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역사추리: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역사적 사실인가?

중은우시 2007. 12. 25. 13:22

 

동한(東漢) 말년에 조정은 부패하고 해마다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졌다. 유비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였고, 관우와 장비도 유비와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 의기가 투합한 세 사람은 장비집 뒤에 있는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었다. 당시는 마침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서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장비는 청우백마(靑牛白馬)를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세 사람은 향을 사르고 절을 한 후 하늘과 땅에 고하였다. 나이에 따라 성이 다른 의형제를 맺었다. 유비가 나이가 많아 큰 형이 되고, 관우가 둘째가 되었으며, 장비가 가장 나이가 어려 동생이 되었다. 이후 30여년간, 세 사람은 비바람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간담상조하면서 마침내 촉한이라는 나라를 일구어 냈다. 이것이 바로 도원결의이다.

 

위 내용은 <<삼국연의>>의 제1회에 나오는 내용이고, 수백년동안 사람들이 즐겨 읽은 내용이다. 나중에 중국사회에서 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의형제를 맺는 풍속이 생겨나고, "의결금란(義結金蘭)"이라는 맹세어에는 도원결의애서 했다는 두 마디 말을 절대 빠뜨리지 않았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날 것을 바라지는 않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원할 뿐이다" 이로써 볼 때, 유비, 관우, 장비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는 형제의 우의를 맺었다는 것은 중국인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상 정말로 도원결의가 있었던가? <<삼국연의>>에는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것을 "형을 찾아간다"고 하였고, 이는 "도원삼결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에게 있어서 반드시 역사적 사실만을 근거로 쓰지는 않는다. 하물며 70만자에 이르는 <<삼국연의>>는 "칠실삼허(七實三虛, 70%는 사실이고, 30%는 허구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도원결의"는 사실에 속하는가 허구에 속하는가?

 

첫째, 어떤 사람이 관우의 생몰연대에 대하여 고증한 바가 있다. 그리고, 관우의 나이가 유비보다 많으므로, 만일 진짜 도원결의가 있었고 나이순으로 의형제를 정했다면, 관우가 큰형이 되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관우는 건안24년(219년)에 사망하였고,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명확하다. 원나라때의 호기(胡琦)라는 학자가 관우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고증한 바 있는데, 관우는 개략 한나라 연희2년(15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고, 유비보다 2살이 많았다는 것이다.

 

청나라 강희제때, 어떤 사람이 관우의 고향인 해주(解州,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에서 우물을 파다가, 관우할아버지의 묘비를 발견했는데, 그 곳에 관우의 집안내력이 기재되어 잇었다. 당시 주단(朱旦)이라는 관리가 이를 근거로 <<관후조묘비기>>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관우는 한나라 연희3년(160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중 어느 설에 의하더라도 관우는 유비보다 나이가 많다. <<삼국연의>>의 도원결의에 관한 내용과는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삼국지. 관우전>>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의 고향에서 무리를 끌어모을 때, 관우와 장비는 이미 그의 수하로 들어가 있었다. 유비는 나중에 평원상(平原相)이 되는데, 두 사람과 "침즉동상, 은약형제. 이조인광좌시립종일(寢則同床, 恩若兄弟, 而稠人廣坐侍立終日)"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잠을 잘 대는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가깝기가 형제와 같았다"는 내용은 세 사람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을 표현해주고 아마도 도원결의를 유추해낸 근거가 될지 모르겠지만 형제와 같다는 것은 형제는 아니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우와 장비는 더 많은 시간을 "조인광좌, 시립종일(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에는 시립하여 하루종일 있었다)"는 내용으로 봐서는 오히려 군신관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는 사람을 보내서 그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이때 관우는 이렇게 만한다: "나는 유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다.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다" 이 내용으로 보더라도 관우는 그가 의형인 유비를 위하여 동생으로서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중에 관우가 동오에 의하여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가 여러 신하들에게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하여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하였을 때, 시중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하여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삼국지.유엽전>>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은 군신, 은혜상은 부자관계로 묘사하였고, 의형제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이상의 점에 비추어보면, "도원결의"는 역사적인 근거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전부 믿을 수 없다. 민간에서 도원결의의 전설이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사료에서 "은약형제"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중의 농민반란의 경우에 대비해서 상상을 통하여 도출해 낸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