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태후조희(太后趙姬)의 진실

by 중은우시 2008. 6. 27.

작자: 미상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을 깍아내리는 것으로는 2가지가 핵심이다: 하나는 "한단헌희(邯鄲獻姬)" 즉, 한단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시황의 부친 이인에게 여불위가 임신한 조희를 바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후선음(太后宣淫)"으로 진시황의 모친인 태후 조희는 아주 음탕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진시황은 졸지에 <<사기>> 속에서 "생부불명, 생모불청(生父不明, 生母不淸)"의 잡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분이 미천한 장삿군의 혈통을 이었으니, 아무리 개세의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후세인들에게 조롱이나 받게 맏든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생부(生父)에 관한 수수께끼는 많은 고증을 거쳐 이제는 거의 진상이 드러났고, 진시황은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제 처리해야 하는 것은 태후조희가 음란하였다는 부분에 관한 것이다.

 

"태후선음"은 그저 '한 여인과 세 남자의 이야기'의 제3장에 불과하다. 아들 영정(진시황)을 빼고, 조희의 운명에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 남자라면 이인(異人), 여불위(呂不韋), 그리고 노애(嫪毐, Laoai)이다. 특히 이중 거의 아무런 중대한 배경자료나 참고할만한 것이 없는 노애가 제3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조희의 일생에서 가장 신비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기>>에서 노애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기이하다. "대음인(大陰人)"이라는 말고 개괄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세하게 그의 양물이 장대하다는 것을 묘사한다. 양물로 마차바퀴의 구멍에 넣어서 마차를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사기>>에서 고의로 노애의 진실한 신분을 숨기고 있다고 보거나 혹은 노애라는 인물이 아예 허구일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애가 입궁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사기>>의 논리모순은 명확해 진다: 조희는 음란하여 자주 여불위를 불러서 욕망을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불위는 이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 노애가 이미 거세되어 내시라는 증명을 위조하여, 그로 하여금 태후와 사통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설마 여불위는 자기가 사통하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통하게 하나 똑같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만일 어느 대신이 감히 태후를 위하여 이렇게 하려면, 그 태후는 반드시 무측천, 서태후 수준의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희는 <<사기>>를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음란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조희는 노애의 침상에서의 재주에 반해서 아주 즐거워하며, 보배를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녀는 노애와 후궁에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며, 결국 임신했다고 한다.

 

이 부분의 묘사는 태후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기녀에 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을 벌이는 곳이 진나라 궁중일 수 있겠는가? 분명히 기원을 묘사한 글이다. 법과 기강이 엄격했고 이를 기반으로 발전을 이루어온 진나라에서 설마 이처럼 엉터리없는 짓이 용납되었단 말인가? 사실, 노애는 바로 말 그대로 엄인(人, 내시)이다. 태후조희의 위세를 등에 없고, 감히 여불위에게 덤벼든 총신일 뿐이다.

 

조희의 일생에서 진나라 장양왕(莊襄王, 즉 한단에 인질로 가 있던 이인(異人)이며 진나라에 돌아와서 태자가 된 자초(子楚)이다)이 가장 중요한 남자이다. 그러나, <<사기>>는 진시황에 대하여, 조희에 대하여 그리고 전체 진나라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인물인 그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의 재위기간이 짧아서 쓸 거리가 적어서일까? 아니면 그가 뭐 역사에 남길만한 일들을 하지 못해서일까? 분명히 이는 아니다.

 

그는 최소한 왕위에 3,4년간 있었는데, 궁중에서 후궁과 놀아나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처럼 삼십여세(죽었을 때 삼십육세이다)의 국왕이 험난한 고난을 겪고서 비로소 왕위에 올랐는데, 정말 조희와 매일 놀아나기만 했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을 후계자로 정하다니 조부인 소양왕(昭襄王), 부친인 효문왕(孝文王)은 사람보는 눈이 없단 말인가?

 

진나라는 이 시기에 날로 강성해졌는데, 그럼 진나라가 무엇때문에 강성해 졌는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사기>>에 손을 본 것이다. 진시황의 부친에 관한 많은 부분을 삭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내력도 불분명한 노애에 대하여 대거 떠든 것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진시황의 부모를 함께 깍아내림으로써 진시황을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여불위는 확실히 진나라의 공신이자 권신이었다. 장양왕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국왕으로서 여불위의 세력을 방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여러해 동안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는 여불위의 능력과 사람됨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한 나라와 삼십여세된 과부와 열세살된 아들을 이런 일개 상인에게 맡기고 가면서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까?

 

조정의 문무대신들 중에 누가 여불위와 맞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누가 감히 여불위와 맞서려고 할까? 사실 시간을 추산해보면, 노애는 이미 장양왕이 죽기 전부터 정계에 들어와 있었다. 이 자는 비록 엄인이지만, 아주 총명했다. 그리고 여불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조희는 이런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시시때때로 여불위를 견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진시황이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면, 정계의 세력은 이쪽이 강해지면 저쪽이 약해진다. 이 노애는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진 이후에, 문신후(文信侯) 여불위는 책을 쓰는 것 이외에는 거의 자기의 포부를 실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 처해지고 만다. <<사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궁을 옮겨 옹에 거주한 후, 노애가 항상 따랐고, 상으로 받는 하사품이 아주 많았다. 일은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노애는 집안에 노예가 수천이고, 여러 손님들이 벼슬을 구하여 찾아와서 노애의 집에 있는 사람이 천여명이었다..." 이로써 볼 때, 여불위는 전혀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노애를 정말 여불위가 추천했다면, 노애와 조희는 여불위에게 십분 감사하는 것이 맞다. 왜 여불위와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태후는 상국(相國)을 몰아낼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일단 친정을 하자마자 노애를 제거한 것은 왜 그랬을까? 사실 아주 간단하다. 영정이 친정을 하는데에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노애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여불위집단이다. 그는 반드시 이 두 세력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대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전국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노씨인가 여씨인가?...왕이 땅을 떼어 진나라에 준 것은 노애의 공이다. 진나라가 존귀하게 된 것은 노애때문이다....이제 노씨가 진나라를 잘 다스리니 사귀는 것이 천하의 상책이다. 천하의 누가 여불위를 버리고 노애를 따르지 않겠는가? 천하는 반드시 여불위를 버리고 노애를 따를 것이다..." 이런 기술을 보면, 노애의 당시 권세는 이미 일개 내시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직접 여불위를 압박하고 진시황도 불안하게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여불위집단이 노애에게 억제당할 때, 여불위의 세력을 도와서 노애집단부터 처리한 다음에, 나중에 다시 여불위를 손봐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진정 원통한 것은 여불위가 아니라 노애이다. 만일 노애가 정말 반란을 하고자 했다면, '시황9년'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정이 친정한 후에 바로 손을 쓰는 것이 좋았다. 더구나 소위 자기와 태후의 사이에 난 소생인 '두 아들'을 위하여 일을 벌일 것도 아닌 것이다.

 

진시황에 관하여, <<사기>>에는 많은 헛점과 모순이 나타난다. 특히, "한단헌희"와 "태후선음"이 심하다. 생각해보라. 조희의 출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모호할 뿐아니라 스스로 모순된다. <<사기>>는 진시황의 생모 조희의 출신에 대하여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한단의 기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씨호족집안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불위가 그녀를 이인에게 바칠 때의 표정과 심리는 아주 생생하게 눈에 보는 듯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가 이런 소위 사실(史實)을 믿을 이유가 있단 말인가?

 

조희는 홍안박명이라고, 삼십여세에 과부가 되었으며, 선택할 수 없는 정치적인 풍랑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많은 적막한 밤에, 그녀는 아마도 아주 강렬한 성의 충동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런 권력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바로 예전에 그녀가 어린 아들 영정(진시황)을 데리고 조나라에서 이리저리 숨어가면서 목숨을 보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친정하기 전에 가능한한 영정의 왕위를 보전시켜주어야 했다. 그래서 내시까지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불행한 여자가 얻은 것은 천년동안 씻을 수 없은 오명이었다. 이것들은 그녀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진시황을 겨냥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시황의 행위와 조치는 춘추필법에 능한 유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춘추필법이라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통쾌함과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고대에 민간에서 진시황을 깍아내리는 여러가지 소문들이 나타난 이유이다. 후세인들에게 불행한 것이라면, 이렇게 깍아내리기에 역사학의 경전인 <<사기>>가 이용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