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서생은 왜 제왕이 될 수 없는가?

중은우시 2009. 1. 14. 00:56

글: 냉성금(冷成金)

 

이런 말이 있다. 중국고대역사상 "남방에는 문인이 나고, 북방에는 황제가 난다"

 

맞다. 굴원이래로 시인, 문학가, 화가는 강남에서 많이 났다. 강남재자(江南才子)는 천하에 유명하다. 사실, 고대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대작가는 대부분 남쪽에서 나왔다. 현대문학사의 노신, 곽말약, 모순, 파금, 노사, 조우의 6대가 및 유명작가들 중에서 절대다수는 남방출신이다.

 

유명한 봉건황제를 보면 더욱 재미있다. 절대다수는 북방에서 나왔다. 진시황부터 시작해보면, 한고조 유방은 패현 풍읍 사람으로 현재의 강소성 패현이다; 동한의 개국황제 유수는 남양 채양 사람이다, 지금의 호북성 조양현내이다, 비록 남북이 만나는 지역에 있었지만, 사람의 관념상으로는 북방이라고 할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은 하남 남양의 군관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나라의 징기스칸과 원세조 쿠빌라이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호주 종리현 사람이다,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에 속한다, 관념상으로는 북방인이다; 중국봉건시대의 최후왕조인 청왕조는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통치자가 모두 머나먼 북방에서 왔다.

 

상술한 황제는 중국의 주요한 왕조의 개국황제이다. 기타 전란시기에 탄생한 주마등같은 제왕들을 보더라도 직접 북방에서 났거나 조상 몇대가 북방이다. 결론적으로 절대다수는 북방인이다. 그리고 조상이 거주했던 곳은 비교적 접중되어 있다. 대부분이 운하 양안을 따라서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풍수와는 다르다. 지역적 특색으로 황제가 난 것인가? 사실, 이것은 보는 바에 따라다르다. 만일 풍수로 얘기한다면 봉건미신적인 것이다. 그러니, 풍수와는 무관하다; 다만 광의적으로 풍수를 이해한다면 풍수를 일종의 인문지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일부 지연정치의 색채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풍수와 관련이 있다. 고대사회에서 북방은 일찍 개발되었고, 문화도 조숙했다. 사회제도, 종법관념이 남방보다 상대적으로 엄밀하고, 발달되었고, 성숙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기간동안 북방은 정치중심이면서 경제중심이었다. 게다가 북방인은 싸움도 잘했다. 그리하여 왕조가 바뀌는 사건은 일반적으로 북방에서 일어났다. 북방은 이로 인하여 황제를 많이 배출했다. 이와 반대로, 남방은 사회통치, 종법통치, 사상통치에 있어서 모두 북방보다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사상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활발했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상대적으로 느슨한 정치환경이어서 대작가가 나오기 쉽고, 대작품이 나오기 쉽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은 공자가 말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이다.8글자밖에 안된다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 안에는 만고불변의 심오한 도리를 내포하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을 표면적으로 보면, 그 뜻이 인후한 사람은 고산준령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강불계곡물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두가지 지혜의 유형을 얘기한 것이다. 일종은 인자, 일종은 지자이다. 인자는 지혜가 고산준령과 같이 두텁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자는 강물계곡물처럼 움직이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추정해보면, 강물, 호수가 많은 지방에서는 지자를 낳는 자연환경이고, 고산준령이 있는 곳에서는 인자를 낳는 자연환경이다. 비록 현대과학이라고 하더라도 지리환경이 사람의 성격, 지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자는 정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지자는 문학예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보기에 남방에 문인이 많이 나고, 북방에 황제가 많이 난 것은 사회방면의 필연성뿐아니라, 지리방면의 필연성도 있었던 것이다.

 

인자와 지자는 두가지 지계유형으로 고하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인과 제왕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사회역할이다. 그 작용으로 보자면 실제로 고하의 구분이 없다. 단지 사람들은 쉽게 제왕은 영화부귀를 누리고 생사여탈권을 쥔다는 것은 보지만, 문인이 무면지왕으로 사회정신을 주재한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학자서생 혹은 문인아사는 제왕과는 맞지 않으며, 문인서생은 절대로 개국황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인서생이 배우는 것은 성현의 도로서 치국을 위한 것이지, 개국을 위한 것은 아니다. 현인의 도는 사람들에게 수신양성을 가리키지, 반란을 일으키라고 가르키지 않는다.

 

둘째, 문인서생으로 대표되는 도덕이상은 영원히 사회현실의 전면에 치중한다. 그저 영우너히 현실의 전면에서 사회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애석해하고, 개탄한다. 반란을 부르짖으며 백골을 쌓아서 새로운 왕조와 궁전을 만드는데 익숙치 않다.

 

셋째, 서생문인은 서재에 머문다. 두 귀를 성현의 가르침을 듣는데 집중하여 사회에서의 단련이 결핍되었다. 그러므로 개국황제와 같이 반드시 갖추어야할 야심, 세리(勢利), 궤사(詭詐), 임기응변, 노련하고 매서움, 무뢰, 무치, 악독, 양심상실등 황제의 소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넷째, 중국역대는 학자와 황제를 분리하고, 문이과 관리를 분리하는 나라법도였다. 학자문인은 황제가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리를 지내더라도 왕왕 문인학자의 품격을 잃으면 관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그들의 도덕이상이었다. 학자들에게는 관리의 도리가 전부였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보충하자면, 문인학자는 고대사회에서 생활지위가 낮지 않았다. 그리하여 먼저 반란을 부추기는 것은 왕왕 문인서생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중국고대사회에서는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진정한 인덕과 재지를 갖춘 선비는 개국황제가 되지 못한다. 개국황제가 되는 사람은 대부분 이 두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건달, 하나는 호족. 아마도 그 이유는 건달은 거리낌이 없어서이고, 호족은 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다보니, 정말 선비들을 위하여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