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구룡보검(九龍寶劍)은 건륭황제의 부장품이었다. 군벌이 도굴하면서, 구룡보검은 국민당의 특무대장 대립(戴笠)의 손에 들어갔고, 이전에 또 다른 두 명의 특무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 궤이한 것은 이 보검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비명횡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구룡보검에 더욱 신비의 색채를 더하게 된다.
중국역사상, 골동품을 가장 많이 수집했던 사람이라면 청나라의 건륭황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60년간 재위하고, 4년간 태상황으로 있으면서, 64년동안 명화고첩, 진이고완을 널리 끌어모았다. 죽은 후에 이들 기진이보들은 그와 함께 유릉(裕陵)의 지하궁전에 묻히게 된다. 그중 가장 전설적인 물건은 그의 곁에 있던 구룡보검이다.
구룡보검을 다시 인간세상에 드러낸 사람은 군벌인 손전영(孫殿英)이다. 1928년 2월, 손전영은 군사연습을 핑계로 하북성 준화현의 청동릉(淸東陵)을 포위했다. 하룻밤만에 서태후와 건륭제의 무덤을 도굴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건륭황제의 묘는 아주 호화로왔고, 관안에 많은 보물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고귀한 것은 건륭황제의 목에 둘러져 있던 조주(朝珠)들과 곁에 놓여진 구룡보검 한 자루였다고 했다. 이 검은 오척(五尺) 길이로 검손잡이(劍柄)는 아주 길었는데, 거기에 9마리의 금룡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구구귀일(九九歸一)"을 상징하는 것이다. 검집은 진귀한 상어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루비,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했으니, 무가지보라 할만했다.
1개월후 남경의 <<중앙일보>>는 머릿뉴스로 "비적군대가 동릉을 도굴한 참상"을 보도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각계인사는 손전영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 때 손전영을 당황해서, 황릉에서 도굴해낸 보물들을 가지고 당시 권력자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건륭의 조주중 가장 큰 2개는 대립에게 보냈고, 서태후의 입에 물려있던 보주(寶珠)는 송미령에게 보냈다. 금옥서과(金玉西瓜)는 송자문에게 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손전영을 처벌하는 것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1939년, 손전영은 다시 가장 진귀한 구룡보검을 대립을 통해서, 장개석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당시는 일본과의 항전이 진행중이었으므로 대립은 군통의 특무인 마한삼(馬漢三)에게 구룡보검을 장개석이 있는 중경으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마한삼은 구룡보검이 무가지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전쟁으로 어지러운 틈을 타서, 구룡보검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도 못하게, 1940년, 마한삼이 장가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게 된다.
마한삼은 일본특무기관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하여,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불었을 뿐아니라, 무가지보인 구룡보검까지 바치게 된다. 결국 그는 일본특무기관에서 석방되고, 다시 국민당의 군통을 돌아와 일을 하게 된다. 일본인이 투항한 후, 구룡보검의 행방에 관심을 가졌던 마한삼은 구룡보검이 여간첩 천도방자(川島芳子)의 북경집에 있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천도방자를 체포하고 그녀의 집을 수색하여 구룡보검을 찾아낸다.
1946년 3월, 대립은 북경의 제1감옥에서 간첩 천도방자를 심문한다. 옥중의 천도방자는 대립이 깜짝 놀랄 비밀을 털어놓는다: 원래, 군통 북경책임자인 마한삼이 항전때 체포되어 배반하였을 뿐아니라, 얼마전에 마한삼은 천도방자의 집에서 배반했을 때 바쳤던 구룡보검을 찾아냈다는 것까지 듣는다.
대립은 천도방자로부터 의외의 소식을 들은 후, 바로 마한삼에 대한 조사를 비밀리에 진행한다. 마한삼은 마각이 드러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구룡보검을 내놓고, 대립에게 금은재물과 골동, 자화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보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번에는 대립의 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군통의 핵심요원인 심취가 <<내가 알고 있는 대립>>이라는 글에서 쓴 바에 따르면, 1946년 3월 17일, 대립은 구룡보검을 가지고 청도에서 남경으로 장개석을 만나러 비행기를 탄다. 그런데,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는 강녕 대산에서 추락하고, 기내의 사람은 모두 죽는다. 군통에서 사람이 파견나와 시신을 수습한다. 심취가 농민의 손에서 구룡보검을 회수할 때, 검집과 검손잡이는 이미 불에 타서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취는 남은 부분을 대립의 유해와 함께 관에 넣고, 영곡사 지공전에 임시로 두게 된다. 수개월후, 장개석은 친히 무량전 서쪽에 작은 연못이 있는 곳을 잡아 대립을 매장한다. 심취는 친히 묘를 만드는 것을 감독한다. 대립은 많은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를 죽였으므로, 보복을 받을까 우려하여, 관을 묻은 후, 시멘트를 부어서 단단하게 만들었다.
심취의 우려는 현실화된다. 1951년 봄, 남경 각계의 강력한 요구하에 대립의 묘는 파헤쳐버리게 된다. 구룡보검의 남은 부분은 이후 어디로 갔는가? 일생동안 중산릉에서 문화재보호업무를 담당했던 유유재(劉維才)에 의하면, 그는 당시 영곡사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립의 묘를 파헤친 것도 그가 감독했다. 그에 따르면, 1951년, 농민들이 반개월의 시간을 소모하여, 대립묘의 시멘트를 갈라내고 묘를 열었다. "눈앞에는 붉은 칠을 한 목관이 나타났습니다." 유유재에 따르면, 관을 연 후에 그들이 발견한 것은 대립의 유해 외에, 이미 불에 타서 변형된 권총 1자루, 구두 뒷굽, 그리고 구룡보검이 있었다. "그것은 1척여길이의 좁고 길다란 쇳조각이었는데, 많이 부식되었고, 겨우 보검의 검신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유유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이 들은 한꺼번에 묘앞에 있는 연못에 던져져서 메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립의 관목은 농민들이 가져가서 썼다고 한다.
구룡보검은 손전영의 이후에 마한삼, 천도방자, 대립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구룡보검을 가졌던 이 네 사람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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