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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장춘(長春)이 만주국의 수도로 된 경위는?

by 중은우시 2009. 1. 23.

글: 설봉(薛峰)

 

장춘시에 거주한 적이 있는 중노년인들은 대부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일찌기 일본에 14년간 점령되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장춘이 만주국의 수도가 되면서 강제로 이름을 "신경(新京)"으로 바꾸어야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당시 동북삼성의 성회(省會)도시들의 규모를 보자면, 장춘은 막 개발되기 시작한 젊은 도시였다. 심양, 하르빈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여러가지 면에서 못미쳤다. 그렇다면, 당시, 침략자인 일본인들은 왜 "만주국"의 수도를 장춘으로 정했을까? 이는 확실히 천천히 음미해볼만한 역사이슈이다.

 

1932년 3월,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괴뢰정권 만주국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일본인의 뜻에 따라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정하고, 수도는 장춘으로 정하면서 이름을 신경으로 바꾼다. 당시 심양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장춘을 수도로 정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일본관동군사령부가 심양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일본 공상업자들은 심양에서 사업을 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당시 심양의 미래에 대하여 아주 높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즉, 심양이 만주국의 수도가 되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1932년 3월, 일본인을 경영주체로 한 심양공상회의소는 일본관동군에 진정서를 냈다. 도시계획 및 장춘을 수도로 정한 것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관동군 대본영은 대세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다시 수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심양에 살던 일본인은 점차 심양을 공상업도시로 포지셔닝하였고, 같은 해 8월, 심양상공회의소는 일본정부 내각, 만철(만주철도), 만주국에 심양공상진흥전략에 대한 건의를 제출한다.

 

장춘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진다. 아마도 이것은 장춘의 개발이 늦었고, 규모가 아주 적었으므로 낙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정부가 보기에, 하르빈은 러시아의 정치거점이어서 만주국의 수도가 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봉천(심양)은 동시에 중국인과 러시아인의 정치세력이 존재해서 수도로 삼기 적절하지 않았다; 고도 길림(吉林)은 교통대동맥인 남만철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래서, 동북지구의 요지인 중앙지대에 인구 겨우 13만인 신흥도시 장춘은 관동의 다른 두 대도시 심양, 하르빈 그리고 고성인 길림보다도 일본관동군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14년에 이르는, 기이하고, 방향감을 없으며, 굴욕적이며, 씻어낼 수 없는 "만주국"의 수도의 역사가 시작된다.

 

관련 사료기재에 따르면, "만주국"이 성립을 선포하기 2개월전에, 일본관동군은 이미 비밀리에 사람을 장춘으로 파견해서 대규모로 장춘의 구시가지의 주요건축물을 조사했고, 기본적으로 "만주국" 신정부 임시사무소를 설치할 준비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길림시와 당시의 길림성장 희흡(熙洽)과 교섭을 진행하여, 장춘을 중심으로 한 20리의 사방지역의 토지에 대하여 매매금지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토지투기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1932년 3월, "만철"의 산하에 있는 경제조사회는 장춘도시건설계획을 시작한다. 4월, "만주국"의 국도건설국은 자체연구를 시작한다. 나중에 일본군측, 만철, 만주국의 세 곳에서 공동으로 협의한 후에, 만주국정부에 실시계획의 집행을 위탁하기로 결정한다.

 

궁전과 관청거리의 위치는 만철과 만주국정부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만철측에서는 중국의 도성 조직구조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형에 따라 궁전이 남쪽을 향하지 않는 계획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황제 부의는 "절대로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엄중한 성명"을 내놓는다. 새로운 상업지구의 배치는 이미 도시의 남쪽에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차역, 공업지구등에 대하여는 양측의 의견이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나중에 여러번이 논쟁을 거쳐, 1932년 11월, 최종안이 나온다. 쌍방은 타협을 하여, 궁전을 행화촌에 두기로 하고, 정문을 남쪽을 향하게 하는 것으로 확인한다.

 

"만주국"의 <<신경도시계획>>의 기록에 따르면, "만주국"의 수도건설계획지구는 200평방킬로미터이고, 계획완성지역은 100평방킬로미터였다. 구시가지가 21평방킬로미터였는데, 제1기는 5년만에 20킬로미터(나중에 21.4킬로미터로 변경됨)이고, 인구는 최종적으로 50만을 수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신경도시계획>>에 관련된 장춘시건설자금은 아주 거대했다. 제1기 5년의 건설비용은 약 6000만엔이었다. 전액을 차입하기로 하였으며, 토지판매대금수입으로 상환하려 하였다. 당시의 "만주국" 관리는 일찌기 프랑스연합재단에 차관을 요청했고, 금방 프랑스정부 외교부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나중에, 일부 일본관리와 군측 그리고 "만철"은 프랑스인의 설계와 시공에 반대의견을 내서, "만주국" 수도건설국은 할 수 없이 비용계획을 대폭 축소시킨다. 첫째해에 차관을 500만엔으로 한다. 최종적으로 프랑스인의 설계방안과 공사건설은 배제되어 버리고, 외교부 청사만 지금의 신민대가위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오늘 보는 장춘의 구도심은 철저하게 일본현대건축과 계획의 실험지가 되어버린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토목건축사에서 대대적으로 떠벌이는 일이 되었다.

 

계획대강이 결정된 후, 수도건설국이 제정한 실시계획은 1933년 1월, 만주국정부의 인가를 받는다. 지형측량업무는 기본적으로 1935년에 완성되고, 1936년에는 92.7평방킬로미터의 농지를 매입한다. 그리고, 1937년에 1년여의 긴장된 시공건설을 거쳐, 신도시는 이미 초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계획에 따르면, 장춘의 도시배치는 동심원구조를 지니고 있다. 대동광장, 즉 지금의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세로방향으로는 대동가, 즉 지금의 인민대가이고, 가로방향으로는 흥인대로, 즉 지금의 해방대로를 축선으로 하여 비교적 완전한 신도시지역을 만들게 된다.

 

이 기간동안의 도로는 두 선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여기에 방사선시스템, 순환시스템의 풍격을 추가했다. "만철"이 부속토지의 도로계통은 대각선도로이므로, 예각의 교차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장춘의 기타지역에서는 방사선의 간선도로, 차간선도로등 비교적 협소한 도로도 교차하는 모양을 이루었다. 나중에 일본군이 항일유격대를 타격하기 위하여, 다시 계획실시구역외의 외곽환상도로를 만든다. 이때의 장춘은 간선도로의 너비가 26 내지 60미터였다. 고속차선과 저속차선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만몽차량연구윈원회를 설립하여 동북지구의 화물적재마차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장춘가도의 특징중 하나는 시가지내에 후항(後巷)도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상하수도, 가스, 심지어 전신케이블도 모두 후항에 있었다. 이는 장춘의 간선대로상에는 자유롭게 수목이 자라도록 하는 특징을 지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장춘을 원림도시로 만드는 기초를 쌓았다. 지금까지, 장춘은 여전히 남북방향의 "가(街)"와 동서방향의 "로(路)"로 명명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당시의 도로이름은 모조리 "만주국"정부의 총리인 정효서(鄭孝胥)가 명명했다.

 

장춘의 하수도건설은 오수와 우수를 나누는 방식을 선택했다. 설계때 우수는 시내공원의 인공호수로 유입되도록 하고, 오수는 이통하로 흘러들어가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오수정화방식은 일본의 패전때까지도 완공되지 못했고, 처리시설도 착공되지 못했다.

 

장춘시지구의 기복이 있는 지형구조는 계획전문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 주었다. 작은 하천이 저지대로 흘러드는데, 기본적으로 모두 인공호수를 파서 공원을 만들었다. 주택용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1940년, 장춘의 공원, 운동장, 묘포의 면적은 10.8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1인당 31평방미터에 이르는 높은 수준이었다.

 

1937년말, 5년간의 건설을 거쳐, 장춘은 이미 인구 33만명의 근대화도시로 성장했다. 1937년 9월, 만주국수도건설기념식이 대동광장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신경도시계획>>의 추진과 국도건설국이라는 기구는 모두 당시의 신경특별시정부당국에 이관된다.

 

제1기계획에서, 도로, 상하수도등 업무는 모두 기본적으로 완성한다. 그리하여, 남령을 중심으로 한 문화시설, 녹지공원의 건설은 제2기사업의 핵심이 된다. 운동장, 식물원도 건설을 시작한다. 성대로는 60미터로 확장한다. 연이어 각 대학과 연결시킨다. 다만 계획중의 도서관, 미술관과 대회댕등은 일본인들이 착공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1939년부터 시작하여 장춘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난다. 1941년에는 50만에 달한다. 거주, 교통과 물질공급에서의 문제가 날로 심각해진다. 주요도시지역외에 주택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맹가둔주택구가 바로 그 한 예이다. 전시에 에너지가 부족하여, 공공교통이 아주 곤란했다. 결국 수력발전과 철로자원으로 지상전차를 건설한다.

 

실제로, <<신경도시계획>>은 장춘의 도시교통에서 원래는 지하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제2기 건설부터 임시로 설립된 국도건설국은 오사카교통국의 기술자를 불러와서, 반년의 시간을 들여, 지하철계획을 완성한다. 장춘의 지질조건으로 봐서는 오사카의 절반비용으로 건설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이 추진되면서, 이 계획도 중단되고 만다.

 

만주국의 황궁도 일본이 투항할 때, 겨우 지하부분만 완성했다. 지상부분은 나중에 완성시킬 예정이었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길림대학 지질궁이다. 황궁의 주위 배치로 보면, 고전적인 중국황궁의 격조를 채택했다. 이 도시의 중축선은 순천대가(지금의 신민대가)이고, 북단의 황궁은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황궁의 전면의 개활지는 황제와 신민이 쉬는 장소(즉 오늘의 문화광장)이다. 이외에 오늘의 장춘제1자동차회사 일대는 더욱 방대한 황궁예비사용지역으로 놔두었다. 이로써 볼 때, 일본은 장기간 장춘과 동북을 점령할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