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혁련발발(赫連勃勃): 중국역사상 최후의 흉노왕

중은우시 2009. 7. 15. 15:42

글: 노위병(路衛兵)

 

흉노가 남북으로 갈라진 후, 북흉노는 결국 멀리 유럽으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순한다. 삼국시대때 조조는 다시 그들을 5부(部)로 나누어 통치하니 흉노의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진(晋)나라말기에 유연(劉淵)이 혼란을 틈타 흉노5부를 통일하여 북방에서 나라를 세운다. 염민(閔)이 "살호령(殺胡令)"을 반포한 이후 한족들의 소탕으로 흉노족은 거의 멸족해버린다. 단지 흉노부족 한 갈래만이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다보니 멸족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갈래의 부족에서 나중에 아주 악독한 인물이 태어난다. 그는 이 부족을 이끌고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며 계속 확장하여, 북방에서 다시 한번 굴기한다. 원래 쇠망하던 흉노는 이로써 다시한번 휘황한 시기를 맞이한다. 이 사람이 바로 십육국중 대하국(大夏國)의 건립자인 무열제(武烈帝) 혁련발발이다.

 

혁련발발은 흉노 철불씨이다.

 

혁련발발은 흉노 철불씨(鐵弗氏)의 후손이다. 철불씨는 흉노의 남선우(南單于)의 묘예(苗裔)이다. 주희집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묘예라는 것은 먼 후손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철불은 흉노의 한 갈래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불은 흉노와 선비의 혼종이다. <<북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북발사람들은 오랑캐를 부친으로 두고(胡父) 선비족을 모친으로 둔(鮮卑母) 사람을 철불(鐵弗)이라고 한다" 흉노의 선우인 모돈(冒頓)은 한족황실의 여인을 처로 삼았기 때문에, 자손후대는 유(劉)씨성을 따랐다. <<진서>>에 따르면, "한고조는 종실여인을 공주로 삼아 모돈의 처로 주고, 형제로 맹약했다. 그러므로 모돈의 후손은 성은 모로, 씨는 유로 하였다." 그러므로, 혁련발발도 유씨성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유발발이라고도 불렀다. 부친인 유위신(劉衛臣)은 전진에서 작위를 받고, '삭방의 땅'에 할거하였고, 화살을 다룰 줄 아는 병사 3만8천을 거느렸다. 나중에 유위신은 북위에 멸망한다. 유발발은 사방을 전전하며, 나중에 후진의 국왕 요흥(姚興)에 의탁한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북방소수민족은 거의 일정한 기간동안의 고난을 거쳐 한 풍운아가 나타나서 부족을 통일한다. 그리고는 강성해지는 것이다. 흉노가 말기에 이르러 거의 소멸하려할 때, 마침내 유발발이 나타난다. 이 오래되고 강대한 북방의 민족은 중국역사에 다시 한번 흥기한다. 회광반조처럼 흉노의 중국북방에서의 최후의 광풍을 불러일으킨다.

 

유발발은 어려서부터 보통사람과 달랐다. <<진서>>에서는 그가 의표가 당당했고, 사람됨이 말을 잘하고 기민하며 총명했다고 적고 있다: "신장이 팔척오촌이며, 허리띠가 십위에 이르며, 성격이 말을 잘하고 총명했고, 잘생겼도 기품이 있었다." 게다가 병법에 능통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이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요흥은 그를 아주 기이하게 여겨서 아주 예의있게 대우해주엇다. 그리고 효기장군으로 삼았으니,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알 수 있다. 요흥의 동생인 요옹(姚邕)은 요흥에게 "유발발은 천성이 인자하지 못하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그래도 요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발발은 세상을 구할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함께 천하를 평정하려는데 안될 것이 무엇이냐!" 이를 보면 요흥이 유발발을 정말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하를 나눠먹을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니 더 이상 총애하기 힘든 지경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요옹의 말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발발은 힘을 기른 다음에 은혜를 원수로 갚았고, 요흥에 반란을 일으킨다.

 

요흥은 강인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유발발로 하여금 삭방(朔方,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오랍특기 동쪽)을 지키도록 하였다. 유발발은 병권을 얻고 게다가 부친의 옛 할거지를 되찾으니 옛 부하들을 끌어모았고, 207년 병사들의 옹립을 받아 스스로 대하천왕(大夏天王)이라 칭한다. 건국후에 유발발은 계속하여 남량(南凉), 후진(後秦)을 침범하며, 대거 영토를 넓혀간다. 413년 통만성(統萬城, 지금의 섬서성 정변현 경내)을 점거하고 수도로 삼는다. 유유(劉裕)는 북벌을 통하여 후진을 멸한 다음 군사를 되돌리니 장안이 비어있게 되었다. 장군들이 서로 공격하였고, 418년 유발발은 기회를 틈타 장안을 점령하고, 장안에서 황제에 오른다. 이렇게 관중을 장악하니, 국력이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유발발은 왜 혁련으로 성을 고쳤는가?

 

유발발은 왜 성을 혁련으로 고쳤는가? 필자가 보기에, 이는 유발발의 민족자존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선조가 성을 모에서 유로 바꾼 것은 한황실의 성을 따른 것이고, 모친의 성을 따른 것이다. 이는 마치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같고, 말하기는 좋아도 듣기는 불편한 일이었다. 유발발은 자신이 황제에 오르고 보니, 다시 한족의 성을 계속 쓰는 것은 스스로를 남보다 한 단계 낮게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서를 내려서, "자식이 모친의 성을 따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자신은 천자가 되었으니, "시위휘혁, 실위천련(是爲徽赫, 實爲天連)"이다 그리하여 "혁련"을 성으로 삼는다. 이리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영원무궁하게 경사를 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혁련이라는 성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적계황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고, 다른 흉노족들은 그저 "철벌(鐵伐)"을 성씨로 삼아야 했다. "이는 하늘이 존귀하여 다른 갈래나 서족들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통이 아닌 부족들은 모두 철벌을 성씨로 삼으라" 철벌은 바로 철불이다. 성을 지을 때도 여러가지 고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벌'의 의미는 "강예여철, 개감벌인(剛銳如鐵 皆堪伐人)"에서 따왔다. 대하국의 도성을 통만성(統萬城)이라고 불렀는데, 그 틋도 "통일천하, 군림만방(統一天下, 君臨萬邦)"에서 따왔다. 이를 보면, 혁련발발은 이런 형식상의 것에 대하여 아주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최후의 흉포한 흉노왕

 

혁련발발은 성격이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했고, 시기심이 많았다. <<진서>>에서는 "잔인각폭(殘忍刻暴)"하다고 적었다. 다음의 예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통만성을 만들 때, 성벽이 견고하도록 하기 위하여, 축성에 쓰는 흙은 모조리 찌고 삶았다. 축성후에 송곳으로 찔러서 만일 들어가면, 축성한 자를 죽여버렸다. "증토축성, 추입일촌, 즉살작자(蒸土築城, 錐入一寸, 卽殺作者)" 이렇게 성을 쌓으니 성이 견고하기가 돌도끼를 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장인들이 활, 화살, 갑옷을 만들 때 만일 화살이 갑옷을 뚫지 못하면 활과 화살을 만든 자를 죽였고, 만일 갑옷을 뚫으면, 갑옷을 만든 자를 죽였다. "사갑불입, 즉참궁인, 여기입야, 변참개장(射甲不入, 卽斬弓人, 如其入也, 便斬鎧匠)" 이렇게 죽음의 곁에서 전전긍긍하는 장인들이 만들어낸 병기는 당연히 날카롭고 단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량을 공격할 때, 혁련발발이 죽인 사람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그리하여 "고루대(骷髏臺)"라고 불렀다.

 

무수히 정벌하면서, 혁련발발의 살인은 더이상 절제가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의 마음내키는대로 죽이고 싶으면 죽여버렸다. 아무런 규칙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죽여야할 경우와 죽이지않아야할 경우를 가리지도 않았다. <<진서>>에는 그가 자주 성머리에 서서 손으로 칼이나 화살을 집다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렸다. 신하들이 약간 삐닥하게 보면 눈알을 파냈고, 웃음소리가 들리면 입을 찢었다. 직언을 하는 자가 있으면 혓바닥을 잘랐다.

 

혁련발발은 자신이 다스리는 신하와 백성을 마음대로 죽였고, 잔혹함이 극도에 달했다. 잔혹한 통치를 통하여 혁련발발이 건립한 대하국은 한 때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폭정통치에만 의존해서는 오래갈 수가 없다. 혁련발발이 죽은 후 10년이 되는 해인 434년에 대하국은 북위에 멸망당한다. 흉노의 역사상 최후의 휘황도 이렇게 끝이 난다. 그저 도끼를 갈 수 있을 정도도 단단한 통만고성은 1500년의 풍우창상을 견디면서 지금까지도 그 웅장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다. 아마도 흉노민족에 대한 약간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