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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녹영장부대(綠領章部隊): 중공의 KGB

by 중은우시 2009. 11. 12.

글: 양비(楊飛) 양검(楊劍)

 

1928년 6월 18일에서 7월 11일까지, 중공 제6차전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회는 당의 업무중심을 폭동조직에서 장기적인 군중공작으로 전환했고, 군중을 쟁취하는 것을 당의 첫째임무로 확정했다. 1930년 3월, 전국각지에는 상악서, 악예환, 좌우강등 여러개의 홍색혁명근거지가 건립되었고, 근거지에는 공농소비에트정권이 통상적으로 건립되었다.

 

각지에 소비에트정권이 건립되면서,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은 편안하게 잠을 들지 못했다. 1930년 10월부터, 남경국민정부는 무장역량, 사회역량, 경제역량을 집중하여 소비에트지구를 공격했고, 한번 또 한번의 포위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소비에트지구 내외의 지주들은 서로 결탁하여 각종 파괴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어떤 자는 소비에트지구에서 대거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소위 "공산공처(共産共妻)", "25세이하의 사람은 죽인다"는 등의 유언비어였다. 어떤 사람은 총을 숨기고 암살활동을 전개했고, 어떤 사람은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산채나 마을을 지키며 소비에트정권과 맞서고, 소비에트지구의 사회질서를 혼란시켰다. 어떤 사람은 정보를 수집하여 국민당군대가 소비에트지구로 진입할 때 선도를 맡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31년 11월 27일, 성립된지 얼마되지 않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임시중앙정부는 제1차 집행위원회의를 개최하여, 공화국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의 기구설치중 "국가정치보위국(國家政治保衛局)"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여, 특무를 제거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토비를 숙청하고, 지도자를 보위하는 등의 특수업무를 맡는다.

 

얼마후 국민당의 특무가 홍군내부에 침투하는 것을 분쇄하고, 홍군의 단결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하여, 1932년, 당중앙은 다시 홍군내에 직접 '국가정치보위국'에 예속되고, 전문적으로 간첩을 적발하고 지도부를 보위하는 보위국과 특파원을 둔다. 홍군내에 신비한 '녹영장부대'는 이렇게 시작된다.

 

홍군내에 각군보위국이 성립된 초기에는 비밀조직이었고,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업무인원도 아주 적었으며, 책임자가 직접 선정했다. 1933년이 되어 정식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경험이 부족하고 교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홍군의 각군단 보위국은 조직형식에서 기본적으로 소련국가안전위원회(KGB)를 그대로 본받는다. 방면군(方面軍), 군단(軍團)에 보위국을 설치하고, 각 사(師), 단(團)에는 정부특파원을 둔다. 연(連)에는 공작망대장, 배(排), 반(班)에도 공작망원이 있었다. 보위국, 특파원은 군단, 사, 단의 사령부, 정치부와 동급의  평행기관이었고, 독립된 업무부문이었다. 보위업무를 하는 간부는 모두 자신이 부대내에서 선발하고 훈련시키고, 진급시키고 임명했다. 동급의 정치기관을 거치지 않았다.

 

홍군내의 보통전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보위국의 공작인원은 특수한 부호와 표지를 채택한다. 그들은 녹색바탕에 홍색둘레를 가진 영장(領章)을 붙였을 뿐아니라, 가슴앞에는 주석(은으로 만들기도 함)으로 만든 길이 30밀리미터, 너비 10밀리미터의 "KBU"라는 러시아문자 세 개가 새겨진 흉장(胸章)을 붙였다. "녹영장부대'라는 칭호는 여기서 온 것이다.

 

"녹영장부대"의 간부와 전사는 절대다수가 노동자 농민가정출신이고, 모조리 공산당원이었다. 모두 선발되기 전에 엄격한 정치심사를 거친다. 개인의 인사자료를 상세하게 검토할 뿐아니라, 면접을 통하여 심사를 받기도 한다. 가정상황, 개인경력, 사회관계에서 혁명참가동기까지 캐내고, 중요한 시기의 태도와 구체적인 전투시의 태도등등까지 모조리 조사받았다.

 

"녹영장부대"가 성립되자, 각급부대 지휘관의 경위병을 훈련하고 배치하는 것이 첫번째 임무였다. 경위병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경위병뿐아니라, 홍군내의 정치보위간부는 모두 여하한 상황하에서도 지휘관을 지켜야한다고 교육받는다. 군사기술과 체능훈련은 '녹영장부대'의 필수과목이다. 전쟁시대이므로, 죽음을 겁내지 않고,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외에, 각종 돌발상황에 잘 대처해야 하므로,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군사기술이 없이는 지휘관을 보위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한번은 중앙소비에트지구의 전투중 홍군대부대가 국민당군에 의하여 풍비박산이 나서, 홍3군 총지휘관 팽덕회가 적군에 발견되었다. 수백의 적군이 좁은 도로를 따라 추격해왔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길가에 정자가 서 있는 곳까지 갔을 때는 거리가 이미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 용비호, 황적파등 '녹영장부대'의 전사가 측면에서 뛰어들었다. 한편으로 적군을 향하여 사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두 사람이 팽덕회를 끼고 앞으로 달려갔다. 금방 다시 몇명의 '녹영장부대'의 간부들이 달려왔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바람에 팽덕회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녹영장부대"는 장기간 간첩적발과 보위공작을 해오면서, 당과 홍군에 보위공작의 우수인재를 많이 배양한다. 이들은 신중국 공안계통의 간부가 된다. 일찌기 홍1군단과 홍1방면군 정치보위국장을 지낸 나서경(羅瑞卿)은 신중국이 성립된 후 대장의 계급을 받고, 공화국의 최초의 공안부장이 된다. 일찌기 국가정치보위국의 집행부장, 정찰부장, 홍1방면군 정치보위국장을 지낸 이극농(李克農)은 나중에 중공중앙사회부장, 중앙군위 총정치부장과 부총참모장을 지낸다. 1955년에는 상장의 계급을 수여받는데, 중국역사상 상장계급을 받은 52명의 장군중 유일하게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해본 경험이 없는 장군이었다.

 

"녹영장부대"가 성립된 후 외적과의 투쟁에서는 큰 공을 세웠으나, 내부의 '숙청'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다. 왕명의 좌경노선이 중공당내에서 날이갈수록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함에 따라, '녹영장부대'는 이에 상응하여 업무중점을 홍군내부의 숙청에 둔다.

 

"녹영장부대"의 일부 교조주의자들은 혹은 '좌경사상'의 영향을 받아, 혹은 자신의 고도로 팽창된 권력욕망이나 정치야심의 비열한 성품에 의하여, 당내의 노선투쟁을 적군에 대한 대외투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정확한 노선의 홍군간부를 살해하고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아주 통열한 손실을 입는다.

 

일부 "녹영장부대"의 공작인원은 숙청운동에서 소위 "순결운동"을 극력 전개한다. 그들은 홍군내에서 소위 "반혁명" "AB단" "제3당" "개조파"분자를 솎아냈다. 이를 통하여 우수한 홍군지휘관들을 다수 살해한다. 이리하여 홍군내에서는 인심이 흉흉해지고, 홍군의 내부단결은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홍군지휘관들은 그들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경원시했다. 그리하여, "하늘도 겁나지 않고, 땅도 겁나지 않는다. 그저 특파원이 와서 얘기하는 것이 겁날 뿐이다"라는 말이 홍군내에서 유행했다.

 

이때문에,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소비에트구 중앙국은 일찌기 <<소비에트구중앙국의 소비에트구숙청공작에 관한 결의안>>을 만들어 "숙청을 담당하는 조직, 숙반위원회와 지방정치보위국이 일정한 시기에 당을 넘어서고 정권을 넘어선 독재기관이 되어 버린 적이 있다"고 심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후, 보위국의 특수화와 신비화를 막기 위하여, 겨우 1년가량 차고 다녔던 녹영장과 러시아어흉장은 사용중지된다. 그러나, "녹영장부대"는 비록 녹영장은 취소되었지만, 조직구조와 각급공작인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1935년이 되어 홍군이 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섬북지역에 도착한 후, 정치보위국의 기구가 취소되면서, "녹영장부대"도 따라서 해산된다. 비록 짧은 4년간이었지만, 그 공작성격이 특수하고 공작형식이 신비하여, 중국공농홍군역사상 유일한 특별부대로 역사책에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