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내기(章乃器): 모택동과 장개석이 모두 인정한 민주당파인사

중은우시 2009. 6. 22. 18:06

글: 노위병(路衛兵)

 

중국현대사상의 전설적인 인물을 얘기하자면, 장내기도 분명 그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비록 중전(中專, 전문학교)의 학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는 경제를 잘 알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고, 그는 자신의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서 대의를 중시했다: 그는 두 개의 유명한 민주정당을 창립하는데 참가한다. 구국회(救國會)와 민주건국회(民主建國會)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치적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이 두 개의 정당을 차례로 떠난다. 장개석은 그의 재능을 아껴, 그에게 관직과 봉록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한다; 모택동도 그의 학문이 광범위함을 인정하여 전보를 보내어 국시를 함께 논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즉시 상경하기도 했다.

 

장내기(1897-1977)는 절강성 청전 사람이다. 16세때 절강성립 갑종상업학교에서 공부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은행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는 뛰어난 업무실력을 보인다. 1932년 3월, 그는 은행계 인사와 공동으로 학술단체인 중국흥신사(中國興信社)를 조직한다. 6월에 그는 다시 스스로 중국에서 최초의 신용조사기관인 중국정신소(中國征信所)를 만든다. 그는 스스로 동사장이 되고, 업무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4개의 외자계기관을 문닫게 만든다.

 

장내기는 경제이론에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외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35년 장내기는 상해광화대학과 호강대학에서 동시에 경제학교수로 초빙된다. 그는 '금융'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아주 생동감있는 비유를 썼다: "금(金)이라는 것은 단단하고 고정된 물질이다. 융(融)이라는 것은 녹여서 유통시킨다는 의미이다. 금이 어떻게 융화되는가? 그것은 바로 신용이라는 불에 의지해서 녹는 것이다. 다만 불이 너무 세면 금을 완전히 녹여버리게 된다. 반대로 불이 꺼지게 되면, 융화된 금은 다시 냉각되고 동결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신용이 과도하게 팽창하는 것이고 공황현상이다. 즉 자산의 동결이다." 이처럼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장내기는 뛰어난 경제학자일 뿐아니라, 시국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1936년 5월, 그는 송경령, 하향능, 심균유등과 상해에서 전국각계구국연합회를 조직한다. 각 당파간에 군사적 충돌을 중지하고 공동구국강령을 제정하자고 호소했다. 장내기는 대량의 선언문을 쓰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그는 선언문전문가라는 별명을 얻는다. "칠군자사건"이후, 장내기는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그는 옥중에서 10만자에 달하는 <<구망국운동론>>을 집필한다. 여기서 그는 "중국필망론" "3년망국론"등의 논조를 비판하고, "과학항전필승론"을 내놓는다. 여기서 민중의 역량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항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글에서 일부 관점은 나중에 모택동이 쓴 <<지구론을 논하다>>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이를 볼 때 그의 정치적 견해가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장개석은 장내기의 재능과 학식을 높이 평가했다. 여러번 장내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장개석의 심복인 진성(陳誠)과 장내기는 집안대대로 교분이 있을 뿐아니라 동문이었다. 그래서 장개석은 진성으로 하여금 장내기를 설득하여 국민당에 입당시키도록 하라고 한다. 그런데, 장내기는 아주 재미있게 답변했다: "나는 삼민주의의 거사(居士)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굳이 출가하여 중이 될 필요는 없다. 시실 거사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것은 중보다도 훨씬 경건할 때가 있다. 나는 개고리를 몰래 훔쳐먹는 중은 보았지만, 말다르고 행동다른 거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이 말에 진성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난감한 입장이 되었다. 나중에 장개석은 다시 장내기에게 관직을 주고 싶다고 한다. 먼저 그를 "사련총처의 전문위원"으로 삼겠다고 했지만, 장내기는 거절하고 취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그를 섬서나 감숙의 재정청장의 직위를 맡으라고 권하지만, 그는 거절해버린다. 장개석은 어쩔 수가 없게 되자 진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내기를 쓰고 싶지만, 그가 나를 위해서는 일하지 않겠다는군."

 

장내기는 장개석의 관직을 거절했을 뿐아니라, 장개석의 여러 조치에 대하여 글을 써서 공격한 바 있다. <<사년의 청산>>이라는 글에서 장내기는 장개석의 "양외필선안내(壤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정책에 대하여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밖으로는 물리치지도 못하고, 안으로는 안정시키지도 못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다시는 자살의 수단으로 민족의 원기를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장내기는 공산당의 주장에 대하여 찬동을 표시했다. 은행을 경영하는 기간동안, 그는 여러번 공산당의 지하조직에게 혁명경비를 제공해주고, 측면에서 혁명사업을 지원했다. 장내기는 주은래와 교분이 괜찮았다. 1938년 장내기는 이종인(李宗仁)의 요청에 따라 안휘성 재정청장을 맡는데, 그때 주은래의 부탁으로, 신사군에 대량의 원조를 제공한다. 그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신사군이 군수물자를 구매하는데 도와주고, 약품도 대량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대담하게 성정부에 매월 신사군에 3만은원을 지원하겠다고 보고한다. 이는 당시에 어떤 정부도 하지 못하던 일이다. 장내기는 감히 이를 해냈다. 그러다가 결국은 직위에서 파면당한다. 이를 볼 때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일처리를 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해버리는 혁명적 담량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양ㅅ1945년 장내기는 황염배, 손계맹등과 함께 민주건국회를 조직하고, 민주평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시대에 역행하는 조치들은 그의 이런 꿈을 물거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1948년, 모택동은 전통을 보내어 장내기를 부른다. 그에게 상경하여 함께 국시를 논하자고 한 것이다. 장내기는 북경에 도착한 후, 중국인민은행 고문이 되고, 당시 물가와 금융의 안정에 중대한 공헌을 한다.

 

건국후에 장내기는 신중국의 초대 양식부장(糧食部長)에 임명된다. 이 직무는 아주 중대한 것이었다. 신중국이 막 성립되었고, 아직도 도처에서 전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생산활동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 일으켜야 하는 시점이다. 신정부가 당시에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6억인민의 먹는 문제였다. 이는 심각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현실문제였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아주 노골적으로 말한 바 있다: "먹는 문제는 모든 중국정부가 부닥치는 첫번째 문제이다. 지금까지 어느 정부도 제대로 해결한 적이 없다" 이는 확실히 신중국에 대한 우스개라고 할 수 있다. 그 뜻은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신정부는 더 이상 '신(新)' 정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내기는 바로 이런 내외적으로 곤란한 시기에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그는 취임한 후 많은 양식의 통일구매통일판매에 관한 중대한 정책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과학적인 관리를 실행한다. 그는 처음으로 양표제도를 만들어 내고, 금방 양식기업의 결손을 이익으로 바꿔 놓는다. 이를 통하여 인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50년대에 걸쳐 전국의 양식에 잉여가 발생하도록 한다. 장내기가 여러번 모택동과 주은래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모택동은 양식부에 대하여 "후래거상(後來居上)"이라고 칭찬하고 장내기의 업무실적에 만족을 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