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이경원(李慶遠): 중국역사상 가장 장수한 사람?

by 중은우시 2009. 3. 26.

글: 유계흥(劉繼興)

 

사람들은 보통 팽조(彭祖)가 중국역사상 가장 장수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국어>>와 <<사기>>에 모두 그가 800년을 살았다고 적고 있다.

 

팽조는 상고시대 삼황오제중에서 오제(五帝)의 한 명인 전욱(顓頊)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요(堯), 순(舜), 그리고 하(夏)왕조, 상(商)왕조를 거쳐 은상의 말기 주왕(紂王)때 이미 767세가 되었는데, 그는 팔백살때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세상에서 양생의 도리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양생술은 나중에 후인들이 정리하여 <<팽조경(彭祖經)>>으로 만들어 전했다.

 

사실 이것은 인식의 오류이다. 역사상 진정으로 가장 장수한 사람은 팽조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의 오류가 발생하게 된 것은 모두 중국의 원고시대에 해(年)의 계산방법에 통일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팽조는 사천성 팽산(彭山)에서 태어나고, 팽산에서 자라고, 만년에도 팽산에서 죽었다. 팽산일대의 항간에는 지금까지도 "소갑자(小甲子)"라는 계산방식이 유행하는데, 육십일을 1년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공자묘에서 출토된 죽간(竹簡)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의 기년은 60일을 1세(歲)로 계산했다. 이것으로 환산하여 현재의 연도기준으로 환산해보면, 팽조는 130여세를 산 것이 된다. 역사학자들은 팽조가 팔백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실재로는 대팽국(大彭國)이 존속했던 기간이라고 말한다.

 

역사상 문자기록에 남은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아마도 청나라때의 이경원(李慶遠)일 것이다. 그는 257세까지 살았다고 되어 있다.

 

이경원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강희18년(1679년)에 태어나서, 민국24년(1935년)에 죽었으며, 향년257세라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중의, 중약, 특히 양생술에 대한 연구와 실무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성취를 거두었다. 그가 200여살의 고령이었을 때, 그의 행동거지는 장년인과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신선"으로 칭송했다.

 

이경원의 원적은 운남성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이청운(李靑雲)이다. 90여세되던 때 사천성 개현에 정착했고, 일생동안 24명의 처를 취했고, 슬하에 자손이 가득했다고 한다.

 

민국16년(1927년), 이청운은 사천군벌 양삼(楊森)의 요청을 받아 만현으로 가서 양생술을 가르친다. 양삼은 이청운을 상빈으로 모시고, 이청운을 위하여 새 옷을 별도로 준비하고, 사진관에 부탁해서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주방에 걸어두었다: "개현 이백오십세노인 이청운 초상, 민국십육년 춘삼월 만주에서 찍다" 졸지에 성내의 각 신문이 앞다투어 이 기이한 소식을 보도했고, 전체 사천성이 들썩였다. 이청운이 장수의 비결을 제대로 얘기해주지 못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개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민국20년(1931년) <<만주일보>>는 9월 15일 다시 기사를 실었는데, "개현의 273세 노인 이청운이 이미 어제 저녁에 진가장에서 만주로 와서 이씨화원에 머문다. 노인은 왕사단장의 요청을 받아 만주로 왔다..."

 

이경운이 250세가 되던 해에, 그의 고향사람인 사천성 개현사람인 유성훈 선쟁이 그를 인터뷰한다. 이경원은 신이나서 고전을 인용해가며, 양생술에 대하여 주절이주절이 얘기한다. 개인의 양생경력을 얘기해줄 뿐아니라, 고금의 양생술의 경험과 교훈까지 언급했다. 유성훈은 이를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서 <<자술>>이라는 글에 써놓았다. 이는 후세에 전해져서 양생술의 명저로 알려진다.

 

유성훈의 회고글은 1986년 제6기 <<기공>> 잡지에 실린다. 동시에 실린 것은 장수인물 이경원이 구술한 "장생불로결(長生不老訣)" 약 1000자였다. 북경의 일부 신문은 일찌기, "지구상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적도 있다. 다만 당시에 "기네스세계기록사전"에서는 의심을 가지고 인정하지 않았다.

 

<<자술>>이라는 글을 보면, 이경원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수명에는 장단이 있다. 이는 원기가 주재하는 것이다. 원기(元氣)는 원기(原氣)라고도 하는데, 선천적으로 받지만 후천적으로 길러서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신(腎)에서 발원하여, 단전(丹田)에 보존되고, 삼초(三焦, 상초, 중초, 하초)를 빌려 전신에 이른다. 그리하여 오장육부등 일체의 기관조직이 활동하게 하는 것이며, 동력의 원천이다.

 

그는 생동감있게 원기를 애호하는 것과 애호하지 않는 것을 촛불을 놓은 위치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만일 불을 붙인 촛불을 등롱안에 놓아둔다면, 불타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지만, 만일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놔둔다면, 시간은 짧아지거나 바로 꺼지고 말 것이다. 양생술도 마찬가지이다.

 

이경원은 노자의 말을 아주 좋아했다: "그대의 형(形)을 힘들게 하지 말고, 그대의 정(精)을 흔들지 말며, 그대의 생각이 복잡하게 하지 말라. 적게 생각함으로써 신(神)을 기르고, 적게 욕심냄으로써 정(精)을 기르며, 적게 말함으로써 기(氣)를 길러라." 그는 이 말의 묘한 이치는 양생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청나라때 학자인 육롱기(陸基)가 한 말을 아주 좋아했다: "땔감이 충분하고 쌀이 충분하면 걱정할 일이 없다. 일찌감치 관청의 녹봉을 먹지 않으니, 놀랄 일도 욕볼 일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았으니 이자가 생길 일도 없고, 전당포의 문앞을 드나들 일도 없다. 그저 맑은 차와 담백한 밥을 먹으니, 장수할 수 있다." 이경원은 또 말했다: "이것이 양생의 묘결이고, 장수의 좋은 잠언이다. 이 이치를 얻으면 장수할 수 있으니, 영약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금단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는 고인들의 양생이론에 따라, 특별히 양생을 잘하는 자는 자(慈), 검(儉), 화(和), 정(靜)의 네가지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원은 자신의 양생경험을 얘기하면서, "먹을 때 배부르게 먹지 않는다. 배부르면 위장이 상하게 된다; 잠잘때 지나치게 자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면 정기가 손상된다; 나는 이백년을 살면서, 지나치게 먹은 적이 없고, 지나치게 잠을 잔 적이 없다." "배고픔, 추위, 아픔과 간지러움은 부모가 대신할 수 없다. 쇠약해지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처자가 대신할 수 없다. 그저 스스로를 아끼고 스스로 보전하는 길이 양생의 법칙이고 관건이다"

 

그는 생활상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하여도 얘기했다. 그는 자잘한 일에 사람들이 조급해하기 쉬운데, 그렇게 하면 몸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춥고 더운데 조심하지 않거나, 발걸음을 빨리 하거나, 주색음락에 빠지거나하는 것은 모두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손상이 커지만 죽게 된다. 그러므로, 선인들의 양생술에 따라, 걸을 때도 빠르게 걷지 말고, 눈으로는 오래 보지 말고, 귀로는 끝까지 듣지 말고, 앉아있을 때는 피로할때까지 하지 말고, 누워있을 때는 끝까지 하지 말라; 추워지기 전에 먼저 옷을 입고, 더워지기 전에 먼저 옷을 벗고, 목마르기 전에 먼저 물을 마시고, 배고프기 전에 먼저 먹어라. 식사는 여러번 나눠서 하되 적게 먹고,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말라. 희노애락이 몸에 미치지 않게 하고, 영화부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장수의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