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헌실(孟憲實)
대진제국(大秦帝國) 이세황제 2년(기원전208) 7월, 전 승상 이사는 반란죄로 삼족을 멸하는 처벌을 받고, 같은 날 작은 아들과 함께 함양의 시장에서 요참(腰斬)을 당한다. 형이 집행되는 것을 구경한 사람에 따르면, 이사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너와 함께 우리집의 누렁이를 데리고 상채의 동문에서 들토끼를 잡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러고는 부자 두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사는 죽기 전에 고향인 상채를 그리워하고, 상채에서 지냈던 아름다운 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의 상채는 진한때 여남군(汝南郡)에 속하며, 초나라의 판도에 속했다. 젊었던 이사는 바로 상채지방의 소리(小吏, 하급관리)였다. 지위는 낮았지만, 마음 속에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두 마리의 쥐가 이사의 인생관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화장실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더럽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다시 양식창고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여유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크게 깨다른 바가 있었다. 인생도 쥐와 같고, 지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낮은 지위와 평민생활을 바꾸어보기로 결정한다.
자기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이사는 글을 읽는다. 저명한 학자인 순자(荀子)를 스승으로 모시고, ‘제왕지술’을 익힌다. 다 배운 후에, 이사는 글을 쓰거나 학설을 내세우지 않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가 순자를 떠날 때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가 곧 천하를 집어삼킬 것이며, 천하형세는 크게 변화될 것이다. 이때가 비로소 포의지사(布衣之士)들이 뜻을 펼칠 좋은 기회이다. 사람의 가장 큰 질병은 비천이고, 가장 큰 비애는 빈곤이다. 이익을 말하지 않고, 무위를 주장하는 것은 글읽는 선비의 진심이 아니다.” 그는 진나라로 들어가서 크게 일을 해볼 결심을 한다. 상채를 떠날 때의 가치관은 여전히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사가 진나라로 들어간 후, 상국 여불위의 식객이 된다. 여불위는 그를 중시했고, 그에게 낭관(郎官)의 직위를 준다. 그리하여, 이사는 진왕과 접촉할 기회를 갖고, 자기의 학설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진왕에게 역사변천과 천하정세를 분석해주면서, 제후를 멸하고 제업을 이루며 천하통일을 하는 것이 진나라에게는 다시 얻기 힘든 기회라는 점과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흘러가버리니 기회를 꽉 잡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사를 장사(長史)를 삼는다. 이사는 전문적으로 육국을 와해시키는 업무를 수행하고, 그들의 군신을 이간시키고, 그들의 인재를 빼내오는 일을 한다. 성과는 뛰어났고, 객경(客卿)으로 승진한다.
이사는 평민에서 분투하여 성공한 전혀적인 인물이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자기의 부귀를 얻어간다.
바로 이때, 진나라에는 중대한 간첩사건이 일어난다. 한(韓)나라에서 간첩 정국(鄭國)을 파견하여 진나라에서 수거(水渠)공사를 벌이게 한다. 이유는 수리공사를 하게 하여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해서 한나라를 침략할 역량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사건이 드러난 후, 많은 사람들은 산동육국에서 온 사람들의 목적이 불순하다고 생각하고, 모두 자기의 고국을 위하여 애를 쓴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모두 축출하고자 한다. 정책이 거의 정해진 것처럼 보였고, 초나라에서 온 이사도 축출대상에 들어있었다.
진나라가 벼랑끝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꿈도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사는 진왕에서 간곡한 건의서를 올린다.이사는 진나라의 여러 유명한 인물을 열거하는데, 백리해(百里奚)부터 상앙(商鞅)에 이르기까지, 장의(張儀)에서 범수(范睢)까지 그들은 모두 육국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진나라의 발전과 진나라가 다른 제후들을 이기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사가 내린 결론은 “물건중에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지만 보물이 많고, 선비중에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지만, 진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자들도 많다” 그는 현재의 축객령은 “축객을 함으로써 다른 나라를 튼튼하게 해주며”, 이는 진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사의 글은 진나라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브레이크역할을 했다. 각국은 이사와 같은 인물들의 출생지일 뿐이고, 그들의 아�속에는 아마도 조국의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이사의 조국은 천하였는지, 아니면 개인의 부귀영달인지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진왕은 바로 깨닫고는 축객령을 철회하고, 계속 이사를 중용한다. 이사에게 정위(廷尉)의 관직을 내린다. 이사의 부귀영달의 길은 아직 계속된다. 20년후, 진나라는 과연 천하를 통일했다. 이사는 승상(丞相)이 된다.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사의 당초판단이 역사의 발전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이사의 개인의 발전계획은 역사발전의 박자에 맞았고, 이사의 학식은 그가 부귀를 실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제반정책은 이사에게서 나왔다. 차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군현제(郡縣制)를 비롯하여, 서로다른 정견을 가진 자들을 타도하고, 악명이 자자한 분서갱유정책까지… 이와 동시에 그의 부귀영달도 전성기에 이른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황실과 결혼하였다. 그의 장남인 이유(李由)는 삼천군의 태수를 지냈는데, 한번은 이유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는 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잔치에 참여한 마차가 수천대였다. 이렇게 성대한 연회에 이사는 돌연 옛스승 순자를 생각했다. 순자는 “물금대성(物禁大盛, 물질이 너무 성대한 것은 금하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 ‘물금대성’인가? 왜냐하면 물극필반(物極必反, 모든 일이 끝까지 가면 거꾸로 되돌아오는 법이다)이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사는 이미 자기의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당초 상채의 포의에서 지금의 이러한 지위까지 오른 것은 원래 추구하던 바가 아니었던가? 그 연회에서 이사는 여러 손님들에게 상채를 이야기 하고, 상채에서 포의로 품었던 꿈을 얘기했고, 심지어 물극필반을 얘기한다. 다만, 그는 자기인생의 꺽어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을까?
진시황37년(기원전210년) 7월, 황제는 동방을 순유하는데, 사구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임종전에, 그는 사람을 불러 북방의 전선에 가 있던 장남 부소(扶蘇)를 불러오게 명한다. 그러나, 서신이 출발하기도 전에 그는 죽어버린다. 승상 이사, 환관 조고는 황제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가 당시 황제의 곁에 있었고, 황제가 서거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몇몇이었다. 시황제가 부소를 후계자로 하려는 의도는 분명했지만, 조고는 호해를 옹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조고는 조정에서 이사만큼 권위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이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조고가 이사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 말은 천백년후에도 여전히 경전이다. 조고는 먼저 이사에게 만일 부소가 황제가 되면 이사의 현재 지위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후에 수십년의 정치경험에 따르면 이사와 같이 고위직에 있던 사람 중에서 이세까지 복을 누리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사에게 모든 것은 호해의 수중에 달렸다고 말하며,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말한다. 이사는 처음에는 명확히 반대했고, 심지어 상채에서 이사는 평민에 불과했는데, 지금 이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모두 시황제가 내린 것인데, 시황제에 불충한 일은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 후에, 역사상 태자를 바꾼 다음에 나라가 망한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 태자를 바꾼다면 역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고의 유혹앞에 결국 이사는 타협한다. 그리고 조고의 음모에 가담한다.
얻기 힘든 부귀가 눈앞에 있게 되면, 포의출신의 이사가 비록 입을 열 때마다 관계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이런 경력은 더더구나 기회를 버리기 힘들게 만들어ㅆ다. 현재의 부귀영화는 그가 일생동안 노력한 결과이고, 그의 고생 그의 피와 땀 그리고 죽어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자신의 부귀를 유지하려면 대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사가 너무나 잘 알았다. 국가의 파괴이고 정치의 위기이다. 최종적으로는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충성, 모든 학식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이념도 개인의 부귀와 지위와 맞부닥치면, 왜 이처럼 돌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천백년후 권세가 있는 성공인사들에게 있어서도 이는 풀기 힘든 난제이다.
진이세(秦二世)가 일으킨 박해운동에서, 이사와 조고는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다. 시황제의 장남 부소가 속아서 자살하고, 명장 몽염이 피살된다. 시황제의 스무명이 넘는 아들중 누구도 호해의 칼부림을 벗어나지 못했고, 하나하나 제국의 제물이 되었다. 진시황은 당초에 모든 아들들을 정치에 관여치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중앙집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폐단이 나타났다. 즉, 집권자가 권력을 남용하게 되면 모든 사람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고, 결국은 나라 자체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진이세는 잔혹하게 모든 공자를 살해하고, 백성을 학대했다. 이사는 원래 황제에게 간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진이세가 그를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황제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꾼다. 그리하여 진이세의 잔혹한 정책은 더욱 미친듯이 시행된다. 그는 심지어 상소를 올려 황제의 황당한 통치이론을 지지하기도 했다. 산동지방에서 이미 봉기가 일어났고, 진승 오광의 부대가 서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국가가 붕괴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조주위학(助紂爲虐, 폭군 주임금의 학정을 도와주다)의 길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국가의 학정을 이용하여 자기의 부귀를 지키려 한 것이다. 이런 방법이 길게 갈 수는 없다. 이사는 이미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미친 정부는 하나의 해적선과 같다. 이사와 같은 대인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와 정부의 광기에 대하여, 대신들은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인민은 폭정에 항거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인민들만이 이를 저지할 수 있다. 진이세가 살인유희를 즐기는 동안에 진승, 오광은 산동에서 성공적으로 폭동을 이끈다. 진승의 군대가 서진하여 삼천군을 공격한다. 군태수인 이유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조고는 혼자서 조정을 독단했고, 이사가 관여하는 것을 배제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사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룻밤만에 이유는 방어에 무능한 사람에서 적과 내통한 사람으로 바뀐다. 승상 이사와 그 일가는 모조리 감옥에 갇혀버린다.
감옥에서 이사는 여전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와 황제의 사이에는 일찌감치 조고가 놓은 큰 산과 바다가 놓여 있었다. 결국 조고의 뜻이 황제의 입을 통하여 나타나고, 이사는 인생의 끝장을 만나게 된다. 적과 내통하였다는 죄를 받고 이사의 삼족은 모조리 주살된다.
상채의 한 소리에서, 나중에 대제국의 승상이 된 것은 이사의 노력의 결과였다. 당당한 제국의 승상이 결국 형장에서 요참형을 당하였다. 이것이 최종결말이다. 이사가 피할 방법은 없었을까? 죽기전에 이사는 돌연 상채를 생각하고, 상채에서 편안히 지내던 때를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상채에서 누렁이를 데리고 들토끼를 잡으러 다니던 광경이 갑자기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고 그리워진 것일까? 일생동안의 분투는 당연히 이런 결과를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체는 모두 상채소리가 비천하고 가난한 처지를 벗어나려는데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줄을 잘못 선 전형적인 사례가 이렇게 벌어졌다.
이사의 일생은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이사열전>>을 읽어보면, 이사가 죽기전에 한 반성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 설마, 상채의 소리는 처지를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았어야 한단 말인가? 설마, 이사는 제국의 성장을 돕지 말고, 제국의 통일을 돕지 말았어야 한단 말인가?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제국의 승상으로서 시황제가 죽은 이후, 이사는 제국의 전체와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았고, 자기의 부귀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한 상채소리의 사고가 제국승상의 두뇌를 지배한 것이다. 만일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십년의 승상이라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자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시황제의 유지를 받들려고 했다면 어쨌든 방법이 있었을 것이고, 합법적으로 집행할 방법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설사, 호해, 조고가 죽어라 방해하더라도, 어쨌든 한번 죽을 뿐이잖은가. 당당한 제국의 승상이라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황제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사가 순국하였다면 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사에게 있어서, 성공도 상채소리때문이었고, 실패도 상채소리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초기경력은 이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불위(呂不韋)의 공(功) 그리고 과(過) (0) | 2009.03.10 |
---|---|
태후조희(太后趙姬)의 진실 (0) | 2008.06.27 |
부소(扶蘇) : 비운의 태자 (0) | 2008.01.03 |
이사(李斯)는 왜 조고(趙高)에게 패하였는가? (0) | 2008.01.03 |
조고(趙高)의 진실 (0) | 200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