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이홍장과 좌장군: 미국의 중국음식

중은우시 2009. 3. 13. 13:01

글: 장천(庄)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의 인물은 무슨 위인이나 스타가 아니다. 바로 "좌장군(General Zuo)"이다. 그 원인은 "좌장군계(左將軍鷄, General Zuo Chicken, )"라는 중국요리때문이다. 처음 미국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게 된다: 도대체 좌장군이 누구를 말하는가? 왜 중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가?

 

소외 좌장군은 기실 상군(湘軍)의 명장인 좌종당(左宗棠)을 가리킨다. 즉, 호남요리중에서 유명한 좌종당계(左宗棠鷄)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미국식 중국요리인 것이다. 유행시간의 장단으로 따지자면, 그래도 좌장군계는 "잡쇄(雜碎, Chop Suey)"에 밀린다. 그리고 이 "잡쇄"는 또 다른 유명한 인물 이홍장(李鴻章)과 관련된다.

 

"잡쇄"의 탄생

 

1896년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위하여 중국요리를 전담하는 개인요리사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쓸 수 있는 중국요리재료가 많지 않아서, 그의 요리사는 각종 야채를 섞어서 요리를 하나 만들어내는데 바로 "잡쇄"이다. 이후 이홍장의 유명세를 타고, "잡쇄"라는 요리방식은 상류층의 식탁에서부터 민간에까지 유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미국 중국음식점에서 간판요리로 성장한다.

 

이 음식을 도대체 누가 발명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1896년, 이홍장의 방미는 확실히 미국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고, 뉴욕저널도 이홍장의 명성을 이용하여 "이홍장마저도 한번도 위크엔드뉴스를 놓치지 않는다"는 내용의 광고를 실었을 정도이다. 눈치빠른 중국음식점은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 했다. 그이후 "잡쇄"는 미국 속어에서 중국음식의 대명사가 된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의 진용은 미국화인사(美國華人史)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평가한다: "잡쇄"는 어떤 측면에서 말하자면 미국요리이다. 다만, 그것은 동시에 중국농민의 가정요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많은 중국음식점의 메뉴판에는 여전히 이 요리가 적혀 있다.

 

사실 이홍장보다 이전에, 중국요리는 중국노동자들이 미국서부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개시된다. 미국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첫번째 중국음식점이 1850,60년대에 미국서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났다고 본다. 그 당시 로스엔젤레스는 인구가 5천정도인 작은 도시였다. 소위 "요리사"는 모두 원래 금광에서 일하던 중국계노동자 혹은 철로노동자였다. 그들이 음식을 팔던 곳은 중국식당의 전통적인 황색 삼각깃발을 걸었고, 판자집이었다. 당시에 "Chow Chow"라고불리웠는데, 원래는 광동음식이었다. 다만 명성이 "잡쇄"에 미치지 못하여, 그에 대한 자료가 많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서부해안에서 기원하다

 

중국농민의 가정요리가 어떻데 당시 황무지에 속하던 미국의 서부지역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것은 미국의 중국계노동자의 기원부터 얘기해야 한다.

 

1848년 미국과 멕시코간의 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지역이 미국영토에 편입된다. 같은 해 이 지역의 새크라멘토부근에서 금광이 발견된다. "골드러쉬"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동서를 가로지르는 철로가 아직 놓여져 있지 않았을 때이다. 동부에서 서부로 가려면 3-6개월의 힘든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그렇지만, 홍콩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데는 2-3개월이면 족했다. 확실히 중국에서 중국계노동자를 모집하는 것이 미국동부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는 것보다 값이 쌌다. 그리하여 중국계 노동자들은 미국서부의 노동력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되게 된다.

 

미국이민국의공식자료를 보면, 1820년부터 1840년까지 20명도 되지 않는 중국인이 미국에 도착했다. 1850년대이후, 중국계노동자는 대거 미국에 쏟아져 들어온다. 1860년대에는 태평양철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중국계노동자들의 수량은 최고조에 달한다.근 10만의 중국계노동자가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계노동자가 계속 유입되면서, 광동일대의 하층민중의 일상음식도 미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중국요리와 중국식당이 이때 생겨난다. 186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중국계노동자의 음식습관은 현지인들의 얘기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악독하게 중국인들을 "쥐를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의 도서관에는 <<샘아저씨의 추수감사절만찬>>이라는 만화가 있는데, 이 만화 속에서 서로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샘아저씨를 원형의 큰 식탁에 앉히고, 각종 전통요리를 대접하는데, 오로지 샘아저씨의 오른쪽에 있는 중국인은 살아있는 쥐를 집어서 입으로 집어넣어주려고 하고 있다.

 

이런 고의로 중국인을 조소하고 추화시키는 것은 당시 반중국정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중국요리의 이미지 변화

 

배화운동(排華運動)이 나타나고, 거기에 미국에 들어온 노동자들이 남자가 위주이다보니, 미국의 중국인수량은 장기적으로 정체되게 된다.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을 예로 들면, 1890년에서 1920년까지 30년동안, 인구는 계속 2천명을 유지한다. 이런 환경하에서 중국음식업은 주류에 편입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중국음식점주인들은 가게의 장식에 공을 들인다. 넓다랗고, 화려하게 인테리어된 중국요리점이 19세기후반에 등장한다. 손님들에게 친절한 이미지를 주기 위하여, 중국음식점주인들은 종업원들에게 당시 유행하는 서양옷을 입도록 했다.

 

의심과 배척의 분위기하에서 그들의 인정을 받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 중국요리 및 음식점에 관한 부정적인 언론이 계속 터져 나왔다. 1903년의 뉴욕타임즈에서는 차이타타운의 중국식당을 찾는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잡쇄점을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잠든 후에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이런 비판들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중국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초반, 로스엔젤레스 신문에서는 "잡쇄"의 요리방법을 싣기 시작한다. 요리때 필요한 각종 재료들 예를 들어, 두아(豆芽), 각종 장유(醬油), 올방개등을 실었다. 신문은 독자들에게 자기집에서 일하는 중국인 세탁공, 청소원들과 얘기해보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아끼는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팔아라고 얘기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중국요리가 주류에 편입되기 시작한 흔적은 1905년경부터 나타난다. 어떤 중국음식점들이 로스엔젤레스의 다운타운 비지지스지역에 생겨나기 시작한다. 같은 해 프랑스식당도 그들이 "잡쇄"를 판다고 대거 선전하기 시작한다.

 

1909년이 되면서, 로스엔젤레스의 중국인들은 대량으로 시중심의 제9대가와 세인트페트로대가에 거주하면서 농산품을 경영한다. 차이나타운시장으로 불리는 새로운 중국인거주지역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국음식점도 시중심에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1920년대, 이때 개업한 중국음식점은 다른 어떤 유형의 음식점보다 많았다. 비록 요리는 상당히 미국화되었지만, 여전히 두각(豆角), 배추와 같은 재료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신기한 것이었다. 이런 야채를 먹어보는 것은 모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손님들이 먹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면, 중국음식점내에서던 상대적으로 자주볼 수 있는 재료로 시험해볼 수 있게 해준다. 서행압(西行鴨), 산첨육(酸甛肉), 장유계(醬油鷄)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처럼 영합하기를 좋아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잘하는 성격으로 인하여, 중국식당은 전미국 각지에 속속 등장하고, 거의 모든 중국식당에는 "잡쇄"가 나타난다. 여기에 치즈햄버그와 프라이드치킨까지 제공한다.

 

역시 1920년대, "잡쇄"라는 단어는 대중문화에 흡수된다. 1925년, 컨트리음악중에 <<내가 떠난 후에 누가 너를 위해 잡쇄(Chop Suey)를 칼질해줄 것인가>>라는 곡이 있는데, 유명한 재즈가수인 루이스 암스트롱은 이 곳을 <<잡쇄원호곡(Cornet Chop Suey)>>라고 제목붙였다. 이 노래는 1926년 제즈곡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동시에 젊은이들의 눈에 차이나타운에 가서 중국요리를 먹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1925년의 한 그림엽서에는 이런 광경도 그려져 있다: 춤을 추는 젊은이들로 "상해커피숍"이라는 파티장소가 가득 차 있다.

 

1930년대가 되면서, 중국음식을 먹는 유행이 헐리우드까지 번져갔다. 스타들도 차이나타운의 중국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San Pietro, Sydney Greenstreet, Walt Disney같은 사람들이 중국식당에서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문의 칼럼난에는 기자들이 중국식당인 채화루(彩花樓, Tuey Far Low)을 야수림(椰樹林, the Coconut Grove)과 같은 최신유행의 나이트클럽을 함께 거론했다. 당시 인기있던 섹시스타인 Mae West는  차이나타운시장의 "만복루(萬福樓, Man Fook Low)"를 즐겨찾았다.

 

그러나, 중국음식애호가들은 가격이 비교적 싼 곳들도 찾아갔다. 1937년의 한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돈있고 고급음식점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차이나타운의 가장 지저분한 곳으로 몰려갔다. 골목길에 길게 줄을 서서 반시간을 기다려서, 주방을 지나아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식당으로 가는데, 식탁위에는 기름때가 가득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즐겁게 먹는다."

 

가정요리에서 염가식당, 그리고 고급식당까지 20세기초기에 중국요리는 그의 발자국을 확실히 남겼다. 그리고 미국의 주류음식문화에 편입되어 들어간다.

 

동서융합

 

이같은 문화융합은 1950,60년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 역사깊은 "이장군주루(李將軍酒樓)"는 심지어 루드 글랜시가 설계한 종업원복을 입혔다. 글랜시는 당시 첨단 설계사이고, 그의 옷은 강력한 제즈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잡쇄"를 두 이어 또 하나 전미국을 휩쓴 중국음식이 나타난다. 1960년대중반, 저명한 영화배우인 개리 그란트가 "오태태찬관(吳太太餐館)"을 찾는다. 그리고 닭고기샐러드를 시킨다. 이 식다은 원래 그런 음식이 없었다. 다만 총명한 가게주인은 선배들의 신축성과 창의성을 승계하여, 광동요리에서 손으로 찢은 닭고기에 서행(西杏), 광동식 훈둔피(만두피)를 섞어서 '중국식 닭고기샐러드를 만들어 이 대스타에게 제공하고, 그는 아주 만족해 한다. 금방 이 요리는 유명해지고, "잡쇄"와 함께 유행음식 명단에 오른다.

 

이차대전후 이민정책이 개방되면서, 중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상채(湘菜, 호남요리), 천채(川菜, 사천요리), 상해요리의 요리사들도 있었다. 광동요리가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들 요리들은 1970년대이전까지 모조리 합쳐서 "경채(京菜)"로 불리웠었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방문한 이후 점차 상응하는 제대로된 요리계통의 명칭으로 대체되게 된다.

 

이 때, 이들 "잡쇄"와 "중국식닭고기샐러드"의 계승자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좌장군계"이다. 이 음식은 껍질을 벗긴 닭다리고기를 얇은 밀가루를 바른 후에 기름으로 튀기고, 다시 탕수와 고추를 넣고 볶는다. 냄비에서 꺼낸 후에는 녹색의 야채를 바닥에 깐다. 달콤한 즙과 부드러운 닭고기살로 미국의 중국식당의 인기요리가 된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한 사람은 좌종당계의 본거지인 호남의 좌종당고거를 찾는다. 그리고 이 음식의 원류를 찾아본다. 그런데, 좌장군계는 호남요리의 거두인 팽장귀가 대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 후에 뉴욕에서 이름을 떨친 것이다. 팽장귀는 197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의 맨해튼 44가에 호남식당을 연다. 장소가 유엔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점차 입소문을 탄다. 1974년, 뉴욕텔레비전은 팽장귀의 "좌장군계"를 소개한다. 방송에 나간지 며칠동안 방송국에서는 1500통의 편지를 받는데, 요리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좌장군계는 명성을 크게 떨치고,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1980년대초기에 대만요리도 경쟁대열에 합류한다. 홍콩식 해산물식당도 들어서기 시작한다. 중국식당은 미국의 곳곳에 생겨났다. 2004년, 미국의 중국식당은 이미 36000개에 이른다. 수량은 이미 맥도날드, 버거킹과 웬디스의 3대 체인점을 합친 수량보다 많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