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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금우당(金牛黨)사건: 민국최대의 금융사건

by 중은우시 2009. 3. 6.

글: 장삼봉(張森奉)

 

1947년, 상해의 금호업공회(金號業公會)와 은루업공회(銀樓業公會)의 구성원들은 수개월동안 국민당 중앙은행에 보관되었던 황금 800여만냥을 집어삼켰다. 이는 중화민국정부 최대의 금융사건이었다.

 

금우당의 탄생

 

8년대일항전동안 중국의 인민들은 전쟁의 고통을 겪어왔고, 평화를 갈구했다. 그런데, 장개석은 다시 내전을 일으켰고, 모든 사업은 불경기이고, 법정화폐는 평가절하되었으며, 물가는 급등했다.

 

생활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길거리로 나왔다. 각성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반내전 반기아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시국에 남경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던 장개석은 행정원장 송자문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송자문은 "오늘날의 방안은 중앙은행이 보관한 황금을 푸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황금이 시장에 나오면, 법정화폐는 대거 회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폐가치가 올라가고, 물가도 떨어질 것이다. 1달도 되지 않아, 인심이 안정될 것이니 곤란한 것들이 술술 풀리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장개석이 물었다: "중앙은행은 황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다 내다팔아버리고 나면 어떡할 것이냐?" 송자문은 황금이 아직 800여만냥이 있다고 하였고, 다 팔아버리더라도 10억달러의 외환이 있고, 이밖에 성공적으로 도입할 것으로 예정되는 외화가 20억달러나 된다고 하였다. 사회의 유휴자금이 절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답변을 듣고, 장개석은 찌푸린 눈썹을 폈다. 그리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황금을 내다파는 방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개석, 송자문이 브레이크를 밟을 방법을 찾아서,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사태는 그들의 예상을 전혀 벗어났다. 순식간에 황금구매풍조가 일어나고, 욕심이 끝간데 없는 금우당이 나타난다.

 

금우당은 무든 정강을 지닌 정당조직이 아니다. 1940년대 상해의 황금투기단을 부르는 명칭이다. 상해의 황금상인은 대체로 3종류로 나뉜다: 첫째류는 권력과 세력이 있고, 뒷배경이 튼튼하여 황금시장에서 호풍환우할 수 있고, 가격의 등락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상해 사람들은 이들이 흉험하고 욕심도 많다고 하여 "금노호(金老虎, 호랑이)"라고 불렀다. 둘째류는 자금이 풍부하고 경영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상해인들은 이들이 통이 크다고 하여 "금황우(金黃牛, 황소)"라고 불렀다; 이어진 세째류는 "금창승(金蒼蠅, 파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소량거래를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정보에 의지하여 황금시장에서 추세를 봐가면서 사고팔았다.

 

금노호는 대부분 상해금호업(金號業)을 열었다. 상해에는 모두 65개의 "금호(金號)"가 있었는데, 그중 44개는 영업허가증도 없고, 영업점포도 없었다. 모조리 껍데기회사였다. 이들은 행적이 신비하여, 황금시장에서 군대, 경찰, 헌병, 특무에 의존하여 공매도, 공매수를 했고, 투기를 벌였다. 장사에 성공하면 십리양장에 큰소리치며 다녔다. 장사를 망치면, 수습할 수 있으면 수습하고, 정안되면 도망을 쳤다.

 

이들중에는 "첨련생(詹蓮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대단했다. 그는 황금구매붐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임시로 동풍여금호(同豊餘金號)를 만들고, 금호업공회의 주석이 된다.

 

첨련생은 금호업공회의 주석이 된 후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하루종일 중앙은행 업무국장인 임봉포(林鳳苞), 부국장 양명인(楊明仁)의 공관에 드나들었다. 그들의 부인, 첩들을 데리고 이 금호, 저 은루를 드나들면서, 가장 귀중한 금은악세사리, 보석을 사주었다. 업무국의 다른 하급관리들에게도 각각 여러가지로 뇌물을 바쳤다.

 

황금을 매각하기 시작하자, 다른 황금투기상들은 줄을 서서 등기하고, 배분비율에 따라 정부공시가격으로 황금을 사는데, 첨련생은 뒷문거래를 했다. 심지어 중앙은행의 관리들이 물건을 보내주기도 했다. 사건발발후 첨련생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1947년 1월 15일에서 2월 15일까지 1달동안, 그가 손에 넣은 황금은 40만냥이다. 국민당 감찰원의 자료에 따르면, 첨련생이 앞뒤로 집어삼킨 황금은 조사가능한 것들만 120만냥가량이다. 그러나, 조사하지 못한 것까지 계산한다면 얼마인지도 모른다.

 

금노호보다 약간 뒤떨어지는 것이 금황우이다. 대부분은 상해 은루업의 사장들이다. 상해사람들은 이들을 진정한 황금상인으로 본다. 창업은 청나라 광서연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의 황금구매붐때, 그들은 풍부한 자금력과 풍부한 장사경험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금창승은 실제로 황금암시장의 주도인물들이다. 그들은 사람수가 많고, 정부황금을 구매하는데는 통로가 없다. 그저 황금을 보유한 금노호, 금황우의 손에서 부스러기를 구매한 다음 다시 황금암시장에서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팔아서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보기 드문 황금대쟁탈전

 

황금매각은 국민당의 재정경제정책을 아주 궁박한 경지로 몰고 갔다. 송자문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1947년 2월 16일, 그는 "경제긴급조치방안"을 만들어낸다. 국방최고위원회의는 3월중순부터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방안은 일체의 황금매매를 금지시키고, 황금을 통화로 하여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을 금지했고, 개인은 황금을 휴대하거나 보유할 수 없도록 하였다. 방안실시전에 황금을 보유하고 있던 자는 즉시 중앙은행으로 가서 1946년의 가격으로 법정화폐와 교환하도록 하였고, 위반자는 모조리 적발하여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정부가 황금을 상인들과 백성들에게 팔고 나서, 반년후에는 다시 상인과 백성들에게서 황금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국민당은 진정 국민을 벗겨먹는 정당이 되어 버렸다. 이 약탈정책이 나오자, 군대, 경찰, 헌병, 특무는 바로 움직였다. 금창승과 황금을 보유한 자들은 순식간에 도망쳤다. 보통상인과 백성들로부터 온갖 호소가 난무했고, 행정원장은 전국에 대낮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큰강도짓을 하고 있다고 욕하고, 중앙은행은 조폭중의 조폭이라고 욕했다.

 

그해 3월, 상해 송호경비사령관 선철오(宣鐵吾)는 먼저 "금우당타파"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경제감찰단을 조직하여, 상해군대,경찰,헌병,특무는 밤낮으로 출동하여, 공장과 상가를 급습했고, 기차역과 부두를 지키고 금창응을 체포했다. 그리고 비밀고발의 방안을 작성한다: 비빌고발하여 사실로 확인되면 황금의 20%를 상여금으로 지급한다. 경제감찰단의 구성원과 고발자는 이렇게 큰 돈벌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온갖 비리가 난무했다.

 

선철오의 경제감찰단은 상해정태고무공장, 대중화제지공장, 생화제약공장의 사장을 특종감옥에 수감했다. 그들이 금노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곳의 사장들에게 "너희들 사건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 너희들에게 하루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돈이냐 목숨이냐. 목숨을 구하겠으면 황금을 뱉어내고, 돈을 가지겠으면 관을 준비해서 시신을 수습할 준비나 하라."

 

사건기록에서 선철오가 국민당 감찰원에 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경제감찰단이 3일밤낮을 습격하여 1600여개의 상점, 400여개의 공장, 1200여개의 행상, 800여개의 장호, 200여개의 기원에 대하여 철저한 수사를 하였다. 모두 황금 20만냥, 미화 120만달러, 가치 3,4백억이상의 면사백화를 몰수했다.

 

민간의 황금을 수사하는 것은 콩고물이 많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국민당의 여러 인사들이 모두 가담했다. 선철오가 행동을 개시한 이후 군통의 제2인자인 국방부 2청청장 정개민(鄭介民)도 행동을 개시한다. 1947년 7월, 정개민은 검사단을 이끌고 상해로 간다. 선철오의 경제감찰단과 충돌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먼저 선철호에게 인사를 한다: "철오형. 동생은 명을 받아서 왔다. 당신이 관할지로 왔으니, 우리는 먼저 군자협정을 맺자. 당신은 민을 관장하고, 나는 군을 관장하자. 모두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듯이 각자 서로의 선을 넘지 말자." 선철오는: "좋은 말이다. 그렇게 약속한 거다"라고 말한다. 정개민은 그가 군대측의 황금을 찾아내려는 것은 그가 그쪽 분야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보를 통하여 군대에서 끌어모은 황금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간처럼 분산되어 있지도 않고.

 

1947년 산동,하남에 주둔하는 3개의 군이 있었다. 3개군의 군수처장은 남경에서 트럭 몇 대 분량의 군수자금을 수령받아, 남경에서 주둔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현금수송차가 서주(徐州)를 지나는데, 상해에서 황금을 매각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3명의 군수처장은 바로 마음이 동하여, 차량을 상해로 되돌리라고 한다. 그들은 실탄을 장전한 사병을 보내어 금호, 은루를 다니면서 법정화폐를 황금으로 교환했다. 이를 통하여 매 군은 3천 내지 5천냥의 황금을 확보했다.

 

정개민은 상해로 간 후에, 전혀 거리낌없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군대는 이미 금노호의 목을 비틀었다.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갚아주어야 한다. 그들의 목을 비틀어라." 3개 군수처장과 자신에게 콩고물이 남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3통의 서신을 3개군의 군수처장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들에게 즉시 상해로 오도록 한다. 3명의 군수처장은 이 일은 그들의 모가지에 관련된 일이라고 느끼고, 놀라서 혼비백산한다. 그 다음에 정개민이 국방부 2청의 공식문건이 아니라 개인서신으로 보낸 것을 보고는 이를 사적으로 해결하자는 취지로 이해한다; 그저 가격의 문제였다. 그들은 상해로 와서 정개민과 협의한다. 그리고 손안에 넣은 황금은 정개민과 5;5로 나누어갖기로 한다. 양쪽 다 만족스러워했다.

 

어사출조 지동산요(御史出朝 地動山搖)

 

송자문의 황금매각정책으로 여러가지 악영향이 나타난다. 전국인민들의 강렬한 불만외에, 여론계도 비난일색이었다. 그리고 국민당의 각 파벌간에도 송자문 혼자 독식하게 됨에 따라, 이익을 나눠받지 못하여 반송자문의 분위기가 퍼졌다.

 

선철오와 정개민의 두 검사단은 몇몇 금창승만을 때려잡았고, 일부 무고한 사람들을 건드렸지만, 송자문계의 상층부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다. 악명이 자자했던 첨련생과 같은 금노로마저도 건드리지 못한다. 이리하여 각 파벌들의 불만이 급증한다. 정학계, CC계와 황포계는 눈을 감찰원으로 돌린다.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여론계에서는 국민정부의 5원중에서 감찰원이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깨끗한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철면어사가 나서서 호랑이를 잡아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감찰원장 우우임(于右任)은 비교적 능력있는 하한문(何漢文), 곡풍상(谷風翔), 장찬(張燦)과 장경정(張慶禎)의 네명의 감찰위원을 상해로 보내어 황금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4명의 감찰위원이 나서자, 여론계는 그들을 높이 받들었다. 정학계, CC계와 황포계도 응원을 보냈다. 상해신문은 당시에 "어사가 조정에서 나오니 땅과 산이 흔들린다"는 표현을 썼다. 하한문등은 상해에 도착한 후 먼저 황금매각을 주관한 부서인 중앙은행부터 조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중앙은행 업무국의 정부국장인 임봉포와 양명인에게 질문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황금을 매각했는가? 왜 금노호 첨련생이 그 일을 독점했는가? 두 사람은 대답했다: 황금매각수량은 국가기밀이다. 패조이(貝祖貽) 총재가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금호와 은루가 나선 것은 송자문 행정원장의 지시이다. 첨련생은 금호업공회의 주석이니, 그에게 맡겨서 처리한 것은 당연하다. 하한문등은 패조이에게 황금매각숫자를 물어보았지만, 패조이는 다시 송자문에게 떠밀었다. 그들은 송자문을 찾았다. 송자문은 "황금매각수량을 기밀유지하라는 것은 주석(장개석)의 구두명령이다. 알고 싶으면 장개석 주석에게 물어봐라." 그들은 하나하나 계속 떠미루기만 했고 결국 장개석에게까지 미루어졌다. 4명의 감찰위원은 화가 낱 끝에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번 황금붐은 일이 돌연하였으므로, 매각한 황금수량을 확인하는 것이 긴요합니다. 송자문 원장은 이 수치를 비밀로 유지하라는 각하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맞는 것입니까. 답신해주십시오. " 그러나, 장개석은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는다.

 

4명의 감찰위원은 벽에 부닥쳤다. 장개석, 송자문, 패조이의 라인은 철판과도 같았다. 하한문은 사람을 보내어 첨련생을 찾아간다. 첨련생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온 사람에게 말했다: "하한문이 누구냐? 뭐하는 자냐.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데...돌아가서 내가 시간이 없다고 말해라." 나중에 패조이가 첨련생에게 연락해서 만나주라고 한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하한문과 만나준다. 하한문이 첨련생에게 묻는다: "네가 번 대량의 황금은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첨련생은 전혀 거리낌없이 답한다: "너에게 말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나는 1,2십만냥의 황금을 구했다. 많이 구하다보니 쓴 돈도 많다. 남은 것은 금전(金塼, 금벽돌)을 금조(金條, 금괴)로 만드는데, 매일 240냥이니 반년동안 7,8만냥에 불과하다" 하한문은 그에게 또 묻는다: "너의 황금에 따른 접대는 어떤 사람에게 했느냐?" 첨련생이 말했다: "아래 위, 사방팔방, 이름도 성도 없고, 형태는 있지만 흔적은 없다" 하한문은 계속 물어보아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녹음기를 틀어서 첨련생에게 들려준다. 첨련생은 그것을 들은 후 뭔가 좋지 않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오만하던 태도가 완전히 사라진다. 마치 바람빠진 공과 같았다. 그는 하한문에게 애걸했다: "위원께서 손속에 자비를 베풀어 녹음을 나에게 넘겨달라. 그것은 내가 방안에 우리 두 사람만 있다고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다. 그걸 진짜로 믿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한문은 웃으면서 말했다: "첨주석, 당신은 패조이가 뒤를 봐주고 있는데, 뭘 두려워하십니까?"

 

다음 날, 입법위원, 군통특무이자 두월생의 제자인 왕신형(王新衡)이 하한문을 그의 집으로 불러 식사대접을 한다. 식사후 왕신형은 하한문에게 말한다: "첨련생에 관한 일은, 옛친구로서 너에게 얘기를 해주겠다. 관료사회의 일은 너무 진지하게 해서는 안된다. 여지를 남겨두어야 나중에 서로 괜찮은 법이다. 어제 너게 첨련생과 얘기할 때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녹음을 그에게 돌려주는게 좋겠다. 그리고 그에게 400개의 금괴를 내놓으라고 해라. 네가 평생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하한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왕신형은 다시 말했다: "오늘 두월생 사장이 너와 얘기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너의 명예를 생각해서, 나보고 대신 전하게 한 것이다. 네가 나 왕신형의 말을 안듣는 것이야 괜찮지만, 두 사장의 체면은 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한문은 알았다. 상해는 조폭사회이다. 두월생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은 감찰위원 4명이다. 그리고 녹음은 이미 다른 감찰위원이 오늘 저녁 남경의 우우임에게 보냈다. 그러나 두사장에게는 안심하시라고 말해라. 내가 중간에서 알선해서 사건을 너무 심하게 처리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한문은 조사자료와 녹음을 상해법원원장 사량감(査良鑒)에게 전달한다. 첨련생은 유기징역 12년형을 받는다. 임봉포, 양명인은 10년형을 받는다. 이 3명의 금노호가 형을 받은 후, 황금으로 여기저기 활동을 했다. 2000냥의 황금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단 하루도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치료의 명목으로 법망을 벗어났고, 나중에 흐지부지된다.

 

이번 황금사건 조사는 시작은 거창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다만 금우당에게는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상해에서는 거의 종적을 감추게 된다. 금우당이 창궐한 근본이유를 여론계에서는 송자문과 패조이에게 있다고 보았다. 송자문과 패조이가 물러나지 않는 한 금우당은 다시 창궐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조야의 인사들은 반송자문의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다. 1947년 5월, 감찰원은 송자문, 패조이가 부패한 확실한 근거를 찾아서, 신문계에 터트린다. 그리고 두번에 걸쳐 송자문, 패조이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한다. 그리하여 송자문은 사직하고, 패조이도 면직된 후 조사받는다. 이러한 조치도 국민당이 멸망하는 운명을 만회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