합격하지도 못하거나, 녹과/향시에 참가하지 못한 생원은 녹유(錄遺), 대수(大收) 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 합격된 자는 모두 8월에 거행되는 향시에 참가할 수 있다.
향시는 3년에 1회 시행되는 것을 정과(正科)라고 한다. 가끔 황제의 등극, 만수경전등 큰 경사가 있을 때는 황제가 영을 내려 향시를 치를 수 있다. 이를 은과(恩科)라고 한다. 만일 경전이 마침 정과가 있는 해일 때는 정과를 은과로 해서 치르고, 정과는 한해를 당기거나 미루어서 치른다. 물론 정과/은과를 합쳐서 치르기도 했다. 청나라때의 향시는 8월에 거행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초9일에 제1장을 12일에 제2장을, 15일에 제3장을 치른다. 매장은 모두 첫째날 시험지를 받아들고 입장하고 셋째날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온다. 향시에 합격하는 인원은 수량제한이 있다. 문풍의 고하, 인구다과, 부역의 중과를 기준으로 서로 다르다. 순천부가 가장 많아서 168명이었고, 귀주가 가장 적어서 40명뿐이었다. 9월에 합격자를 발표하는데, 정방(正榜)에 이름이 오르면 거인(擧人)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음해 3월에 예부에서 주재하는 전국시험인 회시(會試)에 참가할 수 있다.
회시를 치르기 전에, 시험참가자는 예부의 점검을 받는다. 즉 시험친 사람, 시험지를 확인하고, 각성순무, 학정의 복시를 거쳐, 그들이 문리에 통달하였는지, 다른 사람을 사칭하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한다. 회시는 3장으로 나뉜다. 3월 초9일이 제1장, 12일이 제2장, 15일이 제3장이다. 역시 첫째날 시험지를 들고 들어가서 셋째날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온다. 3장의 9일에 걸친 회시를 치르고 난 후에 합격자를 공사(貢士)라고 부른다.
새로 공사가 되면 다시 검토를 받고, 복시를 치른다. 그래야 전시(殿試)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그해 4월에 시행되는 1일짜리 전시에 참가한다. 시험내용은 대책(對策)인데, 황제의 명의로 문제제목을 낸다. 공사의 답안에는 자수제한이 없지만 최소한 1천자는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황제는 친히 10명의 순서를 매기고, 나머지 합격한 공사들과 함께 명단을 공포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금방제명"이다. 방은 누런 종이로 되어 있고, 겉과 속의 두 층으로 되어 있으며, 대,소금방의 구분이 있다. 대금방은 동장안문내에 걸고, 소금방은 황제에게 바친다. 앞의 3등까지를 일갑(一甲)이라고 하며, 진사급제를 내린다. 나중의 7명은 이갑(二甲)이라고 하여 진사출신을 내린다. 제3갑은 동진사출신을 내린다. 1갑1등을 "장원"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볼 때, 장원이 되려면, 동시, 향시, 회시, 전시등 수십번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무수히 관적, 연령, 용모에 대한 확인을 받는다. 이는 향시부터 전시까지 계속되고 아주 엄격하다.
<<필생화>>에서 남장여인인 강씨 아가씨가 이런 심사를 통과하려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는 수밖에 없는데, 사칭한 사람의 사투리, 나이, 용모가 완전히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단 발각되면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칼을 3개월간 쓰고, 변방에 군인으로 보낸다'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사칭사건이 여러차례 실패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건륭51년에 산동학정 조우가 연주에서 과거시험을 주재할 때, 이름을 부르는데, 보증선 늠생인 손렬, 장수훈이 한 사람의 참가자를 가리키며 저 자는 영서원이라는 시험생 본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심문을 거쳐 원래 나이와 용모가 영서원과 비슷한 서생 교여상이 돈을 받고 대신 시험에 참가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영서원은 체포되고, 교여상도 구금되었다. 학정 조우는 보증선 늠생들의 책임을 다시 강조하며 시험전에 회피하지도 말고 바꾸지도 말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제가 나타났을 때, 이를 보고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처리에 대하여 황제는 칭찬을 보냈다.
나이와 용모가 비슷하더라도 발견되는데, 나이와 용모가 다르면 방법이 없다. 동일한 건륭51년에 광동학정인 평서는 조주부에서 과거를 주재하는데 진훈이라는 동생의 나이와 용모가 부시책에 기재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문을 거쳐서 이 동생은 진훈의 숙부인데, 진훈이 병으로 죽어어 대신 참가했다는 것이었다. 발각된 후 제조관에게 보내어져서 처벌을 받았다. <<필생화>>에 나오는 강덕화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탁월해도, 고향의 부, 주, 현학에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생원의 자격이 없다. 더구나 북경에서 열리는 회시전의 향시에도 참가할 수 없었으므로, 회시에 참가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비의 해라고 하더라도, 강덕화가 과거에 참가하여 금방제명을 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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