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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타이완의 세 어머니: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

by 중은우시 2009. 8. 14.

글: 신력건(信力建)

 

타이완(臺灣)은 아주 귀에 익으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열강의 침입부터 민국의 광복에 이르리까지 타이완의 신세는 미결상태였다. 많은 전문가들도 타이완의 귀속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은 중국에 속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타이완은 청나라정부가 버린 고아이며, 이미 중국의 판도내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견해이건간에, 현재의 타이완은 자신의 신세에 대하여 확실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치대로라면, 중화민족이 당연히 자신의 친생모친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예전에 일본점령시대에 압박을 받았지만, 여전히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다. 곤란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므로, 이 세 나라는 타이완의 의지처가 된다. 그리하여 타이완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갈등상태에 있는 것이다.

 

중국: 생모(生母)

 

타이완에 대한 문자기록은 2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수당시기(589-618)에 타이완은 "유구(流求)"라고 불리웠다. 수왕조는 일찌기 3번이나 대만에 군대를 파견한 바 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610년(수대업6년)에 한족들이 팽호지구로 이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한다. 송원시기(960-1368)에 한족은 팽호지구에 이미 상당한 수량에 이른다. 한족들은 팽호를 개척한 후, 대만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면서 당시에 선진적인 농사기술을 가져간다. 12세기, 송나라는 팽호를 복건성 천주 진강현에 편입시키고 병력을 보내어 지킨다. 원나라도 대만에 병력을 파견한 바 있다. 명나라후기부터 타이완(대만)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16세기, 스페인, 네덜란드등의 서방식민세력이 급속히 발전하고, 촉각을 동방으로 돌린다. 17세기초, 네덜란드는 명말 농민의 난과 동북 만주족의 세력이 날로 커짐에 따라 명나라조정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타이완으로 침입하여, 타이완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다. 1644년, 청나라가 입관하여 북경에 청나라정권을 세운다. 1661년 4월, 잔여세력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도망쳐간 명나라의 유신 정성공은 남명왕조 초토대장군의 명의로 대만에 진군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자들에게 타이완은 중국의 땅이라고 선언한다. 타이완과 팽호의 두 섬에 있는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며 그들은 자고이래로 이 토지를 점유하고 경작"했으니 네덜란드는 반드시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따. 격렬한 전투를 거쳐 1662년 2월 정성공은 네덜란드총독으로 하여금 투항서에 서명하게 한다. 강희때, 청정부는 시랑 대장군을 파견하여 대만을 정벌한다. 그리하여 정성공의 아들 정극상의 손에서 대만을 회수한다.

 

다만, 대청제국은 타이완에 대하여 그다지 영토욕심이 없었다. 대청제국의 일부관리는 '타이완은 조그만 땅이고, 얻어봐여 별로 덕되는게 없고, 잃어봐야 별로 손해되는게 없다"고 하면서, 차라리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두는 편이 낫다'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도 타이완을 버리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만을 점령했던 시랑 장군이 극력 주장함에 따라 타이완을 남겨두게 되고, 대청제국의 판도에 들어오게 한다. 대청제국은 타이완을 212년(1683-1895)간 통치한다. 비록 대청제국은 타이완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초기에는 타이완에 대하여 여전히 '타이완을 방어하기 위하여 타이완을 통치한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870년데, 명치유신을 실행한 후의 일본은 대외적으로 영토개척에 나선다. 남으로 유구(琉球)와 타이완을 확장목표로 삼았다. 그러면서, 타이완은 '토번' 거주지이고, '무주지'라고 하였으며, 중국의 주권하에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청나라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타이완의 전체 땅은 아국의 판도이다"라고 선언한다. '전 타이완의 백성은 중국에 귀속되지 않는 자가 없다'고도 선언한다. 1874년 1월, 일본군이 타이완을 침략한다. 10월 중국과 일본은 <<북경전조>>를 체결하였다. 비록 연약한 청나라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타협을 하기는 했지만, <<북경전조>>에는 여전히 중국이 전체 타이완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표명했다.

 

주권의식은 일본점령시대와 민국시대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강렬했다. 타이완의 생모인 중국은 평화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1978년, 등소평은 일국양제의 구상을 밝히고, 대만역사가 남겨놓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따. 1979년에는 전인대가 <<고대만동포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정중하게 중국정부는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시정방침을 밝힌다. 그리고 양안이 군사대치를 중단하고 협상을 하자고 호소한다. 1992년초, 당시 중국국가주석이던 강택민은 대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8개항을 내놓는다. 연말에 해기회와 해협회는 소위 "92컨센서스"를 이룬다. 1993년, 해협회 회장인 왕도함과 해기회 동사장인 고진보는 싱가포르에서 정식으로 제1차 "왕고회담"을 거행한다. 이는 해협양안 고위층간의 장기간 결별한 후에 최초의 정식만남이었다. 이는 양안관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역사적인 사건이며, 중요한 이정표이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국가지도자가 된 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양안대화와 경제무역거래가 이루어진다. 타이완과 대륙의 형세는 점차 완화된다. 금년, 양당의 역사적인 회담으로 60년간의 대립국면을 해소하게 된다. "상호신뢰를 건립하고, 분쟁은 놔두며, 같은 것을 추구하고 다른 점을 남겨두며, 함께 윈윈을 추구한다(建立互信, 置爭議, 求同存異, 共創雙)" 이 열여섯자의 잠언은 쌍방의 발전기초와 미리방향을 잡아주었다.

 

일본: 양모(養母)

 

타이완의 일본통치시기는 1895년에서 1945년까지이다. 이때는 타이완이 일본식민통치를 받았다.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일본시대" "일거(日据)시대" "일본통치시기" 혹은 "일본식민시기"로 부른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다음해 청나라정부가 패전한다. 그리하여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한다. 이는 일부 타이완주민의 불만을 샀고, 당시 사람들이 시장에서 모여서 곡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정부에는 태도를 바꿔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따. 타이완 인민은 일본식민정부에 대한 반항을 지속했고, 초기에는 격렬한 무장충돌(특히 중,남부의 지방세력이 많았다)을 벌였다. 예를 들면, 1915년 제1차로 종교세력이 결합하여 일본통치에 반항한 서래암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막나로도(莫那魯道)가 주도한 "무사(霧社)"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결국은 일본의 진압으로 와해된다.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기간은 50년에 이른다.

 

1945년 8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패전을 선언하고 무조건항복한다. 그리고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대표인 하응흠은 투항서를 접수한다. 그리고 민국정부를 대표하여 선언한다: 오늘부터, 타이완 및 팽호열도는 정식으로 중국판도에 다시 편입된다. 모든 토지, 인민, 정치는 중국의 주권하에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타이완, 팽호는 중국의 주권관할하에 다시 들어온다. 이후 진의를 최고행정수장으로 하는 '대만성행정장관공서'가 구성된다. 중화민국은 대만을 광복시킨 것이다.

 

비록 일본이 타이완을 점거한 시대에 도살, 진압등 잔혹한 수단으로 민중의 반항을 제압했지만, 이것들을 빼고 말한다면, 일본인이 타이완에서 실시한 정책은 괜찮은 것이었다. 예를 글어, 상세한 호적과 토지관리를 시행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타이완은행을 만들어 일본과 통일적인 화폐를 발행하고, 전신사업을 대거 벌여서 1919년까지 전체 타이완에 이미 7146대의 전화와 6개으 전보선이 있었다; 1908년에는 기륭에서 고웅에 이르는 철로가 부설된다. 여기에 기륭과 고웅의 두 항구를 건설한다. '녹색혁명'을 추진하여 대만을 쌀과 설탕의 왕국으로 변모시킨다. 문화적으로, 동화회유정책을 써서, 타이완사람들에게 일본어를 가르키고 일본인, 한인과 원주민의 서로 다른 교육체계를 건립한다. 사쿠다 사마타(左久間左馬太) 총독이 재임할 때는 원주민에게 이번정책을 실시하여,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도록 한다. 사회적으로, 총독부는 '삼악' 즉, 아편, 전족과 변발을 폐지한다. 동시에 위생체제를 건립하고, 하수도를 개조하며, 쥐를 박멸한다.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거리에 시계를 설치하며, 타이완인들의 시간준수관념을 배양시킨다.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나중에 타이완도시건설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마도 이러한 원인때문인지, 타이완 섬내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일본이라는 양모는 타이완에 있어서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미국: 의모(義母)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래로, 타이완문제는 미중관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앞으로도 이는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이슈이다. 타이완문제가 미중간에 문제가 된 이유는 그 근원을 1940년대에 미국이 중국내전에 개입한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무력으로 중국의 대만통일을 막았다. 일본이 투항한 후, 1943년의 카이로회의로부터 2차대전승리후 중국정부가 타이완을 수복하는 모든 과정에서 미국정부는 타이완이 중국영토에 속한다는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적이 전혀 없고, 타이완은 중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1946년 중국에서 내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하고, 1948년 겨울 미국은 국민당의 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타이완과 중국대륙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틀후 미국정부는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한다. 이로부터 미국은 공개적으로 중국대륙과 타이완의 통일을 무력으로 저지하기 시작한다. 미국정부는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한 것은 상당한 시간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전쟁의 발발은 미국이 무력간섭정책을 시행하는데 하나의 핑계가 되고, 하나의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지적할 점은, 트루먼정부는 군사개입전에 공재걱으로 '타이완의 지위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타이완의 미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반드시 태평양안전이 회복, 대일평화협정의 체결 혹은 유엔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동아시아정책의 기조를 중국억제에 두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타이완의 전략적지위는 미국의 눈에 아주 가치있게 보였다. 타이완과 중국대륙을 분리시키고, 타이완당국을 지지하고 원조했다. 이렇게 하여 타이완은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을 억제하는 거점으로 된다.

 

그리하여, 최근들어서도, 미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여전히 우단사련(藕斷絲連, 연뿌리를 잘라도 실은 연결되어 있다)이다. 표면적으로 미국은 하나의 중국정책을 지지하지만, 뒤로는 타이완의 현상유지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하여 타이완에 무기를 판매한다. 다른 한편 이를 가지고 중국을 협박한다. 그러면서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타이완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의모는 비록 좋은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타이완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