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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시하누크의 5년간의 중국망명

by 중은우시 2009. 6. 15.

글: 장청(張靑)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내각수상 론놀(Ron Nol, 1913-1985)은 미국의 교사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시하누크국왕을 축출했고, 그에게 사형판결에 처했다. 당시, 시하누크는 프랑스와 소련을 방문하는 중이었고, 중국을 거쳐 프놈펜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에, 소련지도자들은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쿠데타 소식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시하누크는 아주 비통해 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속에서 대성통곡했다.

 

주은래 총리는 중국의 주캄보디아대사관으로부터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친히 축출된 시하누크원수를 중국으로 맞이하겠다고 결정했다.

 

19일 오전, 주은래, 섭검영, 이선념 등 몇몇 국가지도자들은 비행장으로 가서 시하누크 국왕을 영접했다. 그리고 46명의 중국주재 외국대사들도 참가하게 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 시하누크 국왕은 빠른 걸음으로 비행기를 걸어내려와 주은래총리등과 친근하게 악수를 나누고, 열정적으로 포옹했다.

 

시하누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해외에 망명하고 싶지 않다. 미국에 대항하고 나라를 구하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론놀은 미국에 빌붙어, 조국을 배반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매국노이다. 그는 나의 국가원수직무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불법행위이다" 주은래 총래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절대 론놀반란집단과 정부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다만 당시의 국면에 비추어 시하누크와 가족은 북경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인도차이나3국과의 협력을 하루빨리 추진하기 위하여, 주은래는 즉시 베트남 총리 팜반둥(范文同, Pham Van Dong)의 비밀방중을 추진했다. 3월 24일 (당시 외교부 아주사의 인원이었던) 필자는 외교부 부부장 한염룡(韓念龍)을 수행하여 공항으로 팜반둥을 영접하러 나갔다.

 

중국의 노력하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최고지도자들은 1970년 4월 24일 광저우에서 인도차이나 3국 4자수뇌회담을 열게 된다. 필자와 한염룡 부부장은 먼저 광저우로 가서 준비를 했다. 회의장소는 주강의 가에 있는 주도빈관(珠島賓館)으로 결정되었다.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은 베트남 총리인 팜반둥, 남월민족해방전선 주석인 응우웬 흐우 토(阮友壽), 라오스애국전선 주석인 수파누퐁친왕(Prince Souphanouvong),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 주석인 시하누크, 캄보디아 민족단결정부 수상 펜 노우스(Penm Nouth)였다.

 

회의기간동안, 주은래총리는 전용기를 타고 광저우로 와서 3국 4방 지도자들과 회담을 개최했다. 그는 5가지를 건의했는데: 미국의 월남침략확대음로를 폭로하고; 인도차이나3국인민은 단결하여 독립과 평화를 쟁취하고; 론놀의 쿠데타를 비난하며 시하누크를 원수로 한 정권을 지지하고; 인도차이나3국은 상호존중, 단결강화, 평화공존을 시행하고; 동남아와 세계각국에서 적극 지지하고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3국 지도자들도 발언을 통하여 주은래 총리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인도차이나3국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회의가 끝난 후, 필자는 시하누크국왕을 모시고 광저우의 도시밖으로 관광을 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그날은 마침 5.1절이었다. 모택동 주석은 인민대회당에서 시하누크국왕과 2시간에 걸친 우호적인 회담을 개최한다. 시하누크는 3국4방수뇌회담의 실적을 상세히 소개하고, 진심으로 중국정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모주석은 "당신이 그렇게 말할 것없다. 우리는 너희가 자주 북경에 와서 머물기를 바라고,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지한다 최대한도로 여러분들의 구국사업을 돕겠다. 나는 당신과 얘기하는 것이 좋다. 내용도 솔직하고 생각도 진실되다. 당신은 공산당원의 자격이 있는 것같다." 시하누크는 파안대소하면서 말했다: "모주석. 나는 정말 공산당원도 아니고, 공산당원의 자격도 없습니다. 민족해방과 국가독립을 위해서, 나는 국내공산당과 연합할 수 있고, 공동으로 외국의 침략에 항거할 수 있습니다."

 

시하누크가 제안한 민족통일전선과 공동정부 방안은 중국, 베트남, 라오스등 국가의 지지를 받았다. 캄보디아내의 여러 계파도 이를 좋게 평가했꼬, 일부 주요인물과 해외에 망명했던 사람들이 속속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1970년 5월 4일, 시하누크는 북경 조어대빈관에서 제1차전체회의를 개최한다.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 민족통일전선의 정치강령이 채택되고, 시하누크를 통일전선의 주석으로 추대한다. 그 후, 민족통일전선은 회의를 거행하여, 민족단결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시하누크를 국가주석으로 추대하고, 펜 노우스를 내각수상으로 한다. 키우 삼판(Khieu Samphan)은 부수상 겸 국방부장이 되며, 12명의 내각명단이 정해진다. 외국매체에서 그들을 망명정부라 칭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회의는 단결정부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한 부분은 북경에 두어, 외교사무를 책임지며 국제지원을 받아내고 국내의 정치군사전략에 협조하며, 다른 한 부분은 캄보디아의 국내해방구에 두어, 국내의 전략과 군사투쟁을 책임진다.

 

캄보디아는 북경에 통일전선과 민족달결정부를 결성한 후, 주은래총리는 중국의 외교부관리들에게 그들의 사무실을 마련해주도록 지시한다. 필자와 몇몇 접대인원은 여러 곳을 조사한 후에  최종적으로 해정구의 우의빈관으로 정한다.

 

그해 7월, 민족단결정부는 우의빈관에 입주한다. 시하누크는 감격해서 말했따. "나는 충심으로 주은래총리가 우리 정부를 위하여 사무실을 마련해준데 감사한다. 이것은 민족단결정부의 건물이다. 면적도 크고 장중하며 호화롭다. 우리의 프놈펜 정부의 빌딩보다 더 크다. 우리 정부의 여기에서의 업무는 분명히 순조로울 것이다." 주은래 총리도 중국은 힘을 다하여 캄보디아가 북경에 단결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도울 것이고, 매년 그들에게 500만인민폐를 출연할 것이며, 경비인원과 차량팀도 제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시하누크와 그의 가족은 중국에 망명한 이래, 조어대빈관의 5호루에서 지냈다. 다만,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진행하고, "사인방"도 조어대에 상주하여,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여, 외빈이 머물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은래 총리는 외교부에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여러해전 시하누크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는 동교민항 15호빈관에 머문 적이 있다. 이곳은 청나라때 프랑스의 주중국공사관이었다. 1970년 12월, 동교민항 15호는 새로 단장하여, 시하누크와 부인등이 조어대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우리는 그들이 서양요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해에서 솜씨가 뛰어난 서양요리사를 불러왔다. 외교부는 동족의 작은 건물에 접대처를 마련해서, 시하누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시하누크는 수영을 좋아했고, 배드민턴을 치는 것과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했다. 우리는 수영장과 클럽 및 배드민턴장도 마련해주고, 그들과 함께 놀고 쉬었다.

 

시하누크와 가족이 동교민항에 이사한 후, 주은래 총리가 친히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는 시하누크에게, 이곳의 거주조건은 괜찮고, 독립된 주택이니, 이곳의 이름을 "캄보디아원수부(元首府)"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며칠 후,한 서방기자가 이곳에 와서 시하누크를 만났다. 기자는, "당신은 캄보디아친왕이고, 불교신자이다. 당신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것은 당신이 중국의 괴뢰가 되겠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시하누크는 흥분해서 기자를 질책했다: "무슨 헛소리냐. 나는 절대 중국의 포로가 아니다. 더더구나 중국의 괴뢰도아니다. 내가 장기간 중국에 머무는 이유는 첫째는 중국이 우리의 미국에 항거하는 전략을 지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택동과 주은래총리가 우리가 존경하는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민족단결정부가 설립된 후, 그들의 평화적인 해방을 지원하기 위하여, 중국정부는 민족단결정부와 매년 무상군사원조를 지원하기로 하는 협약을 체결한다. 당시, 캄보디아의 론놀정권은 교통요로를 통제하고 있어서, 중국측이 무기장비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는 "호지명소도(胡志明小道)"라고 불리우는 통로였다. 이 도로는 원란의 북쪽에서 라오스남부를 거쳐 캄보디아 동북부로 들어가는 길이다. 전체 길이가 1200여킬로미터이다. 주은래총리는 이 공정에 대하여 듣고는 방의(方毅)를 월남에 보내어 고찰하게 한다. 필자도 함께 갔다. 여러번의 현지답사와 회담을 거쳐 중국월남 쌍방은 협약을 체결한다. 주은래 총리는 중국측이 월남측에 사람을 보내어 전면적으로 도와주도록 결정한다. "호지명소도"를 재건하고 확장하도록 한다. 도로가 개통되면서, 중국정부는 군사인원, 무기장비, 원조자금을 캄보디아에 보내는데, 이전의 반달가량 걸리던 것이 5일로 줄어들었다. 처음에 운송차량은 겨우 수십대였는데, 나중에는 1974년에 1500대까지 늘어난다. 몇년동안 중국이 캄보디아에 원조한 물자총액이 수억위안에 달하였다.

 

1973년 2월에서 4월사이에, 시하누크는 "호지명소도"를 거쳐 캄보디아에 귀국한다. 1975년 4월 17일, 론놀정권은 붕괴되고,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해방된다.

 

1975년 8월, 폴 포트는 키우 삼판을 북경에 파견하여 시하누크를 조국으로 모셔간다. 시하누크는 중국외교부의 인원들에게 이 소식을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전하도록 하였고, 두 지도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모주석과 주은래 총리는 모두 몸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모주석과 주총리는 당시 당정주요책임자인 등소평, 섭검영에게 시하누크와 그 가족들을 송별하도록 당부했다. 시하누크는 아주 감격해서 말했다. "중국이 우리에게 준 대량의 형제같은 무조건적이며 여러가지 형식의 지원을 해주었고, 우리는 비로소 역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나는 믿는다. 이후 중국은 여전히 우리 캄보디아의 최대지원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귀국하기 전날, 그는 특별히 <<내가 사랑하는 제2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썼다. 그 가사에는 "아. 영광되고 위대한 중국,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충심으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 당신을 나의 제2의 조국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