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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중종 사망의 수수께끼: 처와 딸이 독살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0. 16.

글: 몽만(蒙曼)

 

무측천의 철권통치를 끝낸 후 당현종의 개원성세(開元盛世)가 도래하기 까지의 팔,구년간은 상층통치부가 동요하던 시대였다. 평범한 황제인 당중종 이현은 전형적인 "현부양부(賢夫良父)"였다. 후궁중 위후가 권력을 남용하도록 내버려뒀고, 안락공주를 너무 귀여워해서 버릇없게 만들었다. 그는 유명한 '화사황제(和事皇帝)'였다. 그의 통치하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지도 않았고, 백성이 핍박받아 반란을 일으킬 정도에 이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저 멍청한 천자로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경룡4년 육월, 그는 돌연 사망한다. 항간에는 그가 위후가 사람을 시켜 보낸 떡을 먹은 후에 기이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정말 자기의 처에게 독살당했는가?

 

당중종은 먼저 현부양부였다. 그의 현량은 유배때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684년 이월, 막 36일간 황제를 지냈던 당중종 이현은 모친인 무측천에 의하여 폐위당한다. 그리고 방릉에 유배된다. 이후 정계에서 무슨 사건만 있으면, 모친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문"했다. 이현은 모친이 사람을 보냈다는 말만 들으면 간담이 서늘해져서, 자살을 생각했다. 다행히 처인 위씨가 계속 그를 격려했고, 그는 계속 살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유배도중에 낳은 딸인 안락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리하여 당중중에게 무궁한 즐거움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황제위에 복귀한 후 그는 부인과 딸에 대하여 아주 잘대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사랑이 너무 깊으면, 두려움도 생기는 법인지, 궁의 안팍에는 그가 공처가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하루는 당중종이 궁내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많은 예인(藝人)들을 오게 하여 흥을 돋구게 하였다. 어떤 예인은 스스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고는 <<회파사(回波辭)>>를 부른다. 가사는 새로 만든 것인데, 약간 황제에게 듣기 나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황상이 듣고나서 싫어할지 어쩔지를 몰랐다. 당중종은 그에게 불러보라고 격려했다. 이 예인은 노래를 불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부인을 무서워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밖에는 배담이 있고, 안에는 이노(李老, 당중종을 의미함)가 최고이다"

 

예인이 이 노래를 부른 후 모두 대소를 했다. 그 예인은 웃으면서 당중종 부부를 바라보았다. 당중종은 난감하게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위황후가 말을 했다: "노래를 잘하는구나. 상을 내리마!" 바로 그 예인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이를 볼 때, 이현과 배담을 같이 얘기한 것을 보면 조금도 그가 억울해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공처가라면 일에서나 생활에서 부인의 요구에 맞추어야 했다. 일에서, 그는 위황후가 공개적으로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허용했을 뿐아니라, 그녀를 도와서 그녀의 세력을 키우는데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와 병존하는 지위까지 끌어올렸다; 생활에 있어서, 그는 위황후가 애인을 두는 것도 허용했다. 어떤 사람은 의심했다. 혹시 무삼사가 아니냐고. 무삼사와 그녀간에는 업무관계만이 아니지 않은가?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무삼사가 죽은 후에 위황후에게 진짜 애인이 생겼다는 점이다. 한 명은 양균(楊均)이고 다른 한 명은 마진객(馬秦客)이었다.

 

양균은 주방장이다. 요리를 특히 잘했다. 좋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소화계통의 질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침 마진객은 의사이다. 그리하여 건강을 돌보아줄 수 있었다. 위황후의 마음 속에 시어머니 무측천이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그저 시어머니가 했던 일은 그녀도 하려고 했다. 단지 무측천은 당고종이 죽은 후에 남총을 두었지만, 그녀는 기다릴 수 없어서 뭐든지 앞당겨 했다. 소문이 퍼져갔는데, 당중종은 듣고도 못들은 척 넘어갔다.

 

부인에게 이러했으니, 딸인 안락공주에 대하여는 당중종이 더욱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안락공주가 무슨 일을 원하면 모두 자기가 조서를 초안한 후, 당중종에게 서명하게 하였다. 사서를 뒤져보면, 당중종은 단지 두 가지 일에 대하여 안락공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는 "황태녀"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곤명지사건"이다.

 

안락공주가 당중종에게 자기를 '황태녀'로 삼아달라고 말한다. 당중종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신들과 상의하겠다고 답한다. 다음 날,당중종은 재상 위원충을 만나서, 그에게 이야기 한다. 위원충은 강직하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 말을 듣자 바로 말했다: "폐하가 만일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삼으면 부마는 무엇을 하게 할 것입니까?" 중종은 잠시 생각하고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저 돌아와서 안락공주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황태녀로 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재상 위원충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자 안락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바로 욕을 해댔다: "위원충. 이 산동 늙은이가 뭘 알것인가? 아무자(무측천)같은 사람도 황제가 되었는데, 나는 황제의 딸이다. 왜 황제가 될 수 없단 말인가?"

 

"곤명지(昆明池)사건"은 또 무슨 일인가?  당시 안락공주와 그녀의 언니 장녕공주가 서로 누가 부자인지를 겨뤘다. 두 사람은 돈을 물쓰듯이 쓰면서 땅을 늘였다. 집을 모두 궁전처럼 지었다. 난형난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안락공주는 기이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녀는 당중종 이현에게 황가에 속한 곤명지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곤명지는 당나라때 아주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현이 응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안락공주는 화가 났다. 그녀는 바로 장안을 돌아본 후, 마음에 드는 부지를 고른 후에 강제로 현지의 백성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곤명지보다 더 큰 인공호수를 팠다. 그리고 "정곤지(定昆池)"라고 지었다. 이는 분명히 부친에게 시위하는 것이었다. 공사품질보증을 위하여, 조정삼품관리인 사농경 조이온이 조복을 벗고, 소매를 걷어부치고, 밧줄을 자기의 목에 매고는 친히 안락공주를 위하여 차를 끌었다. 당중종은 딸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을 보고도 평소처럼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무대신을 이끌고 안락공주의 흥을 돋구워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정곤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이를 보면, 당중종이 안락공주를 버릇없게 키운 것은 정도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참을성있게, 처와 딸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당중종 이현은 절대 현부양부이다.

 

이현은 가족에게 잘했을 뿐아니라, 자기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일찌기, 그는 타향에 유배된 적이 있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된 후에 스스로에게 잘 했다. 그는 특히 놀기를 좋아했다. 가장 열중한 것은 마구(馬球)인데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하다. 그러나, 때릴 수도 있고, 찰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공을 칠 수도 있어ㅆ다. 중종이 가장 좋아한 것은 말을 타고 공을 치는 놀이였다.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당시 전체 상류사회는 모두 마구를 즐겼다. 당중종 이현의 두 사위인 장녕공주의 남편인 양신교(楊愼交)와 안락공주의 남편인 무연수(武延秀)는 장인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죽어라 마구를 연습했다. <<수호전>>에 나오는 고구처럼 시간이 나면 바로 놀았다. 이렇게 하여, 마구는 당시에 가장 유행한 오락활동이 된다. 당나라의 귀족만 노는 것이 아니라, 변방의 토번인들까지 놀았고, 수준도 상당했다.

 

경룡3년, 당나라와 토번이 오랫동안의 군사적 마찰을 끝내고, 다시 우호관계를 건립한다. 중종은 양녀인 금성공주를 보내어 화친한다. 토번사신은 장안으로 와서 영친(迎親)한다. 그리고는 친선경기를 제안한다. 규칙에 따르면, 매 팀은 10명의 운동선수가 참가해야 한다. 토번사신과 당중종은 모두 대위에 앉아서 관전했다. 원래 당나라가 홈경기이므로 안정적으로 이겨야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연속으로 몇 게임을 패배한다. 당중종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어떡할 것인가? 그는 최후의 패를 꺼내든다. 그리고는 우리는 선수를 바꾸겠다. 단지 4명의 선수만을 내보내서 너희와 싸우겠다고 말한다.

 

토번마구팀은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금방 10명으로도 못이겨놓고, 이제 4명만 내보내서 싸우겠다니, 정말 미친 자의 헛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좋다. 해보자고 하게 된다. 얼마 안지나서, 4명의 선수가 등장한다. 그리고는 토번의 팀을 무찌르게 된다. 이 4명의 선수중 2명이 바로 당중종의 사위들이었다. 그리고 한 명은 바로 이융기, 즉 나중의 당현종이다.

 

당중종 이현은 마구와 같이 기술수준을 요하는 운동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발하(拔河)와 같은 대중적인 운동도 즐겼다. 그는 일찌기 대신 발하대를 조직하였다. 많은 대신들은 칠,팔십의 늙은이였고, 걷는 것도 힘들었다. 더더구나 발하는 말할 것도 없다. 매번 이기면 뒤로 쓰러지고, 지면 앞으로 무너졌다. 한번 쓰러지면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온 땅을 기어다니니, 그저 거북이같았다. 당중종과 위황후, 안락공주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깔깔 웃었다.

 

이외에 당중종은 아마도 장기간 갇혀 있으면서, 조용하게 지내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장안이라는 번화한 대도시로 돌아오자 그는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항상 시끄러운 곳을 다녔다. 장안에서 가장 번잡한 곳은 당연히 시장이다. 당중종은 시장에 가서 사람들이 장사하는 것을 보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황제가 항상 시장에서 다녀서는 안된다. 체통을 잃는 일이다. 어떡할 것인가? 그는 바로 궁안에 모의시장을 만들었다. 궁녀들을 장삿꾼으로 분장하게 하였고, 궁녀에게 가서 물건을 사곤 했다. 둘이 가격을 흥정하고, 어떤 때는 싸우고, 어떤 때는 욕도 했다. 그리고 소매치기도 있었다. 당중종과 위황후는 이를 보고 너무나 즐거워했다.

 

이현이 얼마나 멍청했는가? 먼저 관리를 너무나 아무렇게 뽑았다. 당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관직의 수는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관직에 빈자리가 생겨야 새로 관리를 보충할 수 있었다. 당시 관리선발을 관장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최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씨였다. 둘 다 무삼사의 심복이었는데, 무삼사가 죽은 후에 당중종과 위황후를 위해서 일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뇌물을 받았고, 계속 하여 외관의 수를 늘였다. 일시에 3년의 관직 빈자리가 다 메꿔졌다.

 

관리를 많이 뽑은 것은 그렇다고 쳐도, 핵심은 조정에서 정상적으로 관리를 뽑는 외에,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당중종의 두 딸인 장녕공주와 안락공주, 위황후의 여동생, 상관완아, 상관완아의 어머니등등의 궁정귀부인들이 모두 권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이 누구를 관직에 밀면, 정부를 통하지 않고, 바로 당중종에게 부탁했다. 당중종은 그녀들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붓을 들어 칙령을 썼고, 중서성에 비스듬히 봉해서 내렸다. 이는 황제의 개인관계라는 뜻이다. 중서성도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많은 술팔고 고기파는 상인들이 신분을 바꾸게 되고, 조정관리가 된다. 이런 경로로 관리가 된 사람은 "사봉관(斜封官)"이라고 불렀다. 수는 정상경로의 관리의 수보다 많았다. 관청이 꽉 차게 되었다. 새로 관리가 부임하면,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여기에 도태메커니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전체 정부에 썩은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당중종이 이렇게 많은 관리를 임용했지만, 그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를 몰랐다는 점이다. 경룡3년 이월의 어느 날, 조정에서 한 어사가 재상 종초객을 탄핵했다. 그가 토번과 협상하면서 뇌물을 받아서, 매국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직접 당나라-토번관계가 다시 위기국면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종초당은 당당한 재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국노로 지적받았으니 무슨 체면을 차릴 계제가 아니었다. 바로 어사와 싸웠다: "나는 지금까지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했다. 네가 나에게 매국을 했다고 하니 나를 모함하는 것이 아니냐?" 하늘과 해에 맹세하면서 자신을 변호했다. 이치대로라면 황제는 어쨌든 조사를 한번 하고 시비곡직을 따져야 했다. 그러나, 당중종은 이 두 사람을 결의형제가 되도록 하였다. 모두 한 가족이니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누구도 더 이상은 따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해결방안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흔들며 탄색했다. 당중종을 "화사천자"라고 불렀다.

 

이런 생생한 사례가 있으니,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당중종은 멍청한 사람이다. 원래 평범한 황제로 술이나 마시고 놀면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중국고대에 이런 황제는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경룡4년 육월, 당중종이 비명에 간다. 죽기 전에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당중종 이현은 독살되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말한다: "산기상시 마진객은 의술로, 광록소경 양균은 요리술로 모두 궁중을 드나들다가 위후의 총애를 받았다. 일이 드러나서 주살될 것을 우려하였다; 안락공주는 위후가 임조하고 자신이 황태녀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서로 모의하여, 떡에 독을 넣었다. 육월, 임오, 중종이 신룡전에서 붕어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위황후의 두 애인인 양균과 마진객은 위황후와 사통한 것이 드러날까봐 우려하고, 위황후는 황제가 되고 싶어하고, 안락공주는 황태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몇몇 세력이 모두 중종이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모두 연합하여 독이 든 떡을 먹인 것이다.

 

이 주장의 합리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치통감>>은 경룡4년의 오월, 즉 당중종이 죽기 1개월전에 특히 이런 말을 집어넣어 놓았다: "오월, 정묘, 허주사병참군언사 연흠융이 다시 상소를 올려 말했다: '황후가 음란하고, 국정에 간여하고, 종족이 번성하다; 안락공주, 무연수, 종초객은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한다'"

 

누군가 황후가 음란하고, 공주, 부마와 대신이 역모를 꾀한다고 하면, 중종은 당연히 고발자인 연흠융을 찾아서 물어보아야 했을 것이다. 중종의 엄한 질문에, 연흠융은 대의늠름하였따. 사실 중종은 처와 딸에 대하여 전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이런 추악한 일들을 지방의 하급관리까지 알게 되었으니, 중종으로서는 면목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용히 연흠융을 풀어주었다. 생각도 못했던 것은 연흠융이 대전을 나오자 마자, 위황후의 일당인 재상 종초객이 보낸 자객에 의하연 대전앞에서 살해당한다. 중종은 책임추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때는 평소와는 달리 분노를 나타냈다. 위황후와 그의 심복들은 걱정하기 시작했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들이 무슨 대책을 생각했는가? 그것이 바로 당중종을 독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사실이 그러할 것인가? 나 개인적으로는 중종이 독살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첫번째 이유는 현존하는 사서중에서 처음으로 당중종 이현이 위황후에게 모살되었다는 것에는 이후 반개월간 위황후의 정변에 대하여 분명하게 군사적인 동원의 색채를 드러낸다. 바로 당중종이 죽은 18일후에 태평공주와 이융기가 공동으로 정변을 일으킨다. 당시 한 정변에 참가한 장군은 사병에게 "위황후가 선제를 독살했다. 우리가 오늘 위황후를 죽이는 것은 선제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확실히 위황후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말은 정변의 이유로서 찾은 것이지, 사실의 근거라고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두번째 이유는 안락공주를 완전히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구당서>>는 그녀가 황태녀가 되려고 했다는 것과 정곤지를 만든 사건등의 여러가지 세부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녀가 당중종에게 독약을 넣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학실히 이런 중대한 누락은 절대 <<구당서>>의 작자가 안락공주를 비호해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당시 사람들은 안락공주가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사후에 모두 예의에 따라 개장되었다. 당중종이 죽은 후 반개월여만에 위후와 안락공주가 정변으로 죽는다. 비록 정변에서 내건 것은 두 여인이 당중종을 독살한 죄로 큰 죄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정변이 끝난 후 얼마되지 않아, 그녀들은 모두 예의에 따라 개장되었다. 만일 그녀들이 정말 당중종을 독살했다면, 어찌 그녀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예에 따라 개장했겠는가?

 

네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당시 당중종을 독살할 현실적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당시 준비는 아주 충분치 못했다. 만일 당중종이 살아 있으면, 그녀들은 당중종이라는 큰 나무에 의지하여 세력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위후모녀가 마음이 조급해져서 황제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이는 당시 승리자의 거짓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중종은 왜 이렇게 돌연사 했는가? 이는 이현의 가족유전병사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당가족은 심뇌혈관의 유전병력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 장손황후, 당고종이 모두 '기질(氣疾)", "풍질(風疾)"을 앓고 있었는데, 이는 고대에 모두 심뇌혈관류의 질병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이당왕조의 황제들은 장수한 사람이 없다. 이현이 55세에 사망한 것은 정상에 속한다.

 

이외에, 어떤 심뇌혈관질병은 급격히 발작하고, 사망률이 높은 특징이 있다. 이현은 무슨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에 급사했다. 이는 심뇌혈관질병의 일반규칙에 맞는다. 이렇게 보면, 위후모녀가 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은 천고의 원안(寃案)이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다만, 어찌되었건, 당중종의 죽음은 당시 정계에 대지진을 몰고 왔고, 일련의 권력투쟁을 불러온다. 최종승리자는 이융기이다. 그가 정권을 잡으면서 당나라는 짧으나며 안정적인 발전시기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