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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타이페이: 두개의 고거(故居), 하나의 숙명(宿命)

by 중은우시 2011. 4. 5.

글: 장명(張鳴)

 

타이페이에 가면 두 사람의 고거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전목(錢穆)의 고거이고, 다른 하나는 은해광(殷海光)의 고거이다. 전목의 고거는 양명산의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곁에는 동오대학이 있다. 낮은 언덕 위에 자그마한 2층짜리 건물이며 소서루(素書樓)라고 부른다. 은해광의 고거는 시끄러운 도심에 있다. 대만대학부근의 온주가 18항 16농에 주소를 두고 있으며, 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다. 크지 않은 주택이고, 1층짜리 건물이다. 은해광이 거주했을 때는 지금보다도 더욱 적었다.

 

두 개의 고거는 모두 인기가 있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서 몇 시간을 머무르더라도 다른 방문객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은해광의 고거는 두 번 찾아갔는데, 모두 거의 문앞까지 가서도 주위의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은해광의 고거를 모르고들 있었다. 전목의 고거로 가는 날은 안에서 수리를 하고 있었다. 말로는 행사를 준비한다는데, 안에는 물건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위층의 서재와 침실, 아래층의 거실과 주방은 잘 보이는 편이었다. 간단한 가구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은해광의 고거는 안이 이미 전람관으로 바뀌었고, 곳곳에 사진과 서류복사본이 있다. 가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관리인에 따르면, 고거의 책과 가구는 은해광의 부인이 대만대학에 모두 기증해버렸다고 한다.

 

은해광의 고거를 방문하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은해광이 대만대학으로 간 것은 좀 늦었다. 대만대학의 전신인 타이페이제국대학의 일식 1층집은 이미 분배가 끝나 있었다. 그리하여 원래 경찰초소로 쓰던 곳을 주택으로 개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위치도 막다른 골목의 끝이 되었다. 풍수적으로는 아주 불길한 것이다. 은해광은 선교사집안 출신이어서, 확실한 서구화론자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개의치 않았고, 이사를 들어간 것이다. 탐방후에야 비로소 이런 소문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집은 확실히 대만대학 경비실의 재로를 가지고 만들었다. 그러나 집 자체는 초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은 확실히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넓은 정원이 붙어 있었다. 은해광이 이사를 들어온 후, 이곳에서 '큰 공사'를 벌였다. 스스로 시내를 하나 팠고, 자그마한 흙산도 만들었다. 시냇물은 우공하(愚公河)라고 이름붙이고, 산은 고풍산(孤風山)이라고 이름붙였다. 산 위에는 돌의자와 돌탁자를 놓았다. 그리고는 은부자독서대(殷夫子讀書臺)라고 이름붙인다. 집의 곁에는 시멘트로 연못도 만들어서, 딸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모두 은해광이 직접 심은 것들이다. 지금은 울창하지만, 방문객이 너무 적어서 모기가 많다. 올라가면 금방 모기들의 밥이 된다. 이곳과 비교하자면 전목의 소서루는 훨씬 예쁘고, 훨씬 넓다. 비록 주변의 꽁과 나무는 전목 부부가 심은 것이라고 하지만, 계단을 걸어올라가서 구부러진 길은 숲이 울창하다. 건물 앞에 도착하면 확 트인다. 건물이 크지는 않지만 느낌은 아주 좋았다.

 

은해광은 유명한 자유주의지식분자이다. 자유주의의 맹장이 되기 전에도 그는 확실한 서구화주의자였다. 5.4운동의 아들로, 일생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중국전통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대만에서 찍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커피를 먼저 소개한다. 전목은 정반대였다. 그는 대표적인 문화보수주의자였다. 은해광이 좋아하는 것은 전목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면 분명히 중국차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거소에서의 마지막세월동안 운명은 아주 유사했다. 모두 당국의 탄압을 받아 우울하게 생을 마쳤다.

 

은해광은 대만의 유명한 자유주의잡지 <자유중국>의 주요필진이었다. <자유중국>의 많은 논조는 그의 붓에서 나온 것들이다. 1960년, 대만당국은 이 잡지를 정돈한다. 주편 뇌진이 체포된다. 잡지가 간행중단된 후, 은해광의 힘든 나날이 시작된다. 골목길 입구는 하루종일 정보요원이 지키고 있고, 집을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진다. 1966년이 되어, 당국은 그가 더 이상 교수직에서 청년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를 교육부 교육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대만대학에서는 그를 해임하게 한다. 은해광은 교육부의 임명을 거정한다. 대만대학도 그를 정말 해임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업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출국을 하려고 해도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은해광부인에 따르면, 이 기간동은 은해광은 하루종일 정원에서 땅을 팠다고 한다. 힘든 일을 하면서, 장시간 태양아래에서 일하면서 내심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당연히 이 은해광이 대륙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씨 땅을 파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노동개조농장에서 땅을 팠을 것이다. 장개석의 독재는 그래도 온화한 편이고, 젊잖은 편이다. 결국, 1969년, 은해광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50세때의 일이다. 그는 신의 운명으로 막다른 골목은 불길하다는 민간의 얘기를 입증했다.

 

그런, 풍수가 아주 좋아보이는 소서루에 거주하던 전목은 95세의 고령이 되어 골치가 아파진다. 이 골치거리는 바로 그가 거주하는 집때문이었다. 타이페이시장이 된 천쉬벤은 당시 아직 정권을 잡고 있던 국민당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전목을 눈을 돌린다. 소서루는 공유재산인데, 전목이 장기간 점용하였으니, 공유재산을 침점한 것이라는 것이다. 전목에게 집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사실, 소서루는 당시 장개석이 총통부의 명의로 지은 것이다. 그저 나중에 타이페이시에 넘겨서 관리시킨 것일 뿐이다. 공유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천수이벤이 따질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등휘가 총통으로 있었고, 이 노인을 일찌감치 아무 일에도 흥미가 없었다. 천수이벤이 튀어나와서 설치지만, 이등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지가 난감해진 노인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십년을 살아왔던 집에서 쫓겨났다. 심정이 좋을 리가 없다. 그해(1990년) 6월 1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은해광의 마지막 몇년은 자주 자유주의자들이 대륙에서도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것을 탄식했다.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는 것이다. 성실한 문화보수주의자도 운명이 좋지는 않았다. 두 명의 문화적인 취향이 전혀 상반된 인물은 정치적인 태도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정치력의 앞에서 마지막 운명은 아주 비슷했다. 띄워줄 때는 하늘을 오르는 것같지만, 억압할 때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같다. 좋아할 때는 향기나는 떡이지만, 싫어지면 냄새나는 분뇨가 된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문화와 문화인은 얼마나 유명하든지 따지지 않고 그저 놀이개가 된다. 더 데리고 놀 수 없으면 진흙땅에 버리고 밟아버린다. 전목의 서거2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석상에서 마잉주는 이렇게 보증했다. 절대로 전목을 쫓아내는 일과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그러나 그가 보증할 수 있는 일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