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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용굉(容閎): 중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

by 중은우시 2009. 2. 25.

 

 

 

글: 주해용굉여유미유동연구회

 

2009년은 미중수교 30주년이다. 근원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과 미국이 교류를 시작한 것은 1872년에 있은 청나라 유동(幼童)의 미국유학이다. 그 배후에는 주해 출신의 한 인물, 용굉의 심혈이 응축되어 있다. 용굉, 그리고 그가 제창한 유동의 미국유학, 그리고 미국에 처음 설립한 "중국문화강좌" 및 중문도서관은 중서문화교류에 하나의 교량역할을 했고, 미중의 관계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유학 8년, 미국대학을 졸업한 첫번째 중국인이 되다.

 

용굉(1828-1912)은 자가 달맹(達萌)이고 호가 순보(純甫)이며, 광동성 향산현 남병향 사람(지금의 주해 남병촌)이다. 1835년, 7살된 용굉은 곽사립(郭士立, Karl Friedrich Gutzlaff, 1803-1851) 부인이 만든 Morrison Academy(瑪禮遜學校)에서 들어갔다. 1840년, 예일대학의 신학박사인 Samuel Brown 목사가 와서 학교업무를 맡았다. 1842년, 모리슨학교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옮기고, 용굉도 학교를 따라 옮긴다. 1847년, 19살된 용굉은 브라운 목사와 함께 미국으로 공부를 하기 위하여 떠난다. 그와 함께 갔던 사람은 황관(黃寬), 황승(黃勝)의 두 명이 더 있었다. 지금, 이 역사는 이미 북경의 중화세기단의 청동용도에 새겨져 있다.

 

1848년 가을, 황승은 건강문제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1849년말, 용굉과 황관은 Monson Academy에서의 공부를 마친다. 당시, 떠나기 전에 받았던 자금지원이 기한이 도래하여, 계속 공부하려면 다시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따. 황관은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여, 영국의 에딘버러대학으로 가서 의학을 공부한다. 용굉은 브라운 목사의 모교인 예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곤경이 컸다. 이때 미국에서 한 사람이 용굉에게 자금지원을 해주겠다고 한다. 다만, 조건은 졸업후에 귀국하여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굉은 "언젠가 공부를 마치면 어떤 분야이든간에, 중국에 유익한 것을 선택하여 하면 된다. 전도라는 것도 괜찮으니 중국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1850년, 용굉은 자신의 노력으로 꿈에도 그리던 예일대학에 입학한다. 그동안 용굉은 Savounah 부부의 동부양행(同孚洋行)의 자금지원을 받는 오에,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다. 학교내에서 식당일도 하고, 사서일도 했다. 1854년, 유학 7년만에 용굉은 예일대학의 98명의 문학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중 한 명이 된다. 그리고 미국국적도 취득한다. 얼마후 26세된 용굉은 "서방의 학술을 중국에 전하고, 중국이 날로 문명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154일간의 여정을 거쳐 중국으로 귀국한다.

 

18년간의 노력, 어린아이를 미국에 유학보내도록 제창하다

 

귀국한 후 용굉은 미국주중국공사인 PeterParker(1804-1888)의 서기, 홍콩최고법원 통역, 변호사, 양행직원등의 직업을 가진다. 그는 계속 직장을 바꾸었다. 목적은 더 많은 중국과 외국의 상류층인사들과 교류하여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1859년, 용굉은 태평천국을 통하여 희망를 찾으려고 하여, "칠사(七事)"를 건의하여, 미국교육을 참고하여 '각급학교교육제도'를 반포하고, 완전히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갖추자고 한 바 있다. 1863년 가을, 이선란의 추천을 받아, 증국번은 안경(安慶)에서 용굉을 만난다. 1865년, 용굉은 성공적으로 증국번을 대리하여 외국으로 가서 기계를 구매한다. 그리고 그 기기들로 공장을 만드는데, 나중에 "강남제조총국"의 시초가 된다.

 

1868년, 용굉은 정일창(丁日昌)에게 "조진사칙(條陳四則)"을 건의한다. 이를 통하여, "정부는 우수한 청년을 선발하여 파견하여 이들을 서양에 보내어 유학하게 하고,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0년, 천진교안을 처리하면서, 정일창의 건의에 따라, 증국번, 이홍장등은 용굉의 유학계획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연명으로 청나라정부에 "총명한 어린아이를 선발하여, 서방 각국의 서원에서 군정, 선정, 보산, 제조의 여러 학문을 배우도록 하여" 스스로 강국이 되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1871년, 청나라정부는 그 건의를 받아들이고, 용굉을 보내어 항해에서 유동출양이업국(幼童出洋肄業局)을 만든다. 그리고 서양유학을 보낼 어린아이의 선발을 주재한다. 당시 거의 모든 집에서는 자기의 아이를 도대체 어디인지도 모르는 먼 나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용굉은 당시 영국인의 관할하에 있는 홍콩과 포르투갈인들의 관할하에 있는 마카오로 가고, 그의 고향인 남병에서 서양유학할 어린이를 뽑는다. 제1차 30명의 서양유학학생은 금방 모두 모았다. 그리고 1872년(동치11년 칠월초팔일)에 미국으로 보낸다. 이후 1873년, 1874년, 1875년, 차례로 3차에 걸쳐 각각 30명의 어린이를 미국으로 유학보낸다.

 

처음에 미국에 도착한 어린이들이 영어환경과 미국의 생활방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용굉은 미국측의 건의에 따라, 어린이들을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의 수십개 미국가정에 나누어 살게 했다. 그는 이로 인하여 중국 주미국부공사 및 유동출양국의 부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중국유학생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도선유동전부태서이업장정>>에 따라, 어린이들의 미국유학기간은 15년이었다. 완고파의 저지 및 미국에서의 반중국정서로 인하여, 미국유학한 어린이들은 1881년 3차에 나누어 중도에 귀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유학계획은 중도에 요절한 것이다. 이들 어린이들중 첨천우(詹天佑)와 구양갱(歐陽)만은 대학까지 졸업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에 들어가려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중국근대 정치, 경제, 교육, 과기, 군사, 광산, 철로, 전보, 우정 및 해군등의 분야에서 중견인물로 성장한다. 예를 들어 중국철로의 아버지 첨천우, 중화민국 초임내각총리 당소의(唐紹儀), 청화학교(청화대학전신) 초임교장 당국안(唐國安)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바뀌는 중국에서 많은 개척적인 일들을 했다.

 

중국문화를 서양에 알리고, 공자학원을 개설하다

 

용굉은 어린이들을 서양유학시키는 동시에, 중화문명을 세계에 알리는데도 앞장섰다.

 

1877년 2월, 용굉은 예일대학 도서관 관장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일단 예일대학이 중국문화강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면 나는 언제든지 나 개인의 중문도서를 귀 도서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힌다. 1878년, 그의 추천과 운영으로 예일대학은 Samuel Wells Williams(衛三畏) 박사를 초청하여 첫번째 "중국언어문화강좌"교수를 맡긴다. 미국대학역사상 첫번째 공자학원인 "중국문화강좌"가 이 곳에 개설된 것이다. 5월 29일, 용굉은 1237권의 중국서적을 예일도서관에 기증한다. 이들 도서는 미국의 첫번재 중문도서관이다. 예일대학 중문도서관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예일대학 도서관이 나중에 세계적인 한학연구자료를 가진 도서관으로 성장하는데 기초를 닦았다.

 

1876년, 예일대학은 용굉의 미중문화교류에서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그에게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