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12명 황제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은 바로 청고종 건륭이다. 강희제와 옹정제 두 황제가 고생하면서 천하를 다스린 덕분에 건륭제가 황제에 오를 때에는 대청제국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그 자신도 보통내기는 아니어서, 국토를 넓히고, 사고전서를 편찬하며, 삼산오원을 만들어, 강건성세(康乾盛世,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노인네는 자기가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렇지만, 건륭제는 스스로 자랑할만한 것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보유한 세가지 최고기록이다. 이것은 다른 황제가 따를 수 없는 것들이다.
첫번째 기록. 건륭제는 토끼띠였고, 25살때 옹정제를 이어 황제에 등극한다. 황제위에 60년간 있었고, 나중에 태상왕을 4년간 해서, 합치면 실제로 63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의심할 바없이 이것은 중국의 모든 황제중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 가장 긴 경우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강희는 61년간 황제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소니, 아오바이등 4명의 보정대신이 정치를 했으므로, 그는 16세가 되어 아오바이를 물리친 후에야 비로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은 53년이었다. 이외에 또 한 명 이들과 비길만한 사람으로는 무측천(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32세에 황후가 된 후에 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하여 82세로 서거할 때까지 50년의 기간동안 권력을 장악했었다.
두번째 기록. 첫번째 기록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의 나이이다. 그는 89세까지 살았다. 이것은 역대황제중 최장수 기록이다. 기원전 22세기부터 1911년까지, 하우부터 시작하여 마지막황제 부의까지, 중국에는 모두 500여명의 군주가 있었다. 그 중에 나이가 70세를 넘긴 경우는 9명에 불과했다. 각각, 한무제, 양무제, 무측천, 당현종(이융기), 당고조(이연), 송고종, 원세조(쿠빌라이), 명태조(주원장), 건륭이다. 이중 80세를 넘긴 사람은 양무제, 무측천, 송고종, 건륭제뿐이다. 그러나, 양무제는 굶어죽었고, 무측천은 핍박을 받아 퇴위당했고, 송고종도 핍박을 받아 20년전에 송효종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었다. 유일하게 건륭제만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범위를 세계로 넓히면 그는 랭킹2위가 된다. 1위는 이집트의 파라오인 람세스2세로 90년을 살았다.
세번째 기록. 이것은 조금 특별하고,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다. 이 십전노인은 시를 짓는 것을 매우 즐겼다. 어제시집은 즉위전에 <<낙산당전집>>이 있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후에 <<어제시전집>>이 있는데 모두 750수를 담고 있다. 재위기간동안 <<어제시집>>은 모두 5집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통계를 낸 것이 있다. 제1집에 4166수, 제2집에 8484수, 제3집에 11519수, 제4집에 9902수, 제5집에 7792수로 합계 41,863수이다. 건륭제 혼자서 41,863수의 시를 지었다. <<전당시>>에 수록된 2,200여명의 당나라때 시인들의 당시를 모두 합해야 비로소 48,000여수이다. 그래서, 수량으로 보면, 건륭이라는 이 아마추어 시인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많은 시를 지었으니,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는 일찌기, "일을 하다 시간이 남으면, 다른 취미는 없었고, 왕왕 시를 지었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매일 남는 시간이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짓는 것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었다. 매일 반드시 몇 수는 지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많기는 많지만, 유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그가 황제이기 때문은 아니다. 알다시피 남당의 후주 이욱이나 위무제 조조의 시는 모두 만고에 남을만한 것들이다. 문제는 그의 시의 수준이었다. 간략히 계산해보아도 알 수 있지만, 그는 89년을 살았는데, 날짜로 하면 32000여일이다. 그가 젖을 떼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계산하면 30000일이 되지 못한다. 이 시간에 그는 41,863수를 지었다. 그는 일국의 군주로서 매일 2,3억인구의 국가를 다스리면서도 하루에 한 수 이상씩 지어냈는데, 이러면서도 좋은 시를 지어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연히 그는 아마도 몇몇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시를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던 간에 이처럼 많은 쓰레기같은 시들을 지었다는 것은 결국 이름을 날리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명실상부한 "십전노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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