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상해 이야기

북경의 상해편견, 상해의 북경편견

by 중은우시 2009. 5. 22.

글: 방희(方希)

 

북경사람들은 보통 상해사람들을 무시하고, 상해사람들도 보통 북경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서로 비교해보자면 북경사람들의 편견이 약간 더 심한 것같다.

 

초등학교 3학년때 둘째백부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기차를 타보았다. 함께 갔던 사람들 중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도 좀 있었다. 부모의 직장은 원래 3선건설때 상해에서 옮겨온 곳이었으므로, 상해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나와 함께 갔던 몇몇 부모들도 상해의 원래 공장에서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상해에 있다고 생각했고, 산 속에 있는 작은 도시는 그들이 쫓겨나서 있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해인들은 타향에서도 상해말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그들의 강렬한 고향의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록 현지사람들로부터 백안시당하지만, 그들은 이를 즐긴다. 두 상해 사람이 시내버스를 타면, 먼 거리에서도 상해말로 인사하고 얘기를 한다. 공장지역부근의 시내버스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는 그들이 현지에 융화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현지에서 결혼을 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타향에서 고생하는 나날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나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해는 대상해이다. 경제와 문화에 대한 이중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때 기차에 최소한 이틀밤낮을 타고 있었다. 나는 기차에서의 생활이 미칠 것처럼 좋았다. 바보처럼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기차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바로 다시 기차를 타고 되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하자 다른 아이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시골녀석같으니...

 

사실 기차를 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비록 아침에 기차가 지나가는 농촌풍경은 정말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는 그 몇몇 아이들고 같이 노는 것이 좋았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들과는 간격이 있어, 마음껏 놀아제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십여시간동안 우리는 함께 어울려서 마음껏 놀았다. 사실상 우리의 이번 여행에 어른들은 같이 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잠시 서로간의 편견을 버리고 함께 누가 기차표를 사고, 누가 사람을 찾을 것인지를 상의했는데, 그 모습은 나에게 아주 신선했다. 그래서 성취감도 있었다.

 

그래도 나의 부모는 여러 관계를 찾았고, 기차에 오르고 몇 시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나에게 기름기가 흐르는 향기나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침대칸으로 데려가 주었다. 나는 끝까지 침대칸에 가지 않겠다고 우겼다. 그 몇몇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유혹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나에게 거절당한 그 아주머니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우습다는 표정이었다.

 

상해에 도착하자, 나는 그곳의 사람들이 정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엉망인 물로 그렇게 맛있는 광명표 얼음을 만들어 냈다. 나는 오각장에 있는 누추한 냉음료점포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맛있는 팥빙수를 먹었다. 홍구공원의 곁에서 처음으로 소위 서양음식을 맛보았다. 나중에야 비로소 이러한 서양음식은 전세계에서 상해에만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것은 상해사람들의 철저한 개량을 거친 것이다. 당연히 나는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어느 탁자가 곧 식사를 마칠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가, 그쪽 탁자의 의자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면 즉시 의자에 앉아서 남은 음식을 앞에두고 주문을 하는 것도 경험했다.

 

얘기한다는게 겨우 먹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 정도되는 사람이니까.

 

나는 또한 둘째백모가 불만섞어 말하던 것도 기억한다. 상해는 전국의 몇몇분의 1의 인구밖에 차지하지 않고 있는데, 세금납부는 전국의 6분의 1이나 된다고. 그때는 내가 마침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적소두홍조죽을 먹고 있는 때였다. 나는 상해의 엔진공장 앞에 이런 선명한 구호가 적혀 있던 것도 기억한다: "모터가 한번 움직이면 군중들을 생각한다" 그때는 내가 마침 컵을 들고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에는 상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해의 먹거리에 나는 완전히 정복당했다. 나는 그곳이 천국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은 최고의 식당이었다.

 

몇년후에 다시 상해를 갔다. 이상하게도 가면갈수록 상해가 좋아졌다. 북경에서 거의 거지같이 차려입은 사람도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그러나 상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입는 것도 조금은 체면이 서게 입어야 하고, 입은 것도 가려서 입어야 한다. 아무곳이나 식당에 들어가면 입맛에 맛고 안맞고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아주 정교하고 위생적이다. 그저 그럴 듯한 곳이기만 하면 먹어삼키지 못할 만한 것은 없었다. 이 것은 홍콩에서도 느낀 것이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더라도, 모두 자신의 솜씨는 가지고 있다. 이점에서 북경은 다르다. 한번은 배가 아주 고파서, 북경역 주변에 있는 도삭면집을 들어갔는데, 가장 가는 면발이 새끼손가락만큼 굵었다.

 

상해사람들의 정교함과 계산적인 것은 북경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상해사람들은 서로 도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약속한 것은 세심하게 다 끝낸다. 사람의 신용과 명성은 그들에게 아주 일상적이고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정교함과 계산적인 것은 대등한 환경하에서 서로에게 빚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거의 조폭들의 의리와도 같은 북경어르신들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같다. 상해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분수를 지킨다. 시내버스역에서 질서를 유지해주는 늙은이도 모두 직업적인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존중한다. 홍콩과 상해는 문화혈연적으로 서로 혈연관계가 있다. 이 두 도시와 일본은 어떤 면에서는 기질이 서로 통한다.

 

북경은 크다. 말을 꺼내면 모두 세계를 얘기한다. 상해의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북경에 가서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손님석과 구분한 칸막이에 구멍을 자그마하게 뚫은 다음에 "수비처(收費處, 비용수령하는 곳)"라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는 것이다. 북경은 택시시가도 "처급(處級, 한국으로 하면 계장급)"간부이구나. 내 생각이 이 이야기는 상해사람들이 일부러 북경사람들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낸 말같다. 북경에 가봤는데, 택시에 그렇게 구멍을 뚫고 글을 써놓은 것은 보지 못했다.

 

북경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북경에서는 국가지도자가 나오지만, 상해는 마자(馬仔, 깡패조직의 꼬붕)가 나온다고. 상해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북경에서는 사기꾼이 나오지만, 상해에서는 장사꾼이 나온다고. 사실 이런 사람은 전국 각지 어디에나 있다. 그래도 그들은 이 다툼에 끼어들지 않는다.

 

여러해전에 <<성시계풍>>이라는 책이 있었다. 북경과 상해의 도시문화에 대한 정신분석의 걸작이다. 대량의 자료를 통해서 공정한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작자는 양동평인데, 그는 북경에서 일하는 상해사람이다.

 

오늘 저녁데 돌연 당시 기차를 같이 타고갔던 친구가 생각났다. 알아보니, 그중의 여자아이 하나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상해로 시집가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한 남자아이는 대학에 합격한 다음 여러가지로 노력해서 상해에 갔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남자아이는 바로 그 여자아이의 오빠인데, 십년전에 원래 5.1절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결혼식 전날 디스코텍에 놀러갔다가 다른 사람과 싸움이 붙어서 칼로 두번 찔려서 신부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