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시대의 부정부패

중은우시 2009. 6. 25. 20:53

글: 장굉걸(張宏杰)

 

1

 

전제사회에서 탐관오리를 뿌리뽑는다는 것은, 바다에 물결이 일지 않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중국전통통치체제는 관리들이 일정한 정도로 부정부패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왜냐하면, '낮은 급여체계"는 관리들이 회색수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통적인 재정제도에서의 빈틈은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부지기수이다. 부정부패는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정부패가 일정한 한도내로 제한되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하나는 유학가치관이 유효하게 작동하면 인격을 스스로 지키려고 제약하게 된다. 둘째는 위로부터 아래로 정치적인 압력이 강한 경우이다. 즉, 최고통치자의 부정부패척결의 강도와 감시와 관계된다.

 

건륭의 말년에 부정부패를 제약하던 두 가지 요소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건륭의 계속된 타격으로 앉아서 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관리들은 점차 인격을 지키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유일한 행동기준을 현실이익으로 삼게 된다. 말년에 건륭제도 정력이 부족하여 '많은 경우에 관대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스스로 욕심을 부리게 되니, 다른 관리들에게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 동시에 건륭성세의 경제발전도 부정부패를 위한 거대한 기반을 제공한다. 건륭의 초기에는 대청국의 경제가 고속성장하고, 경제총량도 신속히 증가했다. 인구는 1억에서 근 3억으로 증가하였다. 중국경제총량은 세계1위를 차지하고, 인구는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대외무역도 수출초과였다. 파이가 커지니, 긁어낼 여지도 이전보다 훨씬 많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정치부패는 세균처럼 적합한 습도와 산성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건륭제의 눈앞에서,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다. 겨우 십여년의 기간동안, 건륭조는 전기의 정치규율이 엄정했던 것에서 후기의 부정부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지경으로 변화한다. 번영의 겉모습 아래에 대청왕조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건륭의 중후기에 부패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색을 드러낸다.

 

첫째, 관련금액이 소액에서 거액으로, 부패사건의 수가 소수에서 다수로 바뀐다. 건륭의 초기, 옹정제의 숙정이후, 부정부패사건은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가끔 발생하더라도, 금액이 크지 않았다. 건륭초기에 처리한 몇몇 사건은 적으면 수천냥, 많아야 수만냥이었다. 십만냥이 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제독 악선이 은 천냥을 뇌물로 받아서 사형을 당한 사례가 있었다. 중후기에 들면서, 부패사건이 연이어 발발했다. 사건금액도 몇 배, 몇 십배로 뛰었다. 관리들이 부패를 저지르면 바로 수만, 십만, 수십만이었다. 건륭34년, 귀주지주라는 낮은 관직에 있던 유표는 공금 24만냥을 유용한다. 제2차금천전투에서는 송강참참원이라는 하급관리가 공금 9만냥을 횡령했다.

 

둘째, 부패관리가 하위직에서 고위직으로 발전하고, 사건에 관련된 고관이 갈수록 많아진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고위지도자간부는 조직절차를 통하여 선발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질이 다른 관료들의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다. 확실히 건륭초기에는 부패로 패가망신한 고위관리가 3-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기이후, 형세는 완전히 바뀐다. 주부(州府)에서 성급고위관리까지 마지막에는 수석군기대신까지, 모조리 부정부패의 진흙탕에 빠졌다. 건륭중후기의 20여년동안, 성급고위관리중 처리된 사람이 20여명에 이른다. 건륭제 자신도 부득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각성 총독 순무중 청렴한 자는 열에 두 셋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셋째, 공개뇌물사건, 집단뇌물사건이 증가한다. 부정부패가 집단화, 공개화의 경향을 보인다. 강희, 옹정제때는 탐관오리를 적대시하였다. 건륭제에 이르러, 부정부패를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권력이 이미 충분히 시장화되어 한 가지 일을 처리해주거나,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거나, 한번 승진을 시켜 주거나, 법집행에서 한번 봐주거나 하면 얼마의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런 숨은 규칙을 모르면, 관료세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만일 부정부패하지 않으면, 한 사람이 자신의 인간관계네트워크를 유지할 수가 없다. 만일 부정부패하지 않으면, 그는 공적을 세울 방법이 없다. 일정한 범위내에서의 부정부패는 사회에서 묵인될 뿐아니라, "부이불패(腐而不敗, 썩어도 망하지 않는 것)"이 관료로서의 최고경지였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부정부패자는 정치적으로 방파를 결성하고, 경제적으로 서로 연결하여, 이익공동체를 구성한다. 이렇게 무리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부패사건의 주요한 특징이 관련인원이 많고, 서로간에 밀접하게 연결된 관계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건륭46년에서 49년까지 조정에서는 5건의 대형 부정부패사건을 적발해냈는데, 한 사람이 드러나면, 바로 그와 관련된 관계네트워크의 수십명 내지 백명이상의 관리가 모조리 드러나게 된다. 자주 한 사람의 건이 사건화되면 하나의 성의 관료체계가 마비되어 버릴 지경이 된다.

 

건륭말기의 가장 전형적인 부정부패사건은 감숙모진안(甘肅冒賑案)이다. 이것은 바로 위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드러낸다.

 

2

 

건륭46년, 감숙사람인 소사십삼(蕭四十三)은 회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건륭황제는 병력을 파견하여 소탕했다. 사건이 돌발적이었으므로, 감숙은 바로 대량의 군수물자를 조달해주어야 했다. 당시 감숙포정사를 맡고 있던 왕정찬(王廷瓚)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황제에게 4만냥을 기부해서 급한 불을 끄겠다고 말한다: "신은 감히 여러해동안 받아왔던 봉급 사만냥을 가지고 감숙의 국고에 넣어서 군수물자조달에 쓰게 하고자 합니다"

 

똑똑한 척 하다가 오히려 거기에 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 상소문을 읽은 후, 건륭의 첫번째 반응은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감숙성은 가난한 성이다. 관리들의 수입도 아주 낮다. 일개 포정사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왕정찬의 재산이 어떻게 모인 것인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해보니, 감숙모진안이 바로 드러난다.

 

원래, 건륭39년, 왕정천의 전임인 왕단망(王亶望)은 감숙포정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감숙은 매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중 굶어죽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현지에서 식량기부운동을 벌이도록 해서, 식량을 기부한 부자들에게는 '감생'의 자격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난구제방안은 즉시 건륭제의 승인을 받아낸다. 그러나 실제실무과정에서, 왕단망은 돈만 받고, 양식은 받지 않았다. 수년동안, 백만냥이상의 백은을 모았다. 이 돈은 한푼도 재난구제에 쓰지 않았다. 각급정부에 가짜 비용지출내역을 올리도록 한 후에, 각급 관리들이 착복했다.

 

대량의 돈을 착복하는 동시에, 왕단망은 계속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그가 식량을 기부받은 일을 언급하고 얼마나 많은 이재민들이 구조를 받았는지, 이재민들이 얼마나 황제에게 감사하고 조정에 감사하는지, 청나라조정을 얼마나 칭송하는지를 보고했다. 이러한 상소로 황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건륭42년 오월에 건륭은 왕단만이 식량기부에 공로가 있음을 들어, 성지를 내려 그를 절강순무로 발탁했다. 왕정찬이 포정사를 승계한 후, 이전의 예에 따라 부정부패를 계속 저질렀다. 나중에 통계를 내본 바에 의하면, 건륭39년에서 46년초까지 감숙성에서 모두 274,450명이 돈을 내고 감생이 되었으며, 15,094,750냥을 받았다. 전체 성관리들은 모두 2,915,600냥을 착복했다.

 

이같은 심각한 부정부패사건은 중국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청정치체제의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먼저 감찰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청나라때 재난구호품을 나눠주는 과정은 아주 엄격하게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쌀을 나눠줄 때 관리가 반드시 현장에 배치되어야 하고 매일 나눠준 후에 관리는 친히 서명날인해서 증빙으로 삼아야 한다. 모두 나눠준 다음에는 다시 발급책의 앞뒤에 서명을 하고, 책은 묶어서 표시를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여 나중에 상부의 조사에 응하여야 한다. 동시에, 나눠준 목록, 구체적인 수령자의 이름, 금액을 방에 고시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백성들도 감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왕단망은 전성의 관리들에게 스스로 재난상황을 날조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모든 재난보고, 재난조사, 구제물품감독에 관한 규정은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된 것이고, 하나도 집행되지 않았다. 수년동안, 아무도 이를 조사하지 않았고,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감숙의 재난구조미와 같은 큰 일은 황제가 아주 중시하는 일이다. 건륭42년초, 황제는 사람을 감숙에 보내어 창고를 열고 식량을 조사했다. 이를 통하여 재난구호미를 나눠주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감숙의 각 주,현의 관리는 서로 짜고 허위보고를 했다. 양식창고의 아래에는 나무판을 깔아놓고 나무판의 위에 곡식을 뿌려놓았다. 그리하여 감찰관리들에게는 창고에 양식이 가득차있다고 보고한다. 이렇게 하여 손쉽게 조정을 속여넘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건은 대청왕조의 부정부패가 이미 부분적이 아니라 전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변태(變態)적인 발전양상이 상태(常態)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사건으로 감숙성의 관리 200여명이 걸려든다. 그중에는 포정사 이하 현령이상관리가 113명이다. 감숙성의 전성에서 현령이상의 간부는 일망타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서오경을 읽은 이들 조정관리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예의염치를 땅바닥에 버렸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범죄를 저지르는데도 아무도 거절한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서로 앞다투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들은 조직적인 부정부패집단이 되었고, 사건발생전에 미리 모의하고 계획을 세웠으며, 사건진행과정에서 조직적으로 업무를 분담해서 처리했고, 사건발생후에는 동맹을 맺어 사건을 덮으려 했다.

 

이처럼 모든 성이 관련된 대형사건은 감숙에서는 공개적인 비밀이었다. 전국적으로도 여러명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7년동안 아무도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는 부정부패자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되었다. 한 성이 이러했으니, 다른 성의 관리들의 기풍도 대체로 비슷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된다. 건륭제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숙의 이 사건은 아래 위가 결탁해서, 백성들을 착취해서 수천수만을 해먹었으니, 종래에 보기드문 기이한 부패사건이로다."

 

세번째는 지방의 부패가 중앙의 고위층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부정부패의 만연정도가 중앙정부의 중추에까지 미쳤다.

 

왕단망이 당초 조정에 재난구호를 건의할 때, 황제는 약간 망설였다. 바로 조정에서 호부를 관리하는 대학사이자 수석군기대신인 우민중이 곁에서 계속 종용하고, 계속 왕단망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던 것이다. 건륭42년에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양식을 조사할 때, 감숙관리들에게 속은 것도, 확실히 조정내에서 어떤 인물이 정보를 흘려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민중은 건륭44년에 죽어버렸다. 생전에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사후에 가족들이 재산분배로 한창 시끄러웠다. 심지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제는 분가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우씨의 재산을 조사해보았는데, 200만냥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시가로 한다면 2억위안에 이르는 돈이다. 황제는 이렇게 큰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를 몰랐다. 나중에 감숙모진안이 발생하자, 황제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부패는 수석군기대신(즉, 지금의 총리급)에 까지 이른 것이다.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이로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대청률에 따라 엄격히 처분한다면, 감숙성의 전성의 현급이상 관리는 모조리 목을 쳐야 한다. 그렇다면 감숙성은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부득이 2만냥을 사망선으로 결정한다. 그래도 사형을 당한 자가 56명에 이른다. 건륭46년가을, 황제는 성지를 내린다: 총독 늑이근, 두 포정사 왕단망과 왕정찬등 56명의 탐관오리를 처결한다.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간 자가 46명이고, 삭탈관직, 곤장, 병사, 자살한 자가 수십명이었다. 우민중의 명패는 현량사에서 빼내버린다.

 

3

 

소위 성세에 이렇게 큰 사건이 발생하다니 이미 조정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이 또 다른 더 난감한 사태를 불러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왕단망사건을 처리하고나서, 황제는 한편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원래, 1년전에 황제의 70세생일때, 왕단망은 황제에게 두터운 선물을 보냈다. 하나하나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중 옥병(玉甁) 한쌍과 옥산자(玉山子)는 재료인 옥이 너무나 훌륭하고, 조각도 뛰어나서 황제가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황제가 선물을 받으면 "진구회삼(進九回三, 아홉을 받으면 셋을 돌려준다)"의 예에 따라, 한참을 생각한 후에 아픔을 참고, 두개를 왕단망에게 돌려보내 주었다. 돌려보낸 후에 황제는 약간 후회를 했다. 이 두개의 물건이 자주 눈에 아른 거렸던 것이다.

 

이번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가산을 몰수하면서 이 두 개의 물건을 궁으로 되찾아오려고 했다. 그리고 왕단망의 탐욕스러움에 비추어보면 집안에 분명히 기진이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산몰수의 결과가 보고되었다. 왕단망의 원적인 산서성 양곡, 임분의 두 현에 모두 부동산 75개, 점포 33칸, 땅,1095무(1무는 200평), 전당포 1개, 합계 은98,548냥5전이었다. 이외에 금으로 된 기물 398냥8전, 진주 5천여개, 옥기 43개, 동기 17개, 자기 25개가 있었다.

 

절강의 부임지에는 좋은 물건이 더욱 많았다. 건륭황제는 특별히 명을 내려 민절총독 진휘조에게 자세히 조사해서 몰수하라고 시켰다. 보고되어온 결과 은 90,851냥, 금엽, 금기, 금정, 금조가 모두 4785냥, 금은주보 의물이 모두 565상자였다.

 

황제는 신속히 영을 내렸고, 이 565개의 상자의 금은주보를 빠른 시일내에 내무부로 보내도록 했다.

 

1달후, 수십냥의 마차가 경성에 도착했다. 수백개의 상자가 황궁내에 산처럼 쌓였다. 황제는 기쁨과 기대에 들떠 있었다. 친히 상자를 열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상자를 하나하나 열었지만, 그때의 옥병과 옥산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주보는 대부분이 오래된 것이거나 솜씨가 보통이어서 눈에 차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크게 실망하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던 황제는 사람을 시켜 절강성에서 몰수를 담당한 관리가 기록한 원시문건을 올리라고 명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사하게 시켰다. 대조해보지 않으면 상관이 없었지만, 대조를 해보니 황제도 대경실색했다. 원래, 가산몰수시의 목록에는 100여개의 상급기진이보가 있었는데, 하나도 북경으로 보내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목록에 없는 물건이 황제의 눈앞에는 89개가 늘어나 있었다.

 

이는 확실히 누군가가 왕단망의 재산을 가로챈 것이다.

 

이는 유사이래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누가 감히 이렇게 대담하게 황제의 물건을 훔쳐낸단 말인가?

 

화가난 황제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대신 아계(阿桂)와 복장안(福長安)을 불러서 하고 있던 황하수리사업을 내버려두고 바로 절강성으로 달려가도록 한다. 민절총독 진휘조와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그들에게 반드시 진상을 밝혀내라고 엄명했다. 황제는 개략 하급관리나 노비들이 '모르면 겁이 없다'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눈앞의 보물에 눈이 어두워 이렇게 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조사한 결과는 다시 황제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재물을 보고 욕심을 낸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당당한 민절총독 진휘조였던 것이다. 원래 왕단망이 긁어모은 보물에 대하여 진휘조는 침을 흘려왓따. 이 자는 평소에 부정부패를 너무나 많이 저질렀고, 간이 갈수록 커졌다. 황상을 속이는 일도 그는 스스럼없이 해냈다. 그는 보물을 슬쩍하면서 원시문건을 고쳐놓는 것은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마각이 드러난 것이다.

 

진휘조는 당연히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황제와 대신이 죄를 범한 신하의 재산을 놓고서 하나는 얼굴을 붉히며 달려들고, 하나는 쥐새끼처럼 훔쳐내니, 중국정치사상 보기힘든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