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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대 5대 해적

by 중은우시 2008. 11. 21.

글: 환구시보

 

중국에서 해적은 대부분 연해지역의 주민이다. 그들은 해양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약탈활동에 종사했고, 어떤 경우는 관부와 토호에 대항하기도 했다. 그들은 해도(海盜), 해적(海賊), 해구(海寇), 양비(洋匪), 도구(島寇), 녹객(綠客)등으로 불리웠다.

 

손은(孫恩): 해적의 조사(祖師)

 

동진말기, 손은과 노순(盧循)이 해상의거를 주도한다. 398년부터 411년까지, 전후 13년간 근 백만의 해적대군이 장강이남의 광대한 지역을 전전하고, 동해남해의 두 해역을 종횡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해상무장의거는 중국해적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손은의 조상은 원래 오두미교를 믿었다. 나중에 손은의 숙부인 손태(孫泰)는 관청에 의하여 피살된다. 손은은 해상으로 도망쳐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복수를 도모한다. 399년, 손은은 승기를 틈타 회계를 함락시킨다. 그후 무리가 신속히 확대되어 수십만에 이른다. 나중에 소흥, 영파, 주산, 태주, 온주, 남경, 양주등지를 전전한다. 402년, 손은은 전투에 패배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손은, 노순의 해상반란은 "중원해적의 시작"이라고 불리운다.

 

방국진(方國珍): 원말의 영웅

 

방국진은 절동 태주사람이다. 사서에는 "키가 칠척이고 용모가 크고 당당했다. 얼굴은 검은 색이고 몸은 흰색이었으며, 단단하고 강하며 무겁고 용감했다. 힘은 강해서 달리는 말을 쫓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속요에는 "양서청, 출해정(洋嶼靑, 出海精)"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방국진의 의거를 위한 사전준비작업의 역할을 했다. 방국진은 아예 "해정"을 별명으로 삼는다.

 

1348년, 방국진은 해상의거를 일으키고, 절강, 강소일대를 횡행한다. 20여년간 절동의 3군을 장악한다. 세력은 해상에 미쳐서 양곡운송선을 약탈했다. 그는 원나라를 무너뜨리는 무장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방국진은 나중에 주원장에게 귀순하는데,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후에 다시 투항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주원장이 친히 제사를 지내준다.

 

왕직(王直): 공을 세우고도 오히려 피살당하다.

 

캐러비안해적 1에서 캐러비안해적 2까지 해적붐이 일었다. 현실생활에서는 뉴스에서 어쩌다 한두번 들어봤으므로, 현실의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같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것같기도 하다.

 

왕적은 휘주 흡현사람이다. 젊어서 의협심이 있고, 지모가 있었다.

 

왕직은 오랫동안 해외밀수무역에 종사한다. 그는 해상집단의 두령이면서, 해적의 괴수였다. 당시, 강소절강해상의 해적은 무리를 나누어 있었는데, 왕직은 강대한 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해적을 멸한다. 천리 바다를 왕직이 장악해버린다.

 

왕직은 바다를 평정한 공을 내세여 여러번 조정에 글을 올려 해상통상무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오히려 관청수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왕직은 포위를 뚫고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힘을 길러 되돌아온다. 오래지 않아, 왕직은 방대한 무장선단을 이끌고 동남연해로 들어가서 도시를 공략한다. 강소절강은 이로써 크게 흔들리고 관군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명나라조정의 무력소탕작전이 실패하자 수단을 바꾼다. 왕직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아서 왕직을 유인체포하려고 하낟. 왕직은 나중에 조정에 체포되어 참살당한다. 당시 어떤 사람은 왕직이 "위신은 해상에 드높았다. 그의 죄는 없으니 그를 죽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지룡(鄭芝龍): 상,도,관을 겸한 인물

 

정지룡은 민족영웅 정성공의 부친이다. 그는 해상에서 수십년을 싸워왔고, 스스로 "해상대왕"이라고 칭했다. 일찌기 고향을 떠나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어서 해적이 되고, 해상무역도 겸한다. 그는 상인이며 해적이었다. 나중에 해적에서 다시 관리가 된다. 이때는 상인 겸 관리였다. 그와 같이 상인, 해적, 관료의 세가지 신분을 한 몸에 가진 사람은 중국역사상 드문 경우이다.

 

정지룡이 해상활동에 종사한 범위는 아주 넓었다. 해상에서 육지까지, 국내에서 국외까지, 일본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네덜란드인과도 접촉이 있었다. 해적을 할 때, 천척의 배와 10만의 부하를 거느렸다. 명나라왕조에 벼슬을 지낼 때는 각종 해선 만척을 거느렸다. 해선 3천척을 호령할 수 있었으니, 세계역사상 제1의 선박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상업경쟁에서는 장사에 능하여 이익을 많이 취득했다. 그리하여 재산이 국가와 맞먹는 큰 부자가 된다. 명나라말기, 정지룡은 무장선단을 이끌고 해상을 종횡한다. 쇄국정책을 쓰던 명나라조정에 충격을 가하고, 여러번 관병을 무찌르고, 네덜란드식민자들을 무찌른다. 그리고 다른 해적집단을 소탕해서 해양을 통일했고, 동남해에 위맹을 떨친다. 나중에 벼슬을 받고서, 해외무역을 독점한다.

 

장보자(張保仔): 서양배만 약탈하다.

 

장보자는 중국판 해적왕이라고 할 수 있다. 캐러비안의 해적 3에서 주윤발이 연기한 중국계해적인 소풍의 원형이 바로 그이다.

 

장보자의 본명은 장보(張保)이며, 광동성 강문사람이다. 물고기를 잡는 것을 생업으로 했다. 청나라수군의 수탈을 받고, 배도 부서져서 온 식구가 흩어지게 된다. 장보자는 어민으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그는 15세때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았는데, 해적에게 빼앗겼다. 해적은 장보자가 총명하고 기민한 것을 보고, 그를 곁에 둔다. 장보자는 이렇게 하여 해적이 된다.

 

해적두목이 죽은 후, 대권은 장보자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는 홍콩을 근거지로 하여 개간도 하고, 자신을 스스로 "제2의 정성공"이라고 불렀다. 자주 해외화교들과 교류하고 당시에 황량했던 홍콩섬을 흥성시며, 주민이 20여만에 달하게 된다.

 

청나라 가경중엽에 장보재는 대형선박 800척, 소형선박 천척이상, 무리가 수만에 이르고, 주강삼각주와 홍콩의 대서산 일대에서 활약한다. 무리는 신속히 늘어나서 최전성기때는 10만에 이른다.

 

장보자는 중국인을 약탈하지는 않았고, 그의 선박은 홍콩, 마카오등지에서 유럽인의 선박을 주로 빼앗았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았다. 한번은 남해에서 포르투갈선박과 충돌이 발생하는데, 포르투갈배를 전멸시켰다. 그런데 포르투갈배에 실려있는 것이 모두 중국선박에서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개한다. 그리하여 자주 선단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등의 선박을 약탈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장보자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청나라 가경14년(1809년) 구월 십칠일, 장보재는 영국동인도회사 상선을 공격하여 만위안과 아편 두 상자, 화약 두상자등을 약탈한다. 나중에 청나라정부는 영국, 포르투갈의 함대와 연합하여 포위공격한다.

 

나중에 장보자는 청나라에 투항하여 관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