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장개석 부자가 처형한 3명의 '대독(臺獨)'분자

중은우시 2009. 2. 3. 19:46

글: 왕행복(汪幸福)

 

대만의 저명한 작가 이오(李敖)는 그의 글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장씨부자가 대만에서 "대독(대만독립"분자를 소탕할 때, 총살에 처한 사람은 1명이라고 하였다.

 

1976년 12월 25일, 대만의 "총통" 엄가금도 국민당의 한 회의에서 그의 기억으로는 처형당한 정치범, 대독분자는 정평(鄭評)뿐이라고 말했다.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1960,70년대에 대만에서 처형당한 "대독"분자는 1명이 아니라, 3명이다. 이외에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3명이 더 있으나, 이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집행되지 않거나, 유기징역으로 판결이 변경되었다.

 

송경송(宋景松)

 

이 사건의 기원은 "대독"분자 진삼흥(陳三興)부터 시작된다. 진삼흥은 대만 까오슝(高雄)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까오슝에서 공부했고, 1956년에는 까오슝중학에 입학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미성년인 진삼흥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사회활동에 아주 열심이었따. 그리하여 정치적 색체가 짙은 "학진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1958년 7월, 진삼흥은 공부를 소홀히하다가, 성적불량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진삼흥이 학교를 떠나는 날, 학진회의 주요 구성원들을 모아서 회의를 가지고, "학진회"를 "대만민주동맹"으로 명칭변경하기로 한다. 그후, 진삼흥은 동생과 함께 타이페이시의 한 치과병원에 들어가서 일한다.

 

치과병원에서 일한지 얼마되지 않아, 진삼흥은 자주 병원으로 친척을 찾아오는 송경송이 자신과 이념이 같다는 것을 알고는 송경송을 자신의 "대만민주동맹"에 가입시킨다. 송경송은 과거에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체포된 바 있고, 여러해동안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마음 속으로 국민당정권을 아주 미워했다. 그는 진삼흥의 "대만민주동맹"에 가입한 후, 다시 자기와 교분이 있는 친구 유전사(劉全獅), 임휘강(林輝强)을 가입시킨다.

 

1957년 7월, 송경송, 진삼흥은 다시 대만대학 법률계에서 공부하는 학생 소정화(蘇禎和), 동자득(董自得)의 두 사람을 "대만민주동맹"에 끌어들인다. 그후 타이중시 일중(一中)의 "자치호조회", 까오슝시 중립중학의 "아세아동맹"이라는 대만독립조직이 "대만민주동맹"과 연결된다. 그중 "아세아동맹"의 시명덕(施明德), 채재원(蔡財源)은 진삼흥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여러번의 회합을 거친 후, 송경송, 진삼흥, 시명등등은 3개의 조직은 이념이 비슷하고, 뜻이 같으므로, 하나의 조직으로 합치자고 하였다. 그 후에 강력한 지휘부를 구성하자고 하였다.

 

1959년 12월, 진삼흥, 송경송등은 까오슝으로 돌아가서, 시명덕부자가 개설한 "명춘여사(明春旅社)"에서 시명덕, 채재원 및 시명덕의 두 형과 모임을 가진다. 그리고 3개의 조직을 합병하기로 하며, "대만독립연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시명덕, 채재원의 두 사람을 이 조직의 주요 지도자로 선출한다.

 

송경송은 비록 "대독연맹"의 우두머리는 아니지만, 이 조직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핵심분자였다.

 

이후, "대독연맹"은 지방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외에, 촉각을 군대에까지 뻗치게 된다. "대독연맹"의 조직이 엄밀하고, 발전이 신속하여, 1962년이 되자, 혈기에 넘치는 대독분자들은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대만독립주장을 소리높여 말하고, 국민당과 죽기살기로 한번 싸우자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대만독립의 목표를 달성하자고 하였다. 이 해 가을, 그들은 까오슝 체육관에서 거행한 전체구성원이 참가한 비밀회의에서 하나의 대행동을 결의한다. 즉, 전대만에서 "대만독립"선전활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민중이 '대독'을 인식하고, '대독'을 지지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 '대독'분자들이 행동을 개시하려할 때, 당국은 그들에 대하여 조치를 취했다. 원래, 대만당국의 조사국특수요원들은 일찌감치 진삼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까오슝중학에 있을 때부터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이식남(李植南)은 '대독'조직에서 한동안 활동하다가, 송경송, 진삼흥의 행위는 국가를 분열시키고 위험성이 커서 어떤 성과를 얻어내기 힘들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대만조사국에 자수한다. 조사국은 이 조직이 아직 발전단계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에게 잠시 폭로시키지 말고 내부에서 계속 감시활동을 하도록 지시한다.

 

1962년 5월, 대만조사국은 "대독연맹"이 향후 대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손을 쓰게 된다. 장경국이 친히 나서서, 5월 8일부터 20일까지, 조사국의 수십명 특수요원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대독연맹"의 각지 구성원들을 속속 체포한다. 6월 8일부터 22일까지, 이 조직이 군대내에 심어놓은 성원들도 모조리 체포된다.

 

3개월후, "대만독립연맹"사건에서 25명의 주요혐의자들이 경비사령부 군사법정에서 3차로 나뉘어 기소된다. 송경송은 재범이었으므로 제1차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며칠 후 형장에서 처결된다. 이 조직의 주요두목인 진삼흥, 시명덕등은 무기징역형을 받고, 나머지 가담자들은 2년에허 15년까지의 유기징역을 받는다.

 

진지웅(陳智雄)

 

진지웅은 대만 까오슝사람이다. 일찌기 대만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일본에 유학했다. 일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연고로, 그의 사상은 일본우익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차대전기간동안, 진지웅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인도네시아, 필리핀등에서 2년여동안 통역을 했다. 일본이 투항한 후, 진지웅은 대만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한편으로 인도네시아와 무역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만독립"활동에 종사했다.

 

진지웅은 일본국내에서 나타난 초기의 "대독"분자이다. 그는 여러 "대독"조직의 '외교원'이었고, 대외연락을 책임졌다. 요문의의 대독조직인 대만공화국임시정부가 성립되기 전후하여, 그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요문의는 그를 동남아각국에 '순회대사'로 파견했다.

 

진지웅의 활동은 대만정보당국의 주의를 끈다.

 

1955년, 대만당국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일본, 인도네시아와 교섭하여, 진지웅이 분열주의분자이고, 대만의 안전에 위해를 조성하니, 진지웅을 체포하여 대만에 넘겨 처리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때,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정부는 장개석과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다. 대만이 인도네시아에 요청하자, 인도네시아는 이를 중시한다. 그리고 진지웅을 구금하기로 결정한다. 진지웅이 경영하는 회사의 본사가 일본에 있었으므로, 인도네시아의 법에 따르면, 진지웅은 먼저 일본으로 보내어져야 한다. 대만당국은 일본과의 교섭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인도네시아정부는 일본정부와 진지웅을 돌려보내는 일에 관하여 협의하고자 하였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인도네시아, 일본은 모두 진지웅을 환영하지 않았다. 진지웅은 갈 곳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공중에서 왔다갔다가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시간을 반년이나 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유명한 국제적인 공중미아가 된다. 1955년말, 한 스위스의 의원이 매체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이 일이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진지웅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진다. 그리하여 자신의 관계를 이용하여, 진지웅이 스위스국적을 얻도록 도와준다. 진지웅은 스위스국적을 얻으면 일본에 입국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바로 스위스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취한다.

 

누가 알았으랴. 진지웅이 다시 일본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원래의 성격을 바꾸지 않고, 계속하여 대만독립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그리고 대만독립조직의 대외교섭에서의 연락인이 되었다.

 

대만조사국은 진지웅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계속 활동하면 위해가 크다고 생각하여 그를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1960년 12월, 대만당국은 일본정부와 여러차례의 교섭을 한 끝에, 일본마약범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일본정부가 진지웅을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청한다. 일본측은 원칙적으로 대만측의 의견에 동으한다. 유일한 요구는 진지웅을 사형에 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쌍방간에 달성된 합의에 따라, 1960년 12월 12일, 일본정부는 진지웅을 대만으로 송환한다.

 

진지웅이 대만으로 송환될 때, 당국은 그를 구금하지 않고, 그의 행적을 계속 뒤쫓고, 감시했다. 1961년말, 대만조사당국의 특수요원은 우편물검사과정에서 진지웅이 다시 '대만독립조직'인 "동심사(同心社)"를 결성하려고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대만독립분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체포한다. 장씨부자의 비준을 받아, 1962년, 대만경비총사령부 군사법정은 그를 기소한 후, 사형을 언도한다. 같은 사건의 대촌덕(戴村德), 초곤왕(肖坤旺)은 각각 유기징역 8년의 형을 받는다

 

1963년 5월 28일, 진지웅은 형장에서 총살된다.

 

이오는 여러번 '대만독립'분자중 처결된 사람이 1명이라고 하였다. 이름은 말하지를 않았지만, 아마도 진지웅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정평(鄭評)

 

정평도 대만 까오슝 사람이다. 1934년생이며, 부친은 원래 농민이었다. 나중에 잡화점을 경영했다. 부모가 사망한 후, 그는 잡화점을 물려받는다. 1960년대, 정의 처가 유선암을 앓는다. 처를 구하기 위하여 정평은 모든 가산을 팔았다. 그래도 처를 구하지 못한다.

 

1969년, 그는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까오슝에서 타이페이로 온다. 기독교도인 유진룡(遊進龍)에게 의탁한다. 유진룡은 정평이 곤궁하여 갈 곳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의 미성년인 두 아들을 자기의 빵가게에 점원으로 쓴다. 이와 동시에 유진룡의 친구이자 목사로 성이 임씨인 사람으로 하여금 정평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게 한다. 이리하여 그는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1971년, 정평은 교회활동에 적극 참가함에 따라, 대만기독교교회로부터 "기독교방일참관단"에 뽑혔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가서 기독교반공연합회가 거행하는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일본에 들어간 3일째 되는 날, 정평은 대만독립조직인 "독립대만회"의 주요 우두머리이자, 저명한 대독분자인 사명(史明)을 만난다. "독립대만회"는 이미 성립된지 4년이었고, 사명은 마침 주전장을 대만섬내로 하려는 행동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만도내에 대만독립사상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주전장"인 대만도내에서 행동할 협력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러번 얘기를 한 끝에 사명은 정평이 "대만독립" 사상이 견고하고, 대만독립사업을 위하여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를 "독립대만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사명은 자신의 생각을 정평에게 얘기하자, 정평은 가입하기를 원하고, 즉석에서 표를 기입하여 입회수속을 마쳤다. 사명은 그를 "대만제11호"로 편제하였다. 정평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사명등 대만독립분자들은 그에 대하여 대만독립의 정치교육과 유격전의 기본행동훈련을 시켰다.

 

두달후 정평은 대만으로 돌아온다.

 

사명의 지시에 따라, 그는 옛친구이자 함께 일본에 가본 적이 있는 유진룡, 가금종(柯金鍾), 황곤능(黃坤能), 뇌금동(賴錦桐)등을 "독립대만회"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주 그들과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일본총본부의 지시를 배우고, 조직확대를 연구했다. 어떻게 폭파, 암살활동을 할것인지도 연구했다.

 

몇달 후, 정평은 다시 제2차회원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독립대만회"는 인원수가 20여명에 달하게 된다.

 

조직이 확대되자, 활동경비는 문제되지 않았다. "독립대만회"의 대만독립분자들은 혈기가 넘쳤따. 여러번 토론을 거친 후에 그들은 대만에서 몇 가지 행동을 벌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장경국 및 국민당고관을 암살하고, 군무기창고를 탈취하고, 장갑차부대를 점령하며, 그후에 장갑차부대를 주력으로 하여, 타이페이의 주요거점을 공격하고, 장개석정권을 타도하며, 전세계에 대만의 독립건국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정평은 자기의 계획을 비밀채널을 통하여 일본의 사명에게 전달한다. 사명은 너무나 모험적이어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너무 모험하지 말라고 말한다. 대만독립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실제에 부합되어야 하며, 자신의 힘에 맞게 진행하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암살류의 일은 하되, 무장폭동은 시기가 성숙된 후에 다시 진행하라고 하였다.

 

사명은 정평이 너무 모험적으로 나가서, 대만독립조직에 손실을 끼칠까 우려하여, 특별히 3개의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조를 각각 따로 움직이게 하였다. 다만, 정평은 사명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장폭동의 시기가 오지 않으면 자신이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한편으로 자금을 모집하고, 다른 한편으로 심복인 황곤능등에게 무기를 구하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여러 사람을 대만 각지로 보내어 "대만독립만세"라는 표어를 쓰도록 하였다.

 

정평등 대만독립분자들이 막 일을 벌이고자 할 때, 대만조사국의 특수요원들이 치고 들어왔다. 그들은 먼저 정평의 친구이자 남투현 포리사람인 뇌금동을 포섭한다. 그리하여 정평의 조직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파악한다.

 

1973년 7월 10일부터, 20여명의 대만독립분자중 10여명은 경찰에 자수하고, 나머지는 체포된다. 그리고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들 대만독립분자를 징벌하기 위하여, 장씨부자는 두번에 걸쳐 비밀회의를 개최한다.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할지를 논의했다. 회의에서, 장개석과 장경국은 부하들에게 이 사건을 엄히 처리하도록 지시한다. 우두머리인 정평에게 중형을 내려, 대만독립분자들이 더 이상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따.

 

1974년 4월 11일, 이 사건의 판결이 선고된다. 정평은 언행이 거칠고 목표가 커서 사형을 받는다. 황곤능, 임건중, 홍유화는 무기징역을 받는다. 유진룡등 2명은 10년형을 받고, 경찰에 자수한 대만독립분자들은 형사처벌을 면제받는다.

 

판결선고후, 정평은 불복하여 재심을 요구한다. 1974년 8월 12일, 정평의 재심요구는 거절된다. 8월 13일 새벽, 헌병의 형집행인원은 정평을 감옥에서 끄집어내어, 꽁꽁 묶은 후, 다시 죄수호송차에 실어 타이페이현 신점 안갱의 형장에서 처결한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평은 자신의 과거주장과 행동계획이 얼마나 황당하고, 그의 역량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헌병이 정평의 형을 집행할 때, 그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총소리가 울리면서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또 다른 3건의 대만독립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960년대 요사호사건, 1963년의 소동계사건, 1972년의 사총민사건이 있다. 이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사형선고는 받았지만 집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