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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동관(童貫): 중국역사상 군권(軍權)을 가장 크게 장악했던 환관

by 중은우시 2009. 6. 1.

글: 유계흥(劉繼興)

 

1111년, 즉, 송휘종 정화원년(政和元年), 환관 동관은 조정이 군사권을 장악하는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어, 추밀원을 이끈다. 북송때, 추밀원은 중서성(中書省)과 더불어 이부(二府)로 나란히 일컬어졌다. 추밀사는 군사를 처리하고, 재상은 정사를 처리하는 것이다. 송사(宋史)에서는 "추밀원은 군국기무, 병방(兵防), 변비(邊備), 융마(戎馬)의 정령(政令)을 장악하며, 밀명을 출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도운다." 추밀사는 조정에서 최고군사장관이었다. 이로부터 동관은 전국의 병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 정도가 된다. 이리하여, 그는 중국역사상 권권을 가장 크게 장악했던 환관이 된다.

 

동관은 역사상 군권을 가장 많이 장악한 환관일 뿐아니라, 그는 또 다른 몇 가지 중국의 최고기록을 만들었다: 중국역사상 군권장악시간이 가장 긴 환관(20년간 병권을 장악함);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사신으로 나갔던 환관(부사의 신분으로 정화원년에 요나라에 사신으로 나간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왕(王)에 봉해진 환관(전연의 영토를 수복한 후 廣陽郡王에 봉해진다);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환관(이는 그가 20세가 되어서야 환관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된다)

 

북송말년, 송휘종은 서화예술에 심취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강이 무너지고 부패가 횡행했다. 조정은 "육적(六賊)"이 좌지우지했는데, 바로 채경(蔡京), 왕분(王), 동관(童貫), 양사성(梁師成), 주면(朱), 이언(李彦)이 그들이다. 채경과 동관은 육적중에서도 우두머리급 인물이다. 당시 채경을 "공상(公相)"이라고 부르고, 동관은 "온상(相)"이라고 불렀다(이는 그가 환관이기 때문이다 '온'은 '어머니'라는 뜻이다). 이는 물론 풍자적인 뜻을 담고 있다.

 

당시 수도인 변경에는 이런 민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타파통(打破筒), 발료채(潑了菜), 편시인간호세계(便是人間好世界). (대강의 뜻은 대나무통을 부수고, 나물을 뽑아버리면 바로 좋은 인간세상이로다라는 것임)

 

여기서 "채(菜)"는 나물인데 채경의 성인 '채(蔡)'와 발음이 같은 채경을 의미하고, "통(筒)"은 대나무통이라는 뜻인데 동관의 동(童)"자와 발음이 같아서 동관을 의미한다.

 

"육적"의 우두머리중 하나인 동관은 금나라와 늑대를 집안에 끌어들이는 "해상지맹(海上之盟)"을 맺어 정강의 치욕을 불러운 대죄인이다. 그리하여 천년동안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있다. <<송사>>에는 "간신"으로 올려놓았다. 남녀노소 모두 알고 있는 <<수호전>>에서도 여러번 동관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가 30만대군을 이끌고 양산박으로 와서 송강의 의거군을 진압하다가 십면매복에 걸려서 겨우겨우 몸만 빠져나가서 개봉으로 도망친다고 되어 있다.

 

동관은 개봉사람인데, 자가 도부(道夫)이고, 사년동안 서당에서 공부한 바 있다. 환관이 되어 궁에 들어올 때 나이가 이미 적지 않았고, 근 스무살이 되었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턱아래에 수염 열몇가닥이 나있다"고 되어 있고, "몸이 건장하고 잘생겼다. 보기에 위엄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몸과 뼈가 쇠와 같아서 환관같지 않았다"고도 쓰여 있다.

 

동관이 입궁할 때 같은 고향의 선배인 이헌(李憲)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헌은 전공이 많은 환관들 중에서 서북의 변경에서 여러해동안 감군을 맡았었다. 동관은 이헌을 따라서 전선을 드나들었고, 십여차례 서북을 깊숙히 들어가기도 했다. 그는 군사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신종황제의 시대에는 운명의 신이 아직 동관에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궁에 들어온지 20여년동안 그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었다. 이러한 국면은 조길(송휘종)이 나타나서야 뒤바뀌게 된다.

 

송휘종 조길이 즉위할 때, 동관은 이미 48세였다. 송휘종은 그에게 "내정공봉관"이라는 직위를 주어 항주로 가서 서화작품을 끌어모으도록 시켰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내정공봉관은 현재의 황실 구매공급과장정도의 직위였지, 그다지 높은 직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콩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자리이기는 했다. 동관은 거기에서 돈을 챙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이 일을 처리했고, 송휘종의 환심을 샀다.

 

송휘종은 동관을 서북감군에 임명하여, 강족 토번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한다. 송나라군대가 전선인 황천에 도착한 후, 마침 개봉의 태을궁에 불이 나게 된다. 송휘종은 미신을 깊이 믿어서, 이것이 패전의 징조라고 보고, 황급히 글을 동관에게 보내어 그에게 출병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동관은 그러나 대담하여, 황상의 지시를 보고는 즉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접어서 자리에 놓아두었다. 송나라군대의 사령관인 왕후(王厚)가 물었다: "폐하께서 어떤 지시를 내리셨는지요?" 동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하루빨리 성공하라고 재촉하는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송나라군대는 일거에 사천을 수복한다. 장사들이 기뻐 날뛰고 있을 때, 동관은 축하연회에서 황제의 그 지시를 꺼내들고 군대내의 장군들에게 보여준다. 모두 보고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얼마나 큰 대죄인가? 군대의 장수들은 속속 왜 그렇게 하셨냐고 물었다. 동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때는 사기가 마침 크게 올라 있을 때였다. 이렇게 병사들을 저지시키면, 앞으로 어떻게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장수들이 물었다: "만일 패전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동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것이 바로 그 때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원인이다. 패전하면, 나 혼자서 책임을 지고 죄를 받을 것이다. 승전하면 여러분들의 몫이다."

 

이때부터 동관은 서북의 군대에서 명망을 확실히 수립한다.

 

그후, 동관은 전쟁터를 누볐고, 서북의 곳곳에 출몰하면서, 깡패국가 서하(西夏)와의 전투를 책임졌다. 그리고 병사를 이끌고 연속하여 몇번이나 승리를 거두었다. 서하는 국력이 따라올 수 없어, 경제가 거의 붕괴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배상금을 내고 사죄하겠다는 뜻을 전달한다. 동관은 적절한 때 거두는 것이 좋다고 보고 휘종에게 보고한다. 휘종은 마침내 육로대군을 철수토록 명한다. 그리고 동관에게는 "태부(太傅)의 지위를 더하고, 경국공(經國公)에 봉한다."

 

나중에 다시 동관의 주도하에 대송은 토번과 전투를 개시한다. 1년후, 송나라군대는 하황지구의 토번군대를 철저히 궤멸시킨다. 그리고 청해동남부, 황하이북지역을 확실히 장악한다. 이번 전투에서 송나라군대는 "변경을 3천여리나 개척하고, 수령 2700여명, 호구 70여만의 항복을 받아냈고, 전후로 여섯번 싸워서 1만여명의 수급을 잘랐다." 이리하여 신종의 고토를 모두 회복한다. 동관은 희하, 난황, 진풍로경락안무제치사에 올라, 서북변방의 최고군사통치자가 된다. 그후 동관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서북의 중요도시인 적석군과 도주를 수복한다.

 

송휘종은 동관을 높이 평가했다. 1111년, 동관은 태위(太尉)에 오르고 추밀원을 이끌게 되어, 전국의 군권을 장악한다. 이때부터 동관은 삼공의 반열에 오른다.

 

선화2년 방랍의 반란이 일어난 후, 금방 거대한 홍수가 되어 남방의 송나라군대는 궤멸을 당하게 된다. 송휘종은 동관을 파견하여 임,회,형절등로선무사로 임명하고, 담진으로 하여금 양절로제치사를 맡게 한다. 수도부근의 금군과 섬서6로번,한병력 15만을 모집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남하한다. 방랍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선화7년, 동관은 전연의 영토를 수복한다. 그리하여 광양군왕에 봉해진다. 대군을 이끌고 태원에 주둔한다. 당시 금나라는 이미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대거 병력을 일으켜 남하하고 있었다. 동관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고, 태원에서 개봉으로 도망쳐 온다. 그리고 흠종이 그에게 개봉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송휘종을 따라 남하한다. 그리하여 대학사 진동(陳東)등이 상소를 올려 채경, 동관등 6명을 나라를 망친 육적이라고 탄핵하는 것이다. 동관의 주요한 죄명은 "요금과 원한을 맺어 변방의 틈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때 송휘종은 이미 선양하여, 흠종이 등극했다. 동관은 총애를 잃어 정강원년 즉 1126년에 연속하여 세번이나 강등당한다.

 

1126년 7월, 동관은 길양군(해남 애현)으로 유배당한다. 조정은 다시 동관의 십대죄를 물어서, 감찰어사 장징을 보내어 현지에서 처결하게 한다.

 

비록 동관은 유배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간사하다는 점을 두려워하고, 그가 힘이 세고 용맹하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장징은 황상의 명을 받아 동관의 목을 베어야 하지만,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장징은 동관을 뒤쫓아 남웅주까지 갔다. 기르고 장징은 먼저 수행원을 동관에게 '배알'하다록 보낸다. 그리고 황상이 차엽(茶葉), 약물(藥物)등을 내렸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동관으로 하여금 돌아와서 하북선무를 맡게 하였다고 말했다. 그리도 다음 날이면 성지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동관은 그 말을 진짜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얼마남아있지 않은 수염을 만지면서 웃었다: '역시 내가 없이는 안되겠지" 그러면서 장징이 보낸 수행원을 남아있게 한다. 다음날 오전에, 장징이 왔다. 동관은 기뻐하며 맞이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황상의 성지를 받을 준비를 했다. 장징은 그 자리에서 조서를 읽으면서, 동관의 10대죄를 열거했다. 동관이 사태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장징이 파견한 수행원이 한칼에 그의 머리를 두동강이 냈다.

 

수일후, 감찰어사 장징의 일행은 여러 기의 말을 타고 남웅주 관아를 출발하여, 목갑을 하나 가지고 갔는데, 그 안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급이 하나 들어 있었다. 매관을 넘어 개봉으로 질주했다. 구월초칠일, 동관의 머리는 개봉의 성에 높이 걸린다. 구경나온 자들이 밀물과 같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러 기록을 세웠던 환관은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