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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소련은 동북(만주)에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빼앗아갔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3.

글: 오명(吳明)

 

2차대전말기, 일본군이 오랜 기간동안 힘들게 경영하여, 만주지방의 공업생산량 총액은 이미 일본 본토를 넘어섰다. 만주는 명실상부하게 일본이 전중국과 동남아를 침략하는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이 투항한 후, 만주의 공업은 자연히 동맹국들이 주목하는 목표가 되었다.

 

중국은 8년간의 항전동안 피를 흘렸따. 만일 9.18사태이후 동북항일민주연군의 항일전투부터 계산하면 중국인민의 대일항전은 14년에 이른다. 중국인민들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희생이 가장 컸고, 공헌도 가장 컸다. 중국에 소재하던 일본의 자산을 모조리 전쟁배상으로 빼앗아간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1945년 중소간에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이 개시되고, 국민정부 주석인 장개석은 중국대표 송자문에게 명확히 지시했다: "동북의 원래 각종 공업과 기계에 관하여 모두 아국의 소유로 되도록 하여야 하고, 이로써 왜구의 우리에 대한 전쟁채무배상의 일부분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소련측과 협의하거나 성명해야할 사항이다" 스탈린은 당시에 중국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동정'을 표시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5년 9월 18일, 중국정부는 미,소에 건의했다: 일본 및 일본국민의 중국영토내의 모든 산업권, 계약, 이자 및 각종 재산(부동산, 발전소, 각종 공장, 선박, 부두, 조선소, 기계, 광업, 유선 및 무선전기설비재료, 철로, 차량, 수리공장등등)은 모두 중국에 양도하였다; 동맹국이 중국에 귀속시키기로 약정한 중국 혹은 대만영토에 동맹군대가 주둔할 경우에는 모든 필요한 조치나 긴급조치를 취하여 적들이 파괴, 홰손, 은닉, 이동, 양도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저지하여야 한다; 일본국내의 각종 자산을 분배하는데 관하여 중국은 우선권을 가지고 중국국가 및 인민이 받은 장기간의 희생과 손실을 배상하도록 하여야 한다. 소련의 외무장관 모로토프는 답신을 통하여 소련은 중국의 일본배상문제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4강(미영중소)이 구성한 일본관제위원회에서 작성할 것이라고 하였따. 미국은 1945년 8월하순 송자문이 방문했을 때, 중국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송자문을 접견했을 때, "중국은 8년간 항전했고, 소련이 일본과 전투를 벌인 것은 며칠에 불과하다. 일본에 배상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중국에 첫번째이다"라고 하였다. 영국, 프랑스등 동맹국도 중국의 요구에 찬성했다. 당시에 보자면, 일본의 재중국자산은 중국에 대한 배상의 일부분으로 삼는데, 국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아무도 생각지 못한 문제가 나타난다.

 

스탈린은 비록 구두로 중국에 대하여 일본자산을 배상으로 삼는다는 주장에 동정을 표시하였지만, 실제로 그는 동북의 일본공업에 대하여 일찌감치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얄타협정을 체결할 때, 그는 루스벨트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사할린섬 남부, 쿠릴열도는 소련에 귀속된다. 그리고 러시아의 러일정쟁때 잃어버린 동북의 모든 특권을 회복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는 인민들에게 동북(만주)에 출병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는 그가 공개적으로 동북지역에 출병하는 목적을 밝힌 것이다. 아직 입으로 말하지 않은 목적이라면, 동북의 일본자산을 전면적으로 점유하고, 중점을 훼손시킨 다음 독점적으로 경제협력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나중의 목적은 나중에 소련대표가 중국국민정부대표와 경제협력담판을 시작할 때 토로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전면적 점유'는 바로 동북의 모든 일본계 자산을 홍군의 전리품으로 삼아 홍군이 전면적으로 접수하는 것이다. '중점을 훼손'시킨다는 것은 바로 가장 최신의 중요한 설비들은 철거하여 소련으로 운반한다는 것이다. 남은 부분은 둘로 나누어 중국과 소련이 각각 절반씩 가지는 것이다. 그 후에 쌍방은 배타적인 경제협력을 진행하여 제3국(미국을 가리킴)이 동북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세 단계는 모두 통일적인 것이고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중 소련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전면적 점유와 중점을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세 단계는 모두 소련의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동북의 경공업, 중공업은 거의 전부 일본의 만주중공업주식회사, 만주전업주식회사 및 만철주식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동북을 점령한 후, 먼저 이 몇 개의 독점조직의 우두머리들 만주중공업주식회사 총재 고기건지조(高崎建之助)등 일본의 고위경영진을 체포해서 장춘의 거소에 연금시키고, 엄격히 감시했다. 그 후에 그들의 입을 통해서 각종 필요한 자료를 취득했다. 그들로 하여금 동북의 모모기업은 관동군을 위하여 일한다는 내용이나, 일본의 자본이 얼마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등을 얻어내어 소련군이 기업을 전리품으로 획득하는데 근거로 삼았다.

 

각종 자료가 준비완료되자, 소련군당국은 1945년 10월 24일, 고기건지조를 압박하여, '만주중공업에 속한 각종 사업을 소련군에 이전"하도록 했다. 고기건지조는 만주국이 이미 해산되어 그는 만주중공업의 총재로서 이런 문건에 서명할 자격이 없다고 얘기했다. 소련군이 이전을 요구했지만, 소련으로부터 서면명령을 받아야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중국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따. 그러나 소련군당국은 서면명령을 내리는 것은 거절했고, 중국측은 소련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고기건지조는 회유와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10월 29일 결국 다른 경영진과 함께 아래와 같은 내용의 문건에 서명했다:

 

"만주중공업주식회사가 관할하는 각 회사는 일찌기 관동군의 필요에 따라 일했고, 회사업무의 집행자인 우리들은 모든 재산의 권리를 소련이 이전한다. 이 회사의 재산은 그 사업소, 사무소, 주택 및 기타 각종 건축물을 포함한다. 이 회사의 명부와 소련이 이전할 사업소의 일람표는 별첨과 같다."

 

이렇게 하여 고기건지조등은 불법적으로 이전문건에 서명했고, 그가 관할하던 72종의 공업 그리고 150종의 보조공업은 군사기업으로 취급되어 소련홍군에 이전되었다. 소련군은 고기건지조에게 날짜를 9월 17일로 채워넣게 시켰다. 만주전업주식회사 이사장인 평도민부(平島敏夫)등도 같은 문건에 서명했고, 같은 방식으로 이전했다.

 

고거건지조등을 핍박하여 이전을 추진하는 기간동안, 소련측에서 파견한 무장한 '대표'들은 각 공장을 실질적으로 접수하여 관장했다. 이들 공장은 대부분 민용공장이지 군용공장이 아니었다. 소련이 전리품으로 취급한 공장은 모두 소련당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지켰고,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했다. 일본의 전쟁포로(특히 기술자)는 기계를 분해철거하는 주요 책임자였다. 나중에는 시베리아의 전범수용소로 보내어져서 노역을 했다. 그들은 공장안의 기계와 중장비를 철거한 후, 상자에 넣어서, 철로의 출발점까지 끌고 갔다. 그 후에 바다(대련)와 육지(북으로는 흑하를 건너고, 서로는 만주리를 거치고, 동으로는 수분하를 지났음)로 길을 나누어 소련으로 반출했다. 소련측은 공장을 접수한 후, 소련측 기술기술자의 지휘하에 선택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공장의 기계설비를 분해철거하는 정도는 공장의 중요도와 소련의 필요성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동북 최대인 안산강철공장은 동북의 핵심기업이었다. 이 공장을 분해철거하면 동북의 공업체계가 마비된다. 그러므로, 소련은 이것을 철거운반하는데 가장 신경을 썼다. 소련군의 중령인 카사로프는 소련의 기술자 80명을 지휘하여, 노동자와 일본포로 합계 8000명이 40여일동안 진행하여 철거운송을 완료했다. 또한 봉천비행기제조공장은 고급훈련기 70대/월, 엔진100대/월를 생산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분산경영을 진행하엿는데, 공주령과 하얼빙제2공장을 만들었다. 공주령은 월생산량이 고급훈련기 30대, 엔진 100대였다. 하얼빈제2공장은 고급전투기 10대, 엔진 100대였다. 이상의 세 공장의 모든 설비는 소련군에 의하여 철거운송되었다. 모든 자동차제조공장의 기계설비도 깡그리 운반되었다. 이들 공장에서 반출된 기계설비는 동북지역의 공업기반을 파괴했다. 그러나 소련의 수요는 만족시켰다. 동북의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발전기도 소련은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은 중국과의 이후 협력을 생각하여 대부분은 철거해서 반출했지만, 일부분은 남겨두었다. 모든 철거반출은 1946년 3월에 소련군이 철군할 때까지 진행되었다.(실제로는 더 이상 철거할 것도 남지 않았다)

 

소련도 파시스트에 의하여 파괴된 나라의 하나이다.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마찬가지로 파시스트에 유린당한 국가인 중국을 동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야만스럽게 동북의 공업을 파괴하고 만다.

 

주동북소련군의 총사령관인 마리노프스키는 국민정부의 주소련군사대표단 당장인 동언평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소련은 동북의 경제에 대하여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기 보다는 국방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즉, 소련의 국방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동북의 모든 경제에 대한 조치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스탈린은 동북의 강대한 공업체계에 대하여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동언평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동북아에 대하여 과분한 안정감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전기간동안, 일본은 소련에 대하여 두 차례에 걸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한다. 한번은 합상호 사건이고, 다른 한번은 낙문감 사건이다. 일본군은 모두 동북을 기지로 하여 도발을 감행했다. 스탈린은 이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겼다. 그는 소련의 힘이 가장 박약한 극동지구에서 중국의 동북과 같은 방대한 군사공업생산기지를 보류해두는 것은 소련의 안전에 거대한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소련이 동북을 점령하게 된 것은 이러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투항하자마자, 주동북소련군은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동북의 공업광업, 기업에 손을 썼다. 자신의 안전을 위하는데 중국의 민족이익을 신경쓸 겨를이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