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오청원(吳淸源): 기성(棋聖)과 매국노

중은우시 2008. 8. 6. 15:41

글: 우시수휘(羽柴秀輝)

 

일본기계의 근대 무림지존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국적의 화인(華人, 중국계이면서 외국국적을 취득하면 華人으로 부르고, 중국국적을 유지하면 華僑라 부름)이다. 그는 혼란기인 북양군벌시대에 태어났고, 북양군벌의 단기서(段祺瑞)가 재능을 발굴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그는 연속으로 일본의 여러 고수를 물리치고, 한창때에는 일본기계에 그의 적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그를 소화기성(昭和棋聖)으로 떠받든다. 그는 인생의 영광스런 인생의 전반기를 보냈다. 즉, 소화기성으로. 그러나, 그의 인생 후반기는 매국노로 전락한다.

 

복건의 바둑신동

 

북양군벌을 얘기하자면, 중국내에서 일방적으로 비난받고 질책받는다. 군벌독재는 확실히 중국대륙에 큰 재난을 가져왔다. 그러나, 어떤 군벌의 행위는 일정한 정도에서는 국가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군벌 단기서를 보면,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만청황제를 퇴위하도록 병력을 동원해서 간한 것", "부원지쟁(府院之爭)", "장훈토벌" 그리고 교주만조차문제로 발생한 "오사운동"과 "3.18참안"등이다. 단기서는 물론 사람을 많이 죽인 군벌이다. 그러나, 그는 바둑을 좋아했고, 중국바둑의 발전에 관심을 가졌다. 단기서는 당시 중국바둑계의 기사교육훈련방식이 낙후되었고, 소위 중국의 국수가 일본의 고수들에게는 왕왕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을 보았다. 참담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중국바둑계의 교육훈련방식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세계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단기서는 바둑에 재능있는 청소년들을 뽑아서 일본에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그중에 바로 오청원도 들어 있었다.

 

소년 오청원의 바둑재주가 발견된 것은 한 내기바둑때문이라고 한다. 오청원의 부친인 오의(吳毅)는 단기서의 부하였고, 집안이 곤궁했다. 평소에 오의는 자신의 바둑이 세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다른 사람과 내기바둑을 두곤 하였다. 한판에 1-2 대양(大洋)을 걸였다. 한번은 오의가 다른 사람과 내기바둑을 두고 있는데, 오의가 점차 곤경에 빠졌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긴 오의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도망쳤다. 상대방은 오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오의가 오줌누러간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고 조롱했다. 이때, 나이 겨우 12살인 오청원이 부친으로부터 부친의 바둑을 넘겨받아 두었다. 생각도 못하게, 소년 오청원이 몇 수를 두자, 오의의 바둑은 곤경에서 벗어나, 역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오의와 상대방은 모두 그의 바둑솜씨에 깜짝 놀랐다. 부친은 오청원에게 혹시 몰래 스승을 두고 배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오청원은 "나는 그저 평소에 부친이 두는 바둑을 구경했고, 보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어린 오청원의 솜씨는 금방 바둑광인 단기서의 귀에 들어갔다. 단기서는 평소에 국수급의 기사들을 불러서 바둑두는 것을 즐겼다. 이들 기사들은 모두 예의를 알아서, 항상 단기서에게 양보를 해주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항상 비기거나 아니면 단기서가 겨우 이기는 것으로 끝났다. 이리하여 단기서는 자신의 바둑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13살인 오청원은 그렇게 할 줄을 몰랐고, 강공으로 바로 단기서를 이겨버렸다. 화가난 단기서는 밥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청원이 나이가 어렸고, 바둑재주가 뛰어났으므로 단기서는 그를 잘 대해주었고, 바둑친구로 삼았다. 그리하여 오청원은 단기서의 곁에서 그를 방문한 일본기사들과도 바둑을 겨루게 되었다. 13세에 이미 당시 일본의 유명한 기사인 이와모토(巖本熏) 6단, 하시모토(橋本宇太郞) 4단을 물리쳤다. 오청원의 재주는 일본의 유명기사 세고에(漱越憲作, 조훈현의 스승이기도 함)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오청원이 일본으로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자금지원을 해주었다. 이리하여, 오청원의 일본유학이 시작되었다.

 

신포석의 창립

 

처음 일본에 온 오청원은 이미 실력이 비범하였고, 여러 고수들을 이겼다. 그러나, 일본기원은 그저 그에게 3단격(段格)을 부여했을 뿐이다. 이는 정식 3단도 아니었다. 다만, 15세인 오청원은 당시 일본기계의 노장들을 모두 이겼다. 15세에서 18세까지 그는 29승 3패의 기록을 자랑했다. 그리하여 3단격에서 5단으로 승단한다. 일시에 중국에서 나타난 바둑천재는 일본 바둑계를 진동시켰다.

 

오청원은 짧은 삼년내에 일본의 바둑고수들을 이겼을 뿐아니라, 그는 1933년에 신포석을 창안했다. 그리하여 이는 오청원의 독문수법이 되었다. 1934년, 오청원은 바둑계의 기서인 <<바둑혁명. 신포석법>>을 발간한다. 신포석은 "변은 금이오, 귀는 은이오, 중앙은 돌이다"라는 전통적인 바둑관념을 뒤집는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바둑은 원래 이렇게 두는 것이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10번기제패

 

유파를 창립한 오청원은 점점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 일본국내에 권위있는 바둑대회로 "카마쿠라(鎌倉) 10번기"라는 것이 있다. 각각 카마쿠라의 건장사, 원각사와 학강팔번궁에서 거행된다. 오청원은 여러번의 10번기에서 상대방을 꺽었고, 일본에 둘도없는 10번기의 패자가 되었다.

 

기성의 최고봉에 오르다

 

일본인은 어느 방면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을 아주 존경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성(聖)"이라는 명칭을 붙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성(聖)"이라는 것은 종사중의 종사이기 때문이고, 신급의 달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성"으로 불린 일본인은 많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를 집대성하여 "다성(茶聖)"으로 불리운다. 신음류(新陰流)의 일대종사인 가미이즈미 노부쓰나(上泉信綱)은 "검성(劍聖)"으로 불리운다. 오만하기로 이름난 일본인들이 바둑사상 중국계인 오청원에게 감복하여 오청원을 '기성'으로 부른 것이다.

 

오청원의 기성으로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먼저, 오청원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프로바둑경기에 참가할 때, 이미 일본기원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다. 겨우 3단격을 주었을 뿐이다. 당시에 이미 오청원은 여러번 일본의 4단, 6단의 프로기사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오청원이 9단으로 승단하는 길도 순조롭지 않았고, 더욱 길었다. 그가 일본국내에서 독구구패식의 절대고수였지만, 일본기원은 1950년이 되어서야 그에게 9단을 부여했다. 일찌기 본인방 수재(秀哉)라고 부르는 일류기수가 오청원을 이기기 위하여 경기중에 계속 중지를 요청하며, 매번 곤경을 만날 때마다 제자, 기우들을 불러서 집단으로 연구했다. 바둑 한 판을 두면서 이 본인방은 계속 중단을 요청했고, 모두 3개월을 두어서 겨우 끝이 났다. 그동안 오청원은 계속 가을경기와 신문사가 추최한 경기등 11국의 바둑을 두었다. 비록 본인방 수재가 집단지혜를 모아서 3개월간 오청원 한 사람과 싸웠지만, 결국 그는 겨우 1집을 이겼을 뿐이다. 이 전투에서 오청원은 비록 졌지만 영광을 얻었다. 오청원의 이름은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이후, 일본기원마저도 할 수 없이, 바둑은 하루 안에 끝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소화기성의 오점

 

오청원의 전성기에 일본국내에 그의 적수는 없었다. 1958년, 제1기일본최강자결정전(명인전의 전신)에서 오청원은 8승2패의 성적으로 1위를 했고, 일본바둑계의 왕중왕이 되었다. 다만, 오청원은 1961년, 교통사고를 당한 후 바둑계를 떠난다. 이후에는 후배를 교육하는 것을 위주로 하게 된다. 어쨌든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 법이다. 외국인이 오랫동안 일본바둑계에서 최고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때문에 오청원은 불측의 화를 당했을 수도 있다.

 

일본 바둑계를 정복한 중국계인물에 대하여 중국대륙에서는 왜 아는 사람도 적고 유명하지도 않을까? 그것은 바로 오청원이 한가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1936년, 일본이 중국대륙을 대거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 오청원은 많은 일본거주 화교들이 일본국적을 취득하는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국적을 취득한다. 이 사건은 중국대륙에서 그의 매국노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하였다. 이후, 오청원은 다시 두번에 걸쳐 "기도보국회"에 참가하여 중국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을 위문하는 활동을 벌인다. 민족감정을 돌보지 않은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오청원은 매국노라는 악명을 짊어지게 된다.

 

"기성"과 "매국노"

 

오청원은 중국계의 신분으로 당시 일본인들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일본바둑계는 중국을 다시 보게 된다. 이때, 오청원이 일본국적을 취득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일본국적을 취득한 것까지는 부득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후에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을 위문한 행사에 참가한 행위는 전형적인 매국노의 행위이고, 욕을 얻어먹을만하다. 그러나, 욕은 욕이고, 오청원의 인품과 그의 기예는 별개이다. 둘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오청원의 "신포석"은 바둑계의 혁명적인 혁신이다. 그것은 철저히, "변이 금이고, 귀가 은이며, 중앙은 돌이다"라는 기존 전통관념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독측한 바둑기예를 창립한 것이다. 오청원은 일본인으로 살기를 좋아했고, '황군'을 위문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를 멸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오청원의 '신포석'은 중화민족의 문화결정체이다. 그것을 배워와야 한다. 오청원이 만든 신포석의 기도가 해외에서 방황하고만 있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가도 좋지만, 문화는 가져와야 한다. 신포석의 창안자의 개인적인 인품문제를 가지고 중국은 기도문화의 일부분을 잃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