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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안록산(安祿山) 피살의 진상

by 중은우시 2009. 7. 6.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안록산의 죽음은 거의 의문이 없어 보인다. 여러 정사(正史)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황제가 된 후에 눈이 멀고 종기를 앓았으며, 성격이 조급해져서 자주 주변 사람을 때렸다고 한다. 측근인 엄장(嚴庄)과 환관인 이저아(李猪兒)는 가장 많이 두들겨맞은 사람들이다. 안록산의 애첩 단씨(段氏)과 그녀가 낳은 아들 안경은(安慶恩)은 안경은으로 장남 안경서(安慶緖)를 대체하여 후계자로 삼게 하고자 애를 썼다. 안경서는 폐위될 것이 두려웠고, 엄장은 궁중에 변고가 발생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두려웠으며, 이저아는 계속 얻어맞는 것이 두려웠다. 지덕2년(757년) 정월 오일 밤에, 엄장과 안경서는 장막 밖에서 경계를 서고, 이저아는 칼을 들고 들어가서, 안록산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날 밤에 발생한 사건은 <<신당서>>, <<자치통감>>, <<수당연의>>, <<안록산사적>> 및 희극작품인 <<자역(刺逆)>>, <<장생전>>등의 여러 정사, 야사, 잡기, 소설, 희극등에서 똑같이 그리고 있다. 안록산을 찔러죽인 것은 이저아이고, 엄장과 안경서는 밖에서 경계를 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당서>>에는 약간의 다른 흔적이 보인다. 안록산의 죽음은 아무런 잡음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며, 그의 마지막 날 밤에도 한줄기 역사의 의문은 남아 있는 것이다.

 

<<구당서>>를 보면 밖에서 경계를 선 사람에 대하여 말이 약간 다르다: "(안)경서는 집밖에서 서 있고, (엄)장은 칼을 들고 이저아와 함께 (안)록산의 장막내로 들어갔다. (이)저아는 큰 칼로 그(안록산)의 배를 내리쳤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날 밤, 밖에서 경계를 선 사람은 안록산의 장남인 안경서 1인이다. 이날 밤, 안록산의 침실로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칼을 들고 들어간 엄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저아이다. 이것은 <<신당서>>등 사서에서 기록한 다음의 내용과 큰 차이가 있다: "그날 밤, (엄)장, (안)경서는 병기를 가지고 문을 지켰고, (이)저아는 장막으로 들어갔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구당서>>보다 늦게 완성되었따. 이 두 사서는 <<구당서>>에 따르지 않고, 안록산을 암살할 때 경계를 섰던 사람에 대하여 다르게 쓰고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 쓰게 된 근거는 있는 것일까? 있다. 사실 최초에 장막 바깥에서 경계를 선 사람이 안경서와 엄장이라고 한 것은 당나라때 사람인 유여능(劉汝能)의 <<안록산사적>>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엄장, (안)경서는 병기를 들고 장막 밖에 서 있었고, (이)저아는 큰 칼을 들고 장막으로 들어갔고, 칼고 그(안록산)의 배를 내리쳤다. 좌우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유여능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말은 읻을 수 있을까?

 

유여능은 당나라때 생활한 사람이고, 그가 살았던 시기는 "안사의 난"에서 멀지 않다. 일찌기 화음현위를 지냈는데, 화음은 수도에서 가까운 곳이고, 동관에 가깝다. 이곳은 안사의 난으로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지역이다. 그는 안사의 난에 관한 여러가지 소문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안록산사적>>이라는 책을 써서 기록해둔 것이다. 이 사서는 안사의 난으로부터 그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고, 나중에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제1차사료가 된다. 그러나, 유여능의 기록으로 보자면, 그의 관직은 너무 낮아서, 현장인물을 직접 접촉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가 기록한 근거는 항간에서 얘기하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므로 그 중에는 믿을 만한 것도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안록산을 암살하는 날밤에 장막 밖에서 경계를 쓴 사람에 대한 모순된 기록은 아마도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만일 경계를 선 사람이 안경서와 엄장이라면, 안록산을 죽인 것은 분명히 이저아 한 사람이다. 만일 바깥에서 경계를 선 것이 안경서 한 사람이라면, 안록산을 죽인 것이 반드시 이저아이고 엄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말못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안록산이 죽기 전에 했다는 한 마디 말은 마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같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장막을 붙잡고 소리쳤다: 우리 집안에 도적이구나(是我家賊)" <<자치통감>>에는 "분명히 우리 집안의 도적이로다(必我家賊)"이라고 했다고 한다. <<신당서>>에서는 "집안의 도적이구나(是家賊)"이라고 했다고 한다. 최초의 <<안록산사적>>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다: "도적은 엄장이구나(賊由嚴庄)" 이 사료들에서 말하는 '집안의 도적'이라 함은 이저아를 포함하지만, 당연히 엄장도 포함한다. 안록산의 마지막 한마디는 모두 유여능의 '엄장설'을 채택하지 않았다. 확실히 후대의 사가들은 '도적은 엄장이구나'라는 말과 엄장과 안경서는 모두 장막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는 것과 모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사실 유여능의 겉으로 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이 기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엄장이 안록산을 진짜 죽인 사람이 아닐까?

 

<<구당서>>는 당나라가 멸망한지 삼십여년만에 만들어진다. 그 원시자료는 대부분 실록에서 가져왔다. 만일 이 사서의 각도에서 분석한다면, 엄장이 암살을 시행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첫째는 엄장이 안록산암살계획의 총기획자라는 것이다. 그의 동기는 이저아가 맞기 싫어서라는 것보다 훨씬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안록산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의 정치운명과 일가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장이 살해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둘째는 '엄장이 칼을 들고 이저아와 함께 장막안으로 들어갔다"는 글은 엄장이 칼로 찔렀다는 혐의를 짙게 풍기고 있다. 왜냐하면 엄장은 행동대이고 그는 칼을 들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벨 때 쓰지 않으려면 칼을 왜 들고 들어갔겠는가? 셋째는 암살행동은 속전속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입실시에 엄장이 칼을 들고 있었다고 적었지만, 이저아가 칼을 들고 있는지는 적고 있지 않다. 손을 쓰면서 엄장이 굳이 시간을 들여 칼을 다시 이저아에게 넘겨주고 베게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차라리 자신이 직접 손을 쓰는 것이 간편할 것이다.

 

사서에서는 경계를 선 사람의 숫자가 어떻든 간에 일치하여 이저아가 손을 썼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는 마치 안경서와 엄장의 어떤 음모가 끼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에 누가 경계를 서고, 누가 살인행위를 했는지는 그 세 사람이 가장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경서의 입장에서는 부친을 시해하는 것이고, 엄장의 입장에서는 주인을 시해하는 것이다. 모두 고대에는 악명을 만세에 떨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이저아는 환관으로 신분이 비천하여, 암살자로서의 오명을 뒤집어쓰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사건발생후, 안경서, 엄장의 두 사람은 곧바로 겉으로는 안록산이 병사했다고 대외에 발표하면서, 암중으로 이저아가 암살했다고 소문을 냈다. 이렇게 하여 자신들의 명성을 깨끗하게 보전하고자 한 것이다. 유여능이 들었던 소문을 나중에 <<안록산사적>>이라는 책에 기록했는데, 후세의 사가들은 다시 유여능의 책에서 취사선택한 다음, 이저아의 신분과 지위로 보아 안록산을 암살하는데 가장 적임이라고 추단한다.

 

이저아는 원래 거란족의 포로였다. 십여세때부터 안록산을 모셨고, 안록산이 친히 칼을 들고 그를 거세해주었다고 한다. 궁형을 실시할 때 피를 수 말이나 흘려, 거의 죽을 뻔했는데, 여러날 만에 겨우 깨어났다는 것이다. 안록산은 뚱뚱하고 배가 나왔기 때문에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서너명이 그의 배를 들고 있어야 했는데, 이저아는 머리로 배를 받치고서야 비로소 그의 허리띠를 채워줄 수 있었다. 이저아는 거세당한 원한이 깊었고, 생활도 힘든데다가 얻어맞은 원한도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학자들은 이저아가 안록산을 암살한 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복수라고 보았고, 가장 정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막바깥에서 경계를 섰던 사람은 당연히 안경서와 엄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역사의 진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고대사료를 보면, 역사기록에서 모순이 발생하고, 전후가 맞지 않는 경우에는 관련자가 손을 쓴 것이거나, 사료부족, 기록실수 혹은 고의은닉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관들이 한 반란장수의 진실한 역사를 감추어준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다. 손안에 가지고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만으로는 변명이 될 수 없다. <<구당서>>는 암살과정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실수가 있었던 것같지는 않다. 한 사람이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자는 그 날 밤에 장막 밖에서 경계를 섰던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안록산을 죽이고, 나중에 안경서를 끼고서 여러 신하들을 호령했던 엄장이다. 그리고 가련한 이저아는 그저 그를 대신해서 죄명을 뒤집어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