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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乾隆)의 태평성대는 기아(飢餓)의 태평성대이다.

by 중은우시 2009. 6. 9.

글: 장굉걸(張宏杰)

 

1

 

1793년, 즉 건륭58년의 여름날, 영국은 첫번째 대중국사절단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영국인은 중국이라는 신비한 나라에 대하여 호기심에 충만했다. 그들은 중국이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나온 것처럼, 황금이 곳곳에 널려 있고, 사람들마다 비단옷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중국의 대지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들은 깜짝 놀랄만한 빈곤을 목격하게 된다. 청왕조는 많은 백성을 고용하여 영국사절단의 배 위에서 일을 하도록 해주었고, 영국인들에게 차를 올리고, 물을 따르게 했으며, 바닥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도록 해주었다. 영국인들은 이들이 "모두 엄청나게 말랐다"는 것에 주목했다. 보통 중국인들 중에서, 영국인들처럼 맥주똥배가 나오거나 영국농부처럼 둥글둥글한 얼굴을 가진 사람은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들 보통중국인들은 "매번 우리의 먹다남은 밥이나 요리를 받을 때마다 여러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가 쓰고 버린 찻잎도 그들은 서로 싸워가며 가져갔고, 다시 물을 부어서 마셨다."

사절단의 구성원인 존 버로우가 쓴 <<내가 본 건륭성세>>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산(舟山)에서건 백하(白河)를 거설러 경성으로 가는 3일간이든, 어떤 백성들도 배부르게 먹고 입었거나, 농촌이 부유하고 번영한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을 주위를 빼면, 나무도 거의 없었고, 모양도 형편없었다. 집은 보통 진흙벽으로 된 단층건물이며, 띠나 풀로 지붕을 덮었다. 가끔 독립된 작은 건물을 볼 수는 있지만, 신사의 주택이라거나 최소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농가주택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주택이건 강물이건, 모두 레드리프나 와핑(영국 테임즈강가의 두 마을)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사실상 눈에 띄는 것은 빈곤하고 낙후한 모습뿐이었다"

 

2

 

건륭황제가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중 하나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중의 하나"라는 것을 빼기도 한다.

확실히 건륭제 통치하의 중국은 종적으로 비교할 때, 중국수천년역사상인구가 가장 많고,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이다. 횡적으로 비교하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중국역사상 최대의 태평성대였다고 할 수 있고,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왜 중국의 5천년역사가 만들어낸 태평성대를 영국인들은 이처럼 암담하게 보았을까?

원인은, 건륭시대에 보통영국인과의 생활수준차이가 실제로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14세기에 유럽인들은 중국인들보다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 그들의 먹거리에서 육식의 비중은 높지 않았고, 빵 한덩어리와 수프 한 그릇이면 하루종일 고생한 영국농민들이 만족해하는 식사였다. 그러나, 경제의 질이 변하면서, 유럽인과 중국인의 생활수준은 갈수록 차이가 커지게 된다.

18세기 산업혁명초기에, 영국의 햄프셔 농장의 한 보통노동자의 1일 세끼 식사는 다음과 같다: 아침은 우유, 빵과 전날 남겨둔 금에 절인 돼지고기; 점심은 빵, 치즈, 소량의 맥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감자, 배추와 ; 저녁은 빵과 치즈. 일요일에는 신선한 돼지고기를 먹는다. 산업혁명후에 영국인의 생활은 더욱 풍요롭게 된다. 1808년 영국 보통농민가정의 소비목록을 보면 2.3갤런의 탈지우유, 1파운드의 치즈, 17 파인트의 에일맥주, 반파운드의 버터와 설탕, 그리고 1 온스의 차(茶)가 있다.

건륭시대의 중국인들은 무엇을 먹었는가?

수천년이래로, 중국농민의 주요 먹거리는 거친 곡물과 야채였다. 고기, 달걀, 우유는 불쌍할 정도로 적었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는 보릿고개때, 들판의 야채를 뜯어먹으면서 살았다. 건륭시대에 민중들이 겨를 먹고 풀을 뜯는 기록은 수도 없이 많다. <<18세기의 중국과 세계: 농업편>>에 따르면, 보통영국농민은 1년간 소비후에 11 파운드, 약 백은33-44냥가량이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중등농민의 1년수입 전체를 합쳐야 32냥에 불과했다. 그런데, 연간지출은 35냥이다. 즉, 1년간 힘들게 일해봐야 부채가 3냥 늘어난다는 것이다. 아예 잉여재산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기근을 만나면 보통농민은 그냥 파산하고, 자녀를 팔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3

 

건륭성세의 빈곤은 물질적인 면에서 뿐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나타난다.

절강연해에 도착한 후, 중국의 항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현지 총병에게 그들을 위하여 도선사를 하나 구해달라고 한다. 총병은 시원스럽게 응락한다.

영국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 발생한다. 총병의 방식은 사병을 내보내서 천진에 가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을 붙잡아오는 것이었다. 사절단의 버로우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이 보낸 병사는 금방 한 무리의 사람을 붙잡아 왔다. 그들은 내가 평생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행색이 가장 비참한 자들이다. 하나하나 두 무릎을 땅에 꿇고, 질문을 받았다...그들은 애절하게 말했다. 집을 떠나서 멀리 가게 되면 그들의 장사를 망치게 되고, 처자식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그래도 총병은 끄덕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1시간내로 떠날 준비를 마치라고 명령했다."

중국인들에게는 당연한 장면이 영국인들에게는 놀라운 일막이었다. 유럽에서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영국인은 이렇게 적었다: "총병의 전횡은 조정의 법제 혹은 백성에 대한 보호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백성, 사업으로 성공한 상인에게 집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백해무익한 노역에 종사하게 하는 것은 불공정하고 포악한 행위였다."

이는 영국인들이 놀라게 되는 여러 사건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것보다 더욱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뒤에 계속 벌어진다.

배를 몰고 내하(內河)로 들어섰을 때, 영국인들이 보게 된 것은, 관리들이 강제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뱃줄을 끌게 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뱃줄을 끌면, '약6펜스의 보수'를 주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경비는 주지 않았다. 이것은 확실히 불합리했다. 많은 백성들은 이 보수를 원치 않았고, 절반 정도 뱃줄을 끌다가 도망치곤 했다. "대신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관리들은 수하의 병사들을 부근의 마을로 보내서는 마을의 농민을 침대에서 끌어내서 뱃줄을 끌도록 시켰다. 병사들은 도망치려고 하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역을 회피하려는 농민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이런 일이 거의 매일 발생했다. 그들중 일부 사람들의 비참한 장면은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분명히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병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병사들 혹은 하급관리들의 감시감독을 받았고,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이들의 몸에 내려쳐졌다. 그들이 마치 말인 것처럼..."

건륭성세의 질서는 원래 이렇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같은 시대의 유럽에서는 인권관념이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사람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아무렇게나 다른 사람을 발아래 둘 수 없었다.

1747년, 즉 건륭12년, 프로이센 국왕 프레드리히2세는 여름궁전을 짓고는 무우궁(無憂宮, Schloss Sanssouci)을 건설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무우궁은 그에게 골치거리를 안겨주었다. 원래 그의 이 왕궁은 한 평민백성의 풍력방아의 곁에 세웠다. 건설기간동안 방앗간주인이 법원에 국왕을 제소한다. 새로 지은 궁전이 바람을 막아서 방앗간을 돌리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국왕은 양보를 해서 방앗간주인에게 배상을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영국인들이 왜 건륭시대에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 놀랐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5

 

건륭성세의 출현은 건륭황제가 최대한도로 전통적인 인치명군들의 모든 기술자원을 동원하고, 중국전통체제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냈다는데 있다. 만일 건륭이 한나라나 당나라때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위대'한 황제임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야만과 빈곤이 전 지구를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륭시대의 세계는 한나라 당나라때와는 전혀 달랐다. 건륭이 출생하기 이전에, 세계는 이미 글로벌화를 시작한다.

1522년, 마젤란의 함대는 지구일주를 성공한다. 이는 지리적인 대발견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연이어 중국남쪽의 해상에 나타나고, 속속 중국의 대문을 두드린다. 글로벌화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떤 국가도 문을 걸어잠그고 지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건륭이 살았던 18세기는 인류역사상 위대한 전환점이다. 바로 이 세기부터, 역사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이다. "건륭이 재위한 육십년동안 영국은 산업혁명의 전과정을 겪는다" 이전에, 지구의 지하에는 방대한 자원과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탐구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8세기, 일거에 보물창고의 자물쇠를 연 것과 같이 새로운 생산력이 지하에서 솟아오른 샘처럼, 돌연 뿜어져 올라왔다. 공업생산력이 수백배, 수천배 증가하고, 물질적인 부가 끊임없이 쌓여갔다.

이 시기의 정치문명의 발전도 물질문명에 뒤지지 않았다. 건륭13년(1748년) 몽테스키외는 유명한 <<법의 정신>>을 발표한다. 1776년, 즉 건륭41년에 미국은 독립을 선언한다. 1789년, 즉 건륭54년에, 프랑스에서는 부르조아대혁명이 일어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며, '주권재민원칙'을 내놓는다. 1795년, 즉 건륭황제가 퇴위한 2년후, 워싱턴은 대통령 3기연임을 거절한다.

18세기는 세계문명의 주류가 입헌제와 대의제였다. "통치자에 대한 순화를 실현하고, 그들을 법률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었다. 서구사회의 정치구조는 거대한 변화를 겪는다. 일반인의 공민권리보장은 크게 제고된다. 사람의 적극성과 창조성이 사상유례없이 해방된다.

 

6

 

지구의 또 다른 끝에서 건륭황제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건륭의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이미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구는 오대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지구를 돌아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건륭연간에 서방전도사들이 이미 그들에게 태양중심설을 전해주었고, 비록 영국사절단이 그들에게 천체운행의, 지구의, 헤셀망원경, 파크투과거울, 대헝전함'군왕'호의 함정모형, 심지어 열기구와 기어차량시범까지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세계대세의 변화에 대하여 전혀 느끼지 못하였따. 그들은 민간사회의 활역과 자발정신을 대청강산의 적으로 보았다. 60여년의 노력을 집적하여 중국역사상 가장 긴밀하고, 가장 완비되고, 가장 튼튼한 전제통치를 완성하여, 민중을 전제통치의 틀 속에 가두어 놓았다.

대청사회의 각계층은 모두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다.

그는 채찍과 당근의 수단을 가지고 황족,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길을 막아버렸다. 그들에게 그저 편안히 봉록을 받으면서 조용히 살고 설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뛰어난 권모술수와 정치수완으로 대신들을 자신의 손바닥안에 꽉 붙들어 놓았다. 이렇게 하여 군주의 뜻이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실현되도록 만들었다.

감히 반항하는 '못된 백성'에 대하여 그는 일관된 진압의 태도를 취했다. 그가 보기에 황제, 관리와 백성은 부친, 아들과 손자의 관계이다. 부친이 아무리 아들을 학대하더라도, 아들은 절대 반항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탐관오리가 아무리 착취하더라도, 살 길이 없더라도, 그저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어야 하지, 절대로 상급기관에 고발해서는 안된다. 군중들이 모여서 반항하고 자기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적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처리할 뿐이었다. 심지어 '우두머리와 따르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법에 따러 처결한다"는 것이었다.

지식인에 대하여, 그는 더더욱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공포적 수단으로, 통치에 위협을 줄 사상의 맹아를 모조리 제거한다. 건륭연간에 큰 문자옥만 해도 130여건이 벌어진다. 30여건의 문자옥운동에서 전체 사회를 압력밥솥에 넣은 것처럼 멸균처리를 했고, 안에서 바깥까지 모조리 청소했다. 이단사상의 맹아를 완전히 소멸시킨 완벽한 국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손만대에 걱정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7

 

그리하여 건륭성세는 인류문명주류에 역행한 산물이다.

건륭성세의 공적은 사상유례없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인구수량이 사상유례없이 많았으며, 오늘날의 판도를 형성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륭시대는 중화민족정신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고, 이는 한시대 한 세대의 성취보다 훨씬 크다.

중국의 역대통치자들은 모두 전체 중국인들이 '노예로서 안주'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최대의 덕정(德政)이라고 보았다. 무슨 수단을 썼든지는 묻지 않는다. 횡적으로 18세기 세계문명의 발전과 비교하자면, 건륭시대는 그저 생존권만 있을 뿐 발전권이 없던 태평성대이다. 종적으로 중국역사와 비교해보면, 건륭시대는 중국역사상 민중의 권리가 가장 깔끔하게 박탈된 시대이며, 의지가 가장 심각하게 압제받던 시대였다. 건륭성세는 기아의 성세이다. 공포의 성세이다. 강화(化. 경직화)의 성세이다. 기본적으로 소수통치자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성세이다. 건륭시대의 중국인은 '노예로서 안주'했다. 그저 위장만 허용될 뿐, 두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야만 대청강산은 억만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건륭의 성세는 감옥정신이 만들어낸 국민이다. 비록 따르기는 하고, 말은 잘 듣고, 인내심도 강하지만, 허리를 펴고, 눈을 닦고 세계의 흐름을 직면할 수 없었다.

영국인들이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중국인들이 전설에서처럼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버린다. "전세계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예의바른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자존심이 결여되어 있고, 이기적이며, 차갑고, 공적인 일메 무관심하다는 것을 느낀다.

영국인들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중국인과 접촉했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인으로 보인다. 필리핀군도에서,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페낭에서, 그리고 다른 동인도회사의 속지에서 중국이민자들은 성실하고 온순하고 근면했다. 이들 지방에서, 그들은 총명하고 창조적이었다. 그러나, 자기국가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해외의 중국인들처럼 활발하고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의 그 어느나라 사람들보다 소심하고, 차갑고, 마비되어 있으며, 잔혹했다.

사절단의 배가 운하를 지나갈 때, 구경하던 작은 배가 뒤집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강물에 빠졌다. 버로우에 따르면, "비록 이 일대에 적지 않은 배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어느 배도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았다. 우리 배에서 그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가지 않았다. 맞다. 우리는 당시 시속 7해리로 가고 있었고, 이것이 아마도 그들이 배를 멈추지 않은 이유였겠지만, 나는 그들 불행한 자들 중 몇몇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영국인들은 이렇게 분석했다. 이것은 중국통치자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현정권에 있어서, 고압적인 수단으로 이 민족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에 따라 이 민족의 성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도덕관념과 행위는 완전히 조정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좌우된다. 거의 완전하게 조정의 통제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맥카트니가 중국정권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부는 현재의 존재상황과 같이 엄격하게 말하자면 한 무리의 타타르인(만주족)이 억명의 한족에 대한 전제통치이다." 이런 전제통치에는 재난과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북방 혹은 만주 타타르가 정복한 이래로, 최소한 과거 100여년간 개선된 바 없다.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혹은 더욱 확실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퇴보했다. 우리가 매일 예술과 과학의 분야에서 전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실제로 반야만인으로 변해갔다."

 

8

 

비록 등봉조극(登峰造極)의 수준에 이르렀지만, 건륭의 통치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건륭성세는 문경지치, 정관지치와 개원성세의 결합이고 반복이었다. 불행한 점이라면, 이 성세는 출현하지 말았어야할 시기에 출현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성과는 촛불과도 같아서 태양을 만나기만 하면 암담해진다.

수천년동안 없었던 세계의 대변화에 직면하여, 중국의 전제통치가 그렇게 물샐틈이 없게 완벽하지 않았다면, 중국사회는 철판처럼 서방에서 밀려오는 문명의 사조를 막아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중국은 마침 통치능력이 공전절후인 '성세'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건륭을 대표로 하는 전제정신은 중화민족의 정신에 쇠약, 보수, 강화라는 특징을 남겼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원인이 될 뿐아니라, 아편전쟁이래로 중국이 현대화의 길에서 그렇게 헤메고 힘들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건륭이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건륭성세가 안정되고 위대했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건륭통치술의 비법을 연구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믿고 있다. 건륭의 풍격과 방식이야말로 이 중국의 독특한 대지에 적합한 것이라고.

건륭시대의 또 다른 면을 철저하게 이해하여야만, 이 시대의 득과 실에 대하여 전면적이고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중화민족이 헛되이 '건륭성세'를 겪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