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온정균(溫庭筠): 중국역사상 대리시험의 최고수

by 중은우시 2009. 6. 8.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시험을 치는 사람을 고대에는 "가수(假手)"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도 많고, 고수들도 많다. 그러나, 역사상 최고의 '가수'를 뽑으려면, 아마도 개인의 재능, 학문, 대리시험을 치는 기교, 대리시험의 실적, 지명도 등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평가를 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나라말기의 대시인인 온정균이 아마도 이 방면에서 필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최고수의 지위는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리시험은 아무나 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자신이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 업계에 명함도 내밀기 힘들 것이다. 대리시험을 치는 사람으로써의 우수한지 여부에 대한 유일한 표준은 바로 시험성적인 것이다. 그 자신이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이 업계에 뛰어들 엄두를 못낼 것이다. 온정균은 <<당재자전>>에 수록될 정도이니, 재주는 충분하다.

 

온정(약812-866)은 당나라말기의 인물로, 본명은 기(岐)이고, 자는 비경(飛卿)이며, 태원 기현(祁縣) 사람이다. 매번 시험칠 때마다 한번도 초안을 먼저 잡은 적이 없고, 매 운마다 한번 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온팔음(溫八吟)"이라고 불렀다. 한편 여덟번 팔짱을 껴면 여덟운이 나온다고 하여 "온팔차(溫八叉)"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를 보면 그는 글재주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고, 대리시험인으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리시험계에는 하나의 숨은 규칙이 있다. 매번 대리시험을 칠 때마다 일정한 비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만 해주고 보수가 없다면 아마도 대리시험을 치는 사람들이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대리시험자들이 따라갈 수 없었던 점이라면, 온정균은 대리시험을 모두 스스로 원해서 해주었고, 돈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속되다고 생각하여, 한번도 비용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경지이다. 누가 도움을 구하면 반드시 도와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준다. 이것이 그의 인생관이다. 그의 "구구인(救救人)"이라는 별명도 그렇게 얻은 것이다. 그는 대리시험계의 순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정균은 40세부터 55세까지의 15년동안, 여러번 과거시험에 참가하는데, 계속하여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과거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시험의 여러가지 숨은 규칙에 대하여도 아주 잘 알았다. 시험장의 복잡한 국면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웠다. 당나라때의 과거시험은 상당히 엄격했다. 시험생이 시험장에 들어갈 때, 옷을 벗기고 검색을 했을 뿐아니라, 좌석간에는 칸막이를 했다. 그러므로, 답안지를 전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복잡한 시험장의 상황하에서도 온정균은 대리시험으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온정균은 아주 깔끔하게 잘 해냈다.

 

가장 대단했던 일은 대중9녀(855년)의 과거시험이었다. 당시 북산시랑 심순(沈詢)이 주시험관이었다. 커닝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온정균을 감시하는데 온갖 주의를 다 기울였다. 왜냐하면, 역대의 과거시험 부정행위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니, 온정균이 부정행위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정균만 잘 막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심순은 특별히 자기의 앞에 특별히 하나의 시험좌석을 만들어 온정균이 앉게 하고, 나머지 과거응시생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는 이 문제응시생을 죽어라 감시하겠다고 맹서했다.

 

다음날 과거시험이 시작되었따. 시험장에 특별한 이상징후는 없었다. 온정균은 몸이 불편하다고 느끼고, 답안지를 먼저 제출했다. 심순이 보니, 그는 이미 천자나 되는 글을 써놓았다. 불쌍한 심순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온정균이 시험장 밖에서 몰래 다른 사람들에게 이번에 자신이 8명을 구해주었다고 얘기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시험 한번에 8명을 위하여 대리시험을 치러주다니, 이것은 중국의 대리시험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그가 과거시험장에서 보여준 기교는 감탄할 만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당선종 대중9년의 이번 과거는 문제가 많았다. 시험제목이 사전에 누출되었던 것이다. 온정균이 사전에 시험제목을 손에 넣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하여 어사대가 탄핵을 하여, 시험과 관련된 인사들이 중하게 처벌을 받는다. 시랑 배념은 국자재주가 되고, 낭주 주경복은 두달간 급여를 벌금으로 부과받고, 시험관인 형부랑중 당지는 처주자사로 쫓겨나고, 감찰어사 풍전은 1달급여를 벌금으로 부과받았다.

 

이번 시험 에서 온정균 자신은 다시 낙방한다. 그래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번 낙방하였으므로, 그 자신도 몇번이나 떨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용모가 못생겼을 뿐아니라, 돈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시험관을 돈으로 매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시험관들에게 그를 잘봐달라고 얘기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 자신의 과거시험에서의 여러가지 나쁜 명성도 있고 하여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후세인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온정균이 왜 대리시험을 기꺼이 보아주었을까? 일부 사람들은 그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학문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람들은 그저 겉모습만 보고 평가한 것이다. 그의 심층적인 원인은 바로 과거에 여러번 응시해도 계속 떨어졌던 온정균은 과거시험의 흑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에 대한 반역심리가 나타났다. 그는 대리시험이라는 것을 통하여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히고 싶었다. 이렇게 한 유일한 의도는 바로 만악의 근원인 과거시험제도를 멸시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온정균의 이런 무언의 선전포고는 중대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했을 뿐아니라,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욕까지 얻어먹게 된다. 그는 당선종이 감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지만, 일생동안 겨우 현위(縣尉), 국자조교(國子助敎)와 같은 보잘 것없는 관직을 지냈을 뿐이다. 그러나, 동쪽이 밝지 않으면 서쪽이 밝은 법이다. 관료로서는 불행하였고, 생활도 어려웠지만, 온정균의 재능을 억압하지는 못했다. 그의 시사는 정교하고 화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화간파(花間派)의 중요한 인물이 된다. 세상에서는 그를 화간비조(花間鼻祖)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