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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Galen 장군: 손중산의 수석군사고문

by 중은우시 2009. 4. 21.

글: 문사박람(文史博覽) 2009년 제2기

 

1924년 손중산은 소련정부에 서신을 보내어, 군사고문을 파견해서 그가 군대를 조직하는 것을 도와주고 전투를 지휘해달라고 요청한다. 소련정부는 군사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Vasily Konstantinovich Blyukher)를 선정한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1890년 12월 1일생으로, 제1차세계대전기간동안 중상을 입어 두번이나 야전병원으로 후송된 바 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왼쪽다리가 1.5센티미터 짧아졌다. 길을 걸을 때 몸이 흔들면서 걸음으로써 자신이 절름발이라는 것을 감추고자 했다. 1916년 6월, 그는 카산의 한 공장에서 볼세비키에 가입한다. 1921년, 성공적으로 소련의 극동지구전투를 지휘하여, 중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게 된다.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여권을 만들 때, 블류헤르는 가명을 짓는데, 그것이 바로 Galen(한자로는 加倫임. 그리하여 중국어로는 加倫將軍이라 부름)이다. 그의 처의 이름인 갈리아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그의 아들인 카린에게서 따왔다고도 한다. 블류헤르는 중국에 도착한 후 손중산으로부터 중시받으며, 중임을 맡는다.

 

블류헤르는 도착하자마자 국민혁명군사위원회를 만들 것을 건의한다. 비록 강렬한 반대에 부닥치지만, 이 건의는 그래도 시행된다. 블류헤르는 당대표제도와 정치공작제도를 군대와 군사학교에 보급시킨다.

 

블류헤르가 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자신의 정보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기관을 통하여, 그는 진형명이 광주혁명당 사람들을 숙청하려는 것을 알아낸다. 블류헤르는 손중산에게 먼저 손을 써서 혜주를 포위하여 점령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다. 그러나, 장개석과 다른 국민당사람들은 그가 중국의 사정을 잘 모른다고 조소한다. 블류헤르는 먼저 우회적이고 봉쇄적인 방식으로 진형명에 대응하자고 제안하고, 그가 광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1925년 2월, 국민혁명군은 혜주의 외곽에서 중대한 승리를 거둔다. 이어서 다시 중공당원으로 조성된 연대가 선봉이 되어, 그해 10월 30일 혜주를 함락시킨다. 광동혁명근거지는 공고해진다. 이로 인하여 Galen의 이름은 하늘을 찌른다. 이후 그가 내놓은 건의는 모두 받아들여지게 된다.

 

광동혁명정부가 북벌을 결정한 후, Galen장군은 이번 원정계획의 제정과 집행에 참가한다. 적아의 실력차이가 현저한 상황하에서 블류헤르는 각개격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양호(호남,호북)"을 공격하고, 그 후에 강서, 복건, 안휘, 강소, 절강등 각성의 적군을 해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걱정했던 정치형세는 군사국면의 변화와 더불어 찾아온다. 그는 비밀리에 중공광동구위에 물어본다. "북벌중에 장개석을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힘을 약화시켜야 할 것인가?" 주은래등은 즉시 상해의 중공중앙에 보고한다. 결과적으로 장국도를 대표로 하는 당중앙에서는 뭐가뭔지 모를 대답을 보내온다: "장개석을 도우면서, 장개석을 도우지 말라" 코민테른과 중공중앙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어, 블류헤르는 할 수 없이 계속 북벌군총사령관 장개석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4.12정변"을 일으킨다. 7월, 왕정위는 "7.15반혁명정변"을 일으킨다. 소련고문은 모조리 해임된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무장의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Galen장군은 비록 병치료를 핑계로 잠시 무한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무장의거계획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섭정(葉挺)이 이끌 수 있는 폭동인원은 3000여명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룡(賀龍)의 부대를 끌어들이는 일을 할 때, Galen장군은 자신의 관계를 활용하여, 월군장군 장발규(張發奎)를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 남창의거의 전날, 소련정부는 공개적으로 개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고문에게 즉시 귀국하도록 명령한다. Galen도 할 수 없이 외항선선원으로 변장하고 장강을 따라 비밀리에 상해로 내려가서, 오송구에서 출국하여 소련으로 되돌아간다.

 

블류헤르는 극동의 군사정치형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소련으로 돌아간 후, 그는 극동특별집단군총사령관에 임명된다.

 

1935년, 소련홍군은 군계급제도를 부활시키고, 블류헤르는 첫번째로 원수(元帥) 계급을 달게된 5명중 1명이 된다. 나머지 4사람은 Kliment Voroshilov, Aleksander Yegorov, Semyon Budyonny와 Mikhail Tukhachevsky이다.

 

1937년, 소련에서는 대숙청이 시작된다. 그해 5월말, 블류헤르는 돌연 모스크바로 소환된다. 그는 많은 옛 전우들이 체포된 것을 본다. 그는 그들이 모두 적이거나 간첩이라고 믿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31일에 막 총정치부주임인 카마르니크와 만났었는데, 다음날 그가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투하체프스키 원수등이 먼저 파시스트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블류헤르는 명령에 따아 그 재판의 재판장이 된다. 이는 정직하기로 유명한 그에게는 아주 큰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총정치부주임인 옛친구에게 불평을 했다. "나는 그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사건기록에 따르면, 재판장인 그는 재판내내 피고인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무언 그 자체는 바로 그의 정치적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가 극동으로 되돌아간 후, 안전부서의 주목을 받는다.

 

블류헤르가 극동으로 되돌아갈 때, 대숙청노선을 충실히 집행하는 메케리스와 함께 간다. 이 사람은 당시 여러번 승진하여 홍군의 총정치부주임에 오른 인물이다. 메케리스와 그의 부하들이 극동집단군에서 마음대로 설치고 다닐 때, 변경의 국면은 아주 긴장된다. 1938년 7월말, 일본군은 "소련-만주국경"의 장고봉(張鼓峰, 길림 훈춘 변경)에서 도발을 해온다. 블류헤르는 소련군을 지휘하여 반격한다. 그리고 8월 2일 전투지구로 날아간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메케리스는 블류헤르에 대한 나쁜 자료를 수집했다. 심지어 블류헤르가 하상호수(장고봉)의 승리한 진상도 그에 의하여 왜곡되고, 오히려 그를 모함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억지로 블류케르가 잘못 내린 명령때문에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블류헤르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심지어 블류헤르가 흰색 군복을 입고 있는 것도 일부러 적에게 사령부의 위치를 노출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8월 12일, 블류헤르는 모스크바로 소환된다. 이때,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가까운 사람들도 모두 그를 피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구렁텅이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10월 22일, 그는 집에서 끌려간다. 1939년 3월 10일, 소련최고법원 군사재판정은 그에게 총살형과 재산몰수를 선고한다. 군대감옥에서 블류헤르를 보았던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블류헤르의 한쪽 눈알은 맞아서 빠져나왔다. 그는 계속하여 "이 나쁜 놈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친지들까지 연루되었다.

 

블류헤르가 체포된 때는 마침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때였다. 장개석은 소련에 다시 블류헤르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블루헤르가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 진상을 들은 후에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20년후인 1956년 3월 12일, 소련군사검찰원은 블류헤르의 행동에는 범죄요소가 없으며, 그에 대해 기소한 사건을 중지한다고 선언한다.

 

섭검영(葉劍英) 원수는 1957년에 소련을 방문하면서 극동을 다시 방문했다. 그는 블류헤르의 지휘하에 참가했던 1929년의 동계훈련을 회고하면서 시를 하나 썼다.

 

불견가륜삼십년(不見加倫三十年)

동정북벌비지원(東征北伐費支援)

아래백력다회구(我來伯力多懷舊)

욕도홍하인조흔(欲到紅河認爪痕)

 

중국인의 마음 속에는 "가륜장군"이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